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퀴어 페미니스트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춘천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

정한새 | 기사입력 2022/05/02 [16:22]

지방 퀴어 페미니스트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춘천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

정한새 | 입력 : 2022/05/02 [16:22]

※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과 공격이 심각한 백래시 시대,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로 다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스무 편이 연재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서울, 대구, 부산과 제주, 그다음?

 

봄이다. 우리나라는 땅덩어리가 그렇게 큰 편도 아닌데, 딴에는 위아래로 길이가 있다고 저 밑 제주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는 게 신기하다. 더 신기한 건 나이를 먹어도 봄이 되면 설렌다는 거다. 사회적 학습 때문인지, 세상이 좀 더 색색으로 변화하면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한지 모르겠지만, 일하다가 문득 복도로 나가 창문 너머를 보면 그렇게 마음이 수런거린다.

 

봄이 되면 무엇이 시작되는가. 축제다. 축제가 시작된다. 특히 꽃을 중심으로 한 축제가 많은데 태안군에서는 ‘2022 태안 세계튤립꽃박람회’를, 경기도 광주시에서는 ‘화담숲 봄 수선화 축제’를, 서귀포시에서는 ‘휴애리 봄 수국축제’를, 고양시에서는 ‘고양국제꽃박람회 2022’를, 경주시에서는 ‘2022 경주벚꽃축제’가 열렸다. 그런가 하면 ‘서천 동백꽃 주꾸미 축제’처럼 축제명만 봐서는 어떤 축제일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 지역축제도 있다.

 

▲ 2010년 생애 두 번째로 (서울)퀴어문화축제에 다녀오면서 남긴 사진. 이때 처음으로 축제가 아니라 축제에 다녀온 나를 찍어보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웃팅에 대한 두려움이 무척 커서 ‘일반인 코스프레’를 할 수 있는 아이템만 착용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촬영: 정한새)

 

하지만, 퀴어(queer)에게 가장 중요한 축제는 뭐니 뭐니 해도 ‘퀴어문화축제’이다. 서울퀴어문화축제는 2000년 시작해 올해 23회를 맞이한다. 2022년 공식 슬로건은 ‘살자 함께하자 나아가자’인데 전세계적 위기에 대응하여 제정한 문구라고 한다. 2009년, 대구시에서 대구퀴어문화축제가 열리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퀴어문화축제는 서울에서 열리는 게 전부였다. 지금이야 대구시를 이어 부산시, 제주시, 전주시, 인천시, 광주시, 경상남도, 춘천시에서 퀴어문화축제를 진행하고 있지만 오랜 시간 퀴어들에게 ‘퀴어문화축제’라고 하면 으레 서울에서 열리는 축제를 말하는 거였다.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며 무슨 옷을 입을지, 어떤 퍼레이드 트럭 뒤에 설지, 이번에는 행진 때 어떤 노래가 나올지 등을 이야기하곤 했다. 특히 서울이 아닌 지방에 사는 퀴어들은 차비와 식비, 그리고 1박을 할 경우 숙박비를 마련하기 위해 야금야금 저금도 하고, 퀴어퍼레이드 때 만나자고 약속하기도 했다.(한 명이 강원도 살고 한 명이 전북에 살면 서울에서 만나는 거 ‘국룰’이잖아요.)

 

나는 2008년부터 서울퀴어문화축제에 10년 넘게 꼬박꼬박 출석 도장을 찍었다. 그러다가 2009년에 드디어! 서울 이외의 지역으로는 처음으로 대구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구까지 내려갈 이유는 없었다. 대구 다음에 퀴어문화축제를 여는 도시가 나오는 때까지는 10년 가까이 걸렸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제2회 전주퀴어문화축제 뱃지, 제2회 부산퀴어문화축제 로고 뱃지, 제2회 부산퀴어문화축제 마스코트 뱃지, 제19회 서울퀴어문화축제 부스 중 제주퀴어문화축제 조직위를 후원하고 얻은 제주4.3 동백꽃을 품은 퀴랑이 뱃지. (촬영: 정한새)

 

그다음 퀴어문화축제가 시작된 곳은 2017년 부산과 제주였다. 2018년에 부산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하려고 기차와 숙박을 전부 예매했는데 태풍 때문에 연기되고 말았다. 위약금을 내느니 부산 여행이나 가자는 마음으로 홀로 여행에 다녀온 후로는,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없는 지역의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하는 일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혐오 세력의 공격을, 지방 축제가 감당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우리나라에서 서울 말고 다른 곳에선 퀴어문화축제가 열릴 수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서울퀴어문화축제의 규모는 꾸준히 커졌지만, 동시에 혐오 세력의 방해 활동도 다채로워졌다. 초창기에는 확성기를 끼우고 오토바이로 행진 주변을 돌던 사람 몇 명 보는 것 정도였는데, 이제는 혐오 세력이 퀴어보다 퀴어문화축제에 더 진심인 것 같다.

 

가장 부아가 났던 건, 서울광장에서 축제에 참여할 때 우리는 계속 갇혀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홍대입구에서 할 때까지만 해도 그렇진 않았는데(그때는 퍼레이드 때 혐오자들이 스크럼을 짜고 드러누워서 진행이 n시간 연장되긴 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갇혀서 축제를 진행해야 했다. 광장을 둘러싸고 철책을 치고, 그 안에서 부스를 차리고 왔다 갔다 했던 시간들. 몇만 명의 사람이 더운 날씨에 그 안에서 오가고 있을 때, 철책 너머에서는 혐오자들이 부채춤을 추고 트럭에서 거짓 선동을 하고 어린이를 앞세워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며 소리 지르고 있었다. 나는 축제에 가는 게 기쁘면서도, 안과 밖을 가로지르는 ‘경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순간마다 무언가 내려앉는 기분이 들곤 했다.

 

▲ 2018년 전주퀴어문화축제 행진에 참여했을 때 촬영했다. 서울퀴어문화축제를 오래 다녀서 그런지, 부스를 돌아다니거나 공연 관람 시 어깨를 부딪치지 않는 경험이 새로웠다. 그래도 참여자들이 모여 한옥마을을 가로지를 때는 굉장히 짜릿했다. (촬영: 정한새)


혐오자의 인구만큼 퀴어의 인구도 많은 서울조차 그럴진대, 다른 지역은 어떻게 이걸 감내할까?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하는 처음 몇 년간 나는 ‘촬영 금지 스티커’를 몸에 붙이고 다녔다. 축제 조직위원회 부스에서 나눠줬는데, 촬영을 원하지 않는다면 스티커를 부착하는 것으로 의사를 표시하라는 거였다. 하지만 그 스티커를 붙이고 다녀도 촬영할 사람은 우리를 찍었고, 촬영 허가 명찰을 차고 있지 않은 곳에서도 카메라를 들이대서 스태프들이 돌아다니며 렌즈를 가렸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한 3년 정도 스티커를 붙이다가 나중에는 그만두었다. 그래, 볼 테면 봐라. 이 영상이 9시 뉴스에 나가도 우리 할머니가 나를 찾아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 기억이 지역적 상상력을 제한했다. 규모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내가 최초로 참여했던 2008년의 서울퀴어문화축제는 부스도 듬성듬성 서 있었다. 지방에서 그 정도의 규모로 개최했다간 혐오 세력이 2시간도 안 되어 부스를 다 부숴버릴 것만 같았다. 또, 서울에서 개최하면 다른 나라 대사관에서도 오고, 국회의원도 와서 발언하고, 공연팀도 여러 곳을 섭외할 수 있지만, 홍성군에서 퀴어문화축제를 연다고 하면 그 반절이라도 가능할지 낙관할 수 없다.

 

2018년에 열린 제1회 인천퀴어문화축제가 혐오 단체들의 조직적이고 기민한 폭력과 마주했을 때, 현장에 있던 동료와 친구들이 몸도 마음도 다쳐서 돌아와 울면서 상담 치료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분노와 슬픔과 고통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하고야 말았다.

 

소양강 처녀상 앞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시간

 

그래서 작년 하반기, 춘천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린다고 했을 때 본능적으로 가는 눈을 뜨고야 말았다. 춘천!?!?!! 내가 아는 그 춘천? 내가 나고 자라고 걷고 뛰고 피카츄 돈까스 먹으면서 하교하던 그 춘천에서 퀴어문화축제를? 맨얼굴로 나가면 분명히 누군가가 나를 알아볼 거라고! 이를테면 ‘어, 저기 무지개 깃발 들고 있는 쟤, 옆집 사는 사람 언니 남편의 조카의 친구의 후배 아니냐?’처럼 말이다! 춘천에서 살며 춘천시민 외의 사람을 보는 것부터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었는데, 그 와중에 교회니 모임이니 하는 인적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있어서(이 ‘도시’ 어딘가에는 아직도 집성촌이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신상 털리는 건 한순간이다.

 

▲ 제1회 춘천퀴어문화축제 포스터. 전국에서 사람들이 서울퀴어문화축제로 모인다는 것은, 결국 전국 어디에나 퀴어가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출처: 춘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트위터 공식 계정)

 

그런데도 춘천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는 해냈다. 소양강 처녀상 앞에서 모여 무지개 깃발을 들었다.(솔직히 장소 선정도 미쳤다고 생각했다. 극단적으로 쓰면, 어떤 혐오 세력이 뛰어 들어와서 몸싸움하다가 떼밀면 나는 제방을 데굴데굴 굴러서 소양강에 빠져버릴 수도 있다.) 모든 퀴어문화축제가 그렇듯, 길 건너편에 혐오 세력들이 모여서 찬송가를 부르며 기도할 때, 퀴어와 앨라이(ally, 지지자)들은 서로를 보고 웃으며 행진했다. 춘천퀴어문화축제가 끝나고 올라온 사진을 하나씩 하나씩 찾아보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바로 거기에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있었다. 내가 살고 싶은 곳에, 계속 버티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힘. 어쩌면 지방에 살았던,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퀴어페미니스트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아니었을까. 지방에는 영화제도, 페미니즘 강의도, 퀴어문화축제도, 퀴어 동아리도 찾아보기 어렵다. 만들려다가도 실패하고, 만들어놔도 지속하기가 힘들다. 그런 데서 살며 느낀 것은 수도권과의 정보 격차나, 사회적 이슈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소외감도 있을 테지만, 근원에는 ‘커뮤니티’를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안부를 물어볼 사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 사람,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면 집에서 느지막하게 일어나 하품하며 옷 갈아입고 세수하고 신발 신고 나가서 이십 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곳에서 손 흔들며 만날 수 있는 사람. 옆집에 사는 퀴어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아웃팅이 될까봐 차마 어디 사냐고 물어보지 못했던 마음이 모이고 쌓여 소양강 처녀상 앞에서 서로를 만나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물이 개화하는 시기를 봄이라고들 하지만,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꽃은 핀다. 그리고 그 모든 꽃에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 마찬가지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절대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곳에서도 우리는 작더라도 나름의 의지와 행복을 가지고 모일 수 있다. 축제가 아니어도 된다. 우리 옆집에 또 다른 우리가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면, 하루라도 좋으니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들 수 있다면, 이름이 무엇이든 뭐가 중요할까. 그 모든 시간이 축제일 것을.

 

[필자소개] 정한새. 퀴어, 페미니스트, 계약직 노동자. 팟캐스트 ‘페어북 ; 페미니스트 퀴어 북클럽’의 공동 기획자 겸 진행자. 라이프스타일숍 ‘피우다’의 객원 섹스 칼럼니스트. ‘나’에 속한 모든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노력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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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2022/05/13 [13:57] 수정 | 삭제
  • 너무 좋아요 서로 같은 생각을 가진 존재를 만난다는것 확인하는것 자체가 주는 위로가 있어요 힘든 시대인데 같이 버텨봐요
  • 여기도 퀴어 2022/05/09 [13:39] 수정 | 삭제
  • 전북에 사는 퀴어 페미 여기도 있어요!
  • 옆집의 퀴어 2022/05/03 [15:33] 수정 | 삭제
  • 소양강 처녀상 앞에서 열린 퀴퍼 얘기 너무 재밌어요.
  • 2022/05/02 [19:42] 수정 | 삭제
  • 지방에 사는 퀴어 페미니스트 여기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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