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도 유난히 의사 표현을 똑 부러지게 하는 아이가 있다. <내 복에 산다>의 막내딸이 그런 아이다.
<옛날에 정승집이 딸만 삼형제를 뒀는디. (...) 딸만 키워도 하두 이뻐서 큰 딸을 데려다가, “아무것이야, 너 누구 복이루 먹구 사냐?” 하니께, “아버지 복이루 먹구 살지유.” “너는 됐다.” 가구 인저, 또 둘째딸을 불러다가 인제 그눔두, “하이구, 아버지 복이루 먹구 살지유.” 그런게 인제 그눔두 됐다 그러구. 막내딸을 데려다, “너 누구 복이루 먹구 사냐?” “내 복이루 먹구 살지 누구 복이루 먹구 살어유!” 그라더랴. 그랑게 하두 괘씸해 가지구 (...) 엄마 아버지가 집이를 못 들어오게 쫓아내 버렸대유.> (한국구비문학대계 2018년 충남 계룡시 도중열의 이야기)
힘을 가진 자의 많은 질문이 그렇듯이 아버지는 딸의 생각을 물은 것이 아니다. 성장기의 딸에게 가부장의 지위와 가족 내부의 위계를 뚜렷이 못박아두고자 해본 소리다. 그런데 막내딸이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자의식을 드러내어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눈치껏 말 대접을 해야 할 자리에서 또박또박 말대답을 했으니 괘씸죄를 지은 셈인데, 딸이 쫓겨나기에 이르렀다니 갈등이 심각했던 모양이다. 이야기는 덤덤하게 흐르지만, 현실에서 이런 장면은 아래 글과 같이 폭력과 상처로 얼룩질 때가 많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한테 당하는 폭력에 일일이 대들었잖아. 내가 뭘 잘못했냐고, 잘못했더라도 왜 때리냐고. 그렇게 대들면 대든다고, 잘못했다고 안 한다고, 더 맞았지 난 잘못했다는 말이 죽어도 나오지를 않았어. 그 매를 다 맞으며, 때리는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고 이를 갈았어. 그러면 아버지는 “어디다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가냐”며 더 심하게 때렸어. (...) 아버지의 그 눈빛을 지금도 기억해. 제 정신이 아닌 그 눈빛을.>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최현숙, 이매진, 2013)
지금까지도 가정폭력은 ‘집안 일’이고, ‘버릇을 고치는 것’은 가부장의 권리이자 책임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다. 이는 당연히 가부장의 말일 뿐이다. 모든 폭력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지만, 아버지 소유의 ‘안전한 집안’에서 일어나는 ‘따끔한 훈육’에 대해 ‘딸린 식솔’들은 폭력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가부장의 난폭하거나 무례하거나 생각 없는 말과 행동은 ‘다 널 위해서 하는’ ‘아버지 덕’의 하나로 대접받기 일쑤다. 막내딸이 쫓겨나기를 무릅쓰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아버지 덕을 구성하는 폭력적 요소들이다.
<그래 인자 그놈을 가지고 한 없이 가는디, 저기 숯무지 총각이 있더래요. 거 가서 인제 나 좀 재워 달라고 그러니께. 장개도 못 간 늙은 총각하고 어머니하고 사는디, 그렇게 반들반들한 서울 아가씨가 왔으니 얼마나 좋을껴. 그라니께 이냥 자기는 참 못 자구 이불을 못 덥구 그래두 이니를 잘 그래두 인저 이불을 덮어서 인자 방에다 재워줬디야.>
속이 숯덩이가 된 채 떠돌던 막내딸이 흘러든 곳은 숯막이다. 평소에 “그렇게 고집부리면 숯장수한테 보내버린다.”라고 을렀을 법한 곳으로, ‘아버지 덕’이라는 울타리 밖에 있는 신분 사회의 밑바닥이다. 비정하게 추방된 어린 여성은 캄캄한 산 속에서 오로지 ‘내 복’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추방을 그로부터의 독립으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아직 예는 안 갖췄지만 밥은 제가 갖다 준다고 몌느리가 밥을 가지구 아이구 산이루 올라가는디, 그 숯무지 구딩이가 그냥 번쩍번쩍 하드래유. (...) 그라니께 인자 그 저 남자보고, 오늘 그 이마독 좀 하나 빼 가지고 오라고. 한게 그냥 이 사람이 낙심천만을 하고 깜짝 놀라더랴. 우리는 이걸루 두 모자가 먹고 사는디, 이걸 뿌시면 어떡하냐. 아이 어떻게 됐던지간에 하나를 파오라고 했대, 빼오라고. (...) 그걸 파 가지구 와서루 집이 왔는디 그냥 자기가 물을 붜, 옹달 솥이다 물을 끼얹져 가메 사뭇 쑤시미로 닦으라고 하더래유. 그라더니 생금덩어리가 됐대유. 그게.>
숯장수 총각은 아버지와는 다른 남자다. 오갈 데 없는 그녀를 귀한 사람으로 대접하며 따뜻하게 맞이한다. 그는 순하지만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 흔히 팔불출이니, 여필종부니 하며 부부 사이의 사랑과 신뢰를 공격하는 가부장제의 악의적인 규범에 대해 개의치 않는다. 아내가 돌을 보고 금이라고 했을 때조차 ‘곱게 자라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의 헛소리로 넘기기는커녕 기꺼이 전 재산인 숯가마를 헐어 그녀를 뒷받침한다.
막내딸이 알아본 금덩이는 숯가마의 한가운데에 있다. 그것은 숯가마 속에서 이글대는 황금 불꽃이다. 숯은 타죽은 나무에 지나지 않지만, 황금빛으로 달아오르면 돌을 녹여 금을 만드는 엄청난 힘을 뿜어낸다. 인류 문명을 일으킨 대장간의 뜨거운 기운은 검은 숯이 불의 눈을 떴을 때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찾은 것은 신분과 나이와 젠더라는 그을음 속에 가려져 있던 생명력이자 불처럼 일어나는 기운이다.
제주도에서는 이 이야기가 <가문장아기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셋째 딸인 가문장아기는 누구 덕에 사느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내 배또롱 아래 선 그몸 덕으로 묵고 입고 잘 삽니다.”라고 대답한다. 배꼽 아래 그어진 검은 선은 여성의 생식기를 말한다. 대지의 덕을 품은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하늘 아래 하나뿐인 몸의 존엄함으로 산다고 대답한 것이다. 총각의 검은 숯가마와 가문장아기의 불두덩은 탄생과 창조의 샘이라는 점에서 같은 곳이다.
둘이는 검댕을 덮어쓴 채 박혀있던 돌을 모셔다가, 맑은 물로 정성껏 씻어 숨어있던 황금빛 속살을 찾아낸다. 가부장제 가족제도가 그녀에게 덮어씌웠던 검은 먼지도 시커먼 물과 함께 흘려보낸다.
<그랑께 엄청 부자가 아녀. 그래서 인자 그놈을 가지구 대목을 딜여서 집을 짓는디, 아무 목수두 다 필요없다구 다 퇴짜를 놓드래유. 그래 워트게 집을 질라구 그라느냐 그랑께, “다른 건 집을 잘하든 못 하든 간에, 물을 열으믄 삐드득 소리 하지 말구, 내복 소리만 하라구.” 하더랴. 부엌문을 열어두 내복, 대문을 열어두 내복. 인저 자기 복이루 먹고 산다고.>
황금과 함께 자존감을 회복한 색시는 튼튼한 자신의 집을 짓는다. 그리고 남편의 이름으로 문패를 거는 대신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듣기 거북한 소리를 일부러 내도록 했다니, 세상의 이목에 개의치 않고 발언을 이어가겠다는 뜻이다. ‘내 복’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가부장의 부와 권력은 그가 훌륭해서 독점할 수 있었던 게 아니며, 돌을 금으로 만드는 ‘복’은 공감하고 지지하는 관계에서만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거지가 된 아버지는 떠돌아다니다가 막내딸의 집을 찾는다. 결말은 대부분 딸이 아버지를 잘 모셨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두렵고 원망스럽던 범은 이제 없다. 다시 만난 아버지는 늙고 병든 한 사람일 뿐이다. 딸은 오래 묵은 그을음을 닦아내듯이 벌거벗은 아버지의 몸을 씻어주며 그를 용서하고 이야기를 맺는다. 늙고 병든 아버지와 중년의 딸 사이에 이런 장면은 현실에서도 낯설지 않다.
<아버지도 나름대로의 꿈과 욕망이 있었고, 한계와 좌절과 후회가 있는 한 인간이야. 그 양반도 엄마나 내 입장에서는 기득권자이고 폭력의 가해자였지만, 다른 한편 피해자이기도 한 거지. (...) 엄마와 이 구술사 작업을 하면서, (...) 아버지라는 한 인간을 향한 나의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나온 만남의 한계, 그런 걸 많이 깨닫게 됐어. 나 때문에 받았을 아버지의 상처도 가늠을 해보게 됐고.>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최현숙, 이매진, 2013)
<내 복에 산다>의 여러 채록본에서 아버지가 스스로 목욕을 했다는 대목은 찾기 어렵다. 이야기에서나 현실에서나 고통을 딛고 살아난 생존자는 ‘화해’라는 아름다운 의식을 준비한 채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과를 기다리지만, 가해자는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조차 모르는 때가 많다. 용서와 화해는 삶을 받아들이려는 생존자의 독백이 되기 일쑤다. 가족 관계의 폭력적인 위계 속에서도 억척스레 살아남은 막내딸들이 여전히 듣기 어려운 말은 아버지의 “미안하다”는 한 마디다.
[필자 소개] 심조원. 어린이책 작가, 편집자로 이십 년 남짓 지냈다. 요즘은 고전과 옛이야기에 빠져 늙는 줄도 모르고 살고 있다. 옛이야기 공부 모임인 팥죽할머니의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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