※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과 공격이 심각한 백래시 시대,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로 다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스무 편이 연재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가난의 경험, 보편과는 거리가 먼 삶
내 정체성의 한 부분에는 원가족과 살던 때의 가난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 병원에서 월급이 나오지 않는 ‘원목’(병원목사)으로 일했던 아빠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애 다섯 딸린 집의 생계를 나 몰라라 했다. 늘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거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남편을 둔 엄마는 자녀를 굶기지 않을 정도의 돈을 벌어왔다.
주위에 평범한 가정환경을 가진 친구들의 경험과, 내가 겪는 가난의 경험에는 거리가 있었다. 차이를 감출수록 친구들과 잘 지낼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에 익숙해졌다. 남들과의 차이를 발견하면서 내 정체성을 찾아가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꿈이 있다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 꿈마저 나에게는 멀어 보였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처음 페미니즘을 접했다. 사회에서 얘기하는 ‘정상’이라는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며, 여자와 남자 또한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 이 두 가지에 동의하며 페미니즘을 받아들였다.
이후 가장 처음 한 일은 목사와 리더는 남성, 돕는 건 여성으로 성 역할이 구분되어있는 보수기독교를 뛰쳐나오는 것이었다. 매주 토요일 찬양팀 연습, 일요일엔 예배, 끝나고는 청년부 중창단을 하고, 방학 때는 단기선교를 가던 ‘열성 신자’였던 내가 ‘여성과 가난한 사람의 하나님’을 얘기하는 작은 교회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변했다. 세계가 한 번에 뒤집히는 듯했다.
그런데, 주위에 페미니스트라고 대표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그동안 차별적인 세상에 적응하려 애쓰며 평등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 나와는 달리, 어릴 때부터 진보적 지식에 접근할 수 있었던 듯 보였다. 사회초년생인 나는 새롭게 받아들인 페미니즘 인식론과 연결될 자원도, 고민하고 논의할 시간도 많지 않았다.
‘여성’은 균질한 집단이 아니다. 가난으로 비롯한 나의 경험은 늘 그랬듯이 사회 보편과 거리가 멀었다. 남들과는 다른 나의 경험에서 차이를 인지하고, 해석하고, 언어화하기란 무척 피곤한 일이었다. 긴 시간 쌓아온 습관대로, 나는 새롭게 마주하게 된 세계와 나의 차이를 감추었다. 때로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무는 편을 택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 다르다’는 것을 기본값으로
그래도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퇴근 후엔 운동을 하거나 약속이 없으면 강의를 찾아들었다. 원래 새로운 것을 배우는 걸 재미있어 하긴 했지만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남들보다 더 열심을 내는 데는 ‘결핍’이 동력이었다. 세상엔 내가 모르는 재미있는 것이 많고 나는 늘 부족했다. 돈 때문에 배우고 싶은 것을 못 배웠고 경험하고 싶은 것을 경험하지 못해서 느낀 결핍이 나를 움직이게 하였다.
무수한 강의를 듣던 중, 여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살림 또는 조합)에서 ‘살림치과’를 개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이직을 했다. ‘약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살림과 연결된 것은 나에게 큰 자원이었다. 조합의 현황과 고민을 투명하게 공유하고, 각 사업소 별로 직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시간을 갖고, 평등한 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속에서 존중과 평등과 민주주의를 배웠다.
그리고 움직이는 것을 통해 생각을 쉬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살림에서 알게 되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회의하고 나면, 밖에 나가서 하천을 걷고 등산을 하는 것이다. 그 분들을 보며, 삶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고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으며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아주 가끔 만나는 사이지만 근본적으로 연결되어있다고 느끼는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꽤 큰 안정감을 가져다 주었다.
살림에서는 남들과 비슷한 것처럼 보이게끔 나를 숨기지 않아도 됐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각자 삶의 경험과 방식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기본값으로 두고, 그럼에도 우리가 함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서 원칙을 세우는 곳이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 점을 명문화하고, 교육하는데 열심을 다한 것 또한 큰 힘이 되었다.
‘차이’를 드러내도 안전한 공동체
차이를 인정하고, 거리를 둔 채로 ‘시민적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를 배운 곳이 살림이라면, 차이를 마음껏 드러내고 열띠게 토론하며 함께 성장한 관계는 ‘비혼지향생활공동체 공덕동하우스’(이하 공덕동하우스)라고 할 수 있다.
공덕동하우스는 ‘정상가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제도에 문제 의식을 가지고, 가난의 경험을 공유하거나 계급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모였다. 동시에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과 기반과 지금까지의 경험 등에 따라 이 공동체에서 하려는 바와 기대하는 바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수용했다. 우리는 최대한 각자 자신의 욕구를 알아채고, 그것이 공동체 상과 맞물리는 부분을 찾는 시간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다.
공덕동하우스에 대해서 한 구성원은 ‘안전하게 틀릴 수 있는 곳’이라고 느껴져서 함께 하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 말처럼 내가 틀렸을 때 지적해주는 동료가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나는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으며, 당위가 아니라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다. 받아들여지는 경험은 그동안 차이가 드러날까 봐 입을 다물고 있던, 걱정 많은 나의 입을 열게 했다.
페미니즘 인식론이 ‘소외’를 보는 관점
2020년 가을학기에 ‘아랫마을 홈리스 야학’ 글쓰기교실에서 자원활동을 시작했다.(지금은 합창교실에서 활동 중이다.) 그곳에는 가난 그 자체로 인한 불편함 뿐만 아니라 사회적 낙인으로 인한 온갖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많았다.
주어진 환경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온 힘을 다해 살아왔을 뿐, 그 중 게을러서 가난하게 된 이는 없었다. 온갖 집안일과 여러 군데 병원 검진과 치료로 꽉 찬 하루를 보낸 그날에 대해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표현하신 분, 자신이 병수발 해드린 엄마에게 ‘쓸모없는 자식’ 취급을 당했던 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분들에게 공적인 것은 크고 사적인 것은 작게 보는 공사구분 이데올로기와, 돌봄노동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사회가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있음을 말씀 드렸다. 사회에서 작다고 치부해버리는 각자의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려면 혼자서는 어렵고, 그것을 약자의 눈으로 해석해주는 동료 시민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지정 성별 남성이었지만, 나는 이분들의 경험을 페미니즘 인식론을 통해 해석할 수 있었다. 여성이 남성의 자리에 올라간다 해도, 그 자리를 메우는 다른 여성이 생긴다는 것, 그리고 남성도 여성의 자리에 놓여질 수 있다는 것을 페미니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은 나의 계급 관점과 활동이 페미니즘과 연결되어있음을 상기시켜준다.
한해 전부터는 비온뒤무지개재단(rainbowfoundation.co.kr)에서 상근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더 나은 자신에 대한 욕구는 더 나은 사회를 바라는 것으로 이어졌고, 그 기회가 마침 쉬고 있던 차에 타이밍 좋게 찾아왔다. 전에는 보건계열 전문직종으로 일했던 터라, 퇴근 후 짬짬이 하는 활동이 전부였다. 전업 활동가가 된 지금은 적당히 월급 받기 위해서 일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나만의 의제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 또 새로운 것에 대한 흥미로 활동을 늘리고 있다.(활동이 ‘늘어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약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관점을 가지고 연대하다 보면, 이것들이 하나로 꿰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우선 주어진 일을 해내는데 집중하고 있다.
내 한 달간의 ‘돌봄’ 예산
나를 돌보는 것은 타인을 돌보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기에, 가능한 재미있는 일을 찾아서 하고 있다. 매주 기타를 배우고 야학 합창교실에서 수업을 한다. 아침과 주말에는 운동을 하고, 날이 좋을 때는 따릉이를 타고 출근한다. 나만 즐거운 순 없으니 기회가 될 때마다 덜 움직이는 동료를 찾아가 운동을 같이 하자고 영업한다. 이미 활동적인 동료와는 등산 약속을 잡는다. 친구와 동료의 영향으로 공연과 전시를 보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서로 나누며 관계를 만들어간다.
내 한 달 예산에는 주위 사람들을 돌보기 위한 비용이 책정되어있다. 외식비보다 돌봄비가 더 많이 책정되어있다. 돈이 없을 땐 외식비를 줄이지, 돌봄비를 줄이지는 않을 정도로 나에게 중요한 부분이다. 이 돈은 주로 친구 생일 선물을 살 때, 식구들과 함께 먹기 위한 네 캔 맥주를 살 때, 친구에게 어울리는 옷을 발견할 때, 친구에게 밥을 살 때 주로 쓰인다.
3월엔 돌봄 비용이 예산을 초과하였다. 다른 건 몰라도 남을 위해 쓰는 비용이 초과하는 건 뿌듯한 일이다. 이 예산만은 넉넉하게 책정할 수 있는 삶이 앞으로도 계속되길 바란다.
나에게 페미니즘이란,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차이를 드러내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관계가 생겨나며, 관계를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아직 채 언어로 정리되지 않아 지금은 명확히 알지 못하더라도, 나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동료가 있기에 느리더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걸어가게 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필자 소개] 홍주은. 비혼지향생활공동체 공덕동하우스의 멤버.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 대의원이자 교육나눔위원회 신입위원. 아랫마을 홈리스야학에서 합창교실 교사. 비온뒤무지개재단 상근활동가. 남다른 체력으로 여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음악과 움직임을 통해 힘을 얻고 관계를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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