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에 빨간 줄부터 긋지 말고 해석하려 애써봐요[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선’ 넘는 글을 쓰는 발달장애인, 김유리*‘싸우는 여자들 이야기’를 기록한다. 지금 내가 선 자리를 지키는 일도, 정해진 장소를 떠나는 일도, 너와 내가 머물 공간을 넓히는 일도, 살아가는 일 자체가 투쟁인 세상에서 자신만의 싸움을 하는 여/성들을 만났다. 세상이 작다거나, 하찮다거나, 또는 ‘기특하다’고 취급하는 싸움이다. 세상이 존중할 줄 모르는 싸움에 존중의 마음을 담아, 각기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고 공부하고 노동하는 11명의 필자가 인터뷰를 연재한다. [싸우는여자들기록팀]
발달장애인 청년들에게 ‘동요’ 들려주는 세상에 고함
세상과 싸우는 여자로서, 김유리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을 때 그는 멋쩍어하며 말했다. “시위 같은 것을 해야 싸우는 사람들 아닌가요?”
나는 김유리를 발달장애인 글쓰기 모임에서 만났다. 솔직히 말하면, 그가 글을 너무 잘 썼기 때문에 인터뷰를 해 보고 싶었다.
발달장애인이라고 하면 늘 ‘지적인 문제로, 읽고 쓰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라는 말이 따라다닌다. ‘읽고 쓰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은 결국 세상의 문법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지만, 김유리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이러한 말을 파괴하는 사람이 된다.
발달장애인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김유리가 펜을 들고 쓰기 시작하는 순간, 그리고 그가 쓰는 글들은 세상에 균열을 내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나를 보는 당신의 시선이, 나의 글을 읽고 해석하는 데 애쓰지 않고 빨간 줄을 그으려고 하는 당신의 펜과 시선 그리고 이 세상이 부족한 거라고.
인터뷰를 해 달라고 김유리를 설득했다. 싸운다고 하면 흔히들 집회나 시위를 생각하지만, 싸우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누군가는 마이크를 잡고 앞에서 이야기하지만 김유리는 그런 방식을 부담스러워한다. “생각이 입 밖으로 잘 나오지가 않아요” 김유리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로 결심하면서 선택한 무기는 글이다. “그래서 글로 써요.” 그는 큰소리가 나는 것을 몹시 무서워해도, 자신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글쓰기로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이다. 당사자의 시선으로 ‘왜 발달장애인은 이런 식으로 대우받아야 하지?’라고 물으며 자신이 겪은 일을 써내려 간다.
발달장애인에 대해서 세상은 너무나 ‘쉽게’ 이야기한다. 발달장애인이 아무리 성장해도 어른으로 보지 않고 ‘보호’가 필요한 사람으로만 바라본다. 발달장애인을 돌보는 사회복지사, 선생님, 보호자의 시선에서 많은 것들이 ‘대신’ 이야기된다. 돌보는 사람의 고통이 곧 발달장애인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발달장애인도 욕망이 있는 사람이다. 비장애인이 삶에서 느끼는 고통, 외로움, 행복, 신남, 고민, 좌절을 발달장애인도 느낀다. 삶의 복잡함을, 김유리는 자신의 언어로 포착해 써내려간다. 그래서 그의 글쓰기는 치열하다. 그는 매번 자신을 둘러싼 것들에 조심스레 의문을 제기한다.
<꽤 오래전, 발달장애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여가활동 프로그램에 요즘 어린아이들도 잘 안 듣는 동요가 출몰했다는 소식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접한 기억이 있다. 신나 하기는커녕 ‘이걸 왜 틀어주지?’, ‘우리가 왜 이 노래를 듣고 있어야 돼?'라는 표정을 보였다고 한다. 다행히 요즘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듯하다. 눈 부릅뜨고 비슷한 사례를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가까운 미래에는 발달장애인이 더 이상 피터팬 취급받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본다. 5년 후에 40대가 되고 25년 후에 60대가 된다 해도 유독 나에게만 놀란 토끼눈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그 토끼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악다구니를 쓰고 말겠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러실 거세요? 제 안에 피터 팬은 죽은 지 40년이나 지났다구요..’> (에이블뉴스, “사회의 편견으로 어른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 2021년 7월 12일 기고글 중에서)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쓴다
김유리는 글을 통해 자신이 만나고 싶은 세상에 대한 이야기도 한다. 발달장애인은 길 찾기를 어려워한다. 그 이유는 길을 찾는 구조가 어렵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직관을 요구하는 표지판은 읽기 어렵다. 또, 지도 앱에 나오는 목적지까지의 도착 시간은 비장애인 기준의 시간일 뿐이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이나 길을 찾기 어려워하는 발달장애인은 그 ‘예상’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품을 들여야 한다. 김유리는 코로나19 백신을 맞으러 갔다가 길 찾기와 관련한 ‘유토피아’를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쓴 글을 보여주었다.
<다행히 가는 길마다 안내 표지판이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안내표시가 정말 잘 되어 있었다. 벽뿐이 아니라 바닥에도 화살표가 붙어 있었다. 화살표를 보고 따라가기만 하면 됐었다. 거기다가 안내해주시는 분들이 동선마다 계셨다. 헤매고 싶어도 헤맬 수가 없었다. 낯선 곳에 혼자 가서 우왕좌왕하지 않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안내표시와 안내해주시는 분들이 안 계셨다면 엄청 헤맸을 것 같다. 성급한 마음에 예진표를 받기도 전에 접종받는 곳으로 가려는 등 갖은 실수를 연발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처럼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았을 테다.
예진표가 조금 더 작성하기 쉽게 되어 있었다면, 내가 예진표 작성을 끝냈을 때 근처에 계셨던 안내원 중 한 분이 나에게 ‘아이고 잘했네’라는 말만 하지 않으셨더라면, ‘여기가 바로 내가 꿈꾸던 유토피아’라고 외칠 뻔했다.> (에이블뉴스.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 2021년 8월 23일 기고글 중에서)
나는 ‘글을 잘 쓰는’ 김유리를 말하기 위해 그가 쓴 글을 찬찬히 읽어보다가 어떤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글쓰기는 자기표현의 일종이라고들 하면서 쓰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읽고 쓰는 것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것이 글쓰기다. 내 글이 어떻게 보일지, 어디까지 독자들에게 ‘파악’이 될지를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괴롭고, 두려움을 뚫고 쓰는 일이다. 나는 김유리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가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나와 조금은 비슷한 사람이라고도 생각했다. 김유리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글을 쓰는데 무엇이 당신을 두렵게 하나요?’ 망설이지 않고 그가 대답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다고.
“예전에는 아는 사람들한테 무슨 말이든 하고 나면 가슴이 뻥 뚫렸어요.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과 시위대를 지나쳤는데 ‘시위 말고 다른 방법도 있을 텐데 노력해 보지도 않고 무작정 시위만 하려고 하니…’ (그러길래) 나는 ‘가만히 앉아서 민원만 넣으면 안 바뀌니까’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못했어요. 관계가 틀어질까 봐요. 그때부터 점점 내가 경험했던 일을 말하는 걸 꺼리게 된 거 같아요. 또, 사람들이 공감을 해주지 않으면 잘못된 글인가 싶기도 하고요.”
이 마음을 듣고 마음이 조금 두근거렸다. 그가 느끼는 감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아서 그랬다. 나에게도 글쓰기란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김유리는 자신이 느끼는 모든 것들에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 두려움을 뚫고 쓴다. 그래서, 그의 글은 시끄럽다. 김유리는 정갈하고 매끄러운 길을 걸어서 결론을 내기보다는 조심스러움을 기준으로 여러 가지 상황과 선택지들을 톺아본다.
그는 글쓰기 모임에서도 늘 자신의 글이 ‘괜찮은지’ 물었다. 누군가의 글을 평가하는 듯한 말을 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나는 늘 김유리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괜찮은지 묻는 그 두려움을 조금은 알 것 같아서 그랬다. 그 응원은 나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김유리의 질문은 자신이 글을 못 썼을까 하는 걱정에서가 아니라, 이 글이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조심스러움에서 나왔다. 나는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을 안고 글을 써가는 동료가 있어서 기뻤다.
김유리의 ‘선’을 넘는 글쓰기
김유리의 글을 읽다가 또 한 가지를 깨달았는데, 그의 글을 읽는데 시간이 항상 오래 걸린다는 점이다. 그의 글에 있는 단어와 문장 속에서 느껴지는 그 두려움과 망설임, 몇 번이나 다시 쓰고 몇 번이나 다시 생각했을 그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의 조심스러움 그리고 단호하게 세상에 반하는 그 글들을 소중히 길게 느끼고 싶어서, 그의 글을 따라 써본 적도 종종 있었다. 김유리가 쓴 많은 글 중 가장 기억에 나는 것은 아래의 내용이다.
김유리는 한번은 물건을 샀다가 반품하려고 했는데, 가게 주인은 갖가지 이유를 대며 환불을 해주지 않았다. 결국 그의 아버지가 가게에 찾아가 환불을 받아냈다. 그 상황을 김유리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말을 ‘잘하지 못했고 어눌’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발달장애인이었으므로 그런 상황이 벌어진 거라고. 그는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를 고려한다. 혹시 상대방의 의도를 왜곡했을까 봐, 상황을 잘못 기억하고 있을까 봐, 자신이 느끼는 부당함이 잘못된 감정일까 봐.
누군가는 이것이 ‘자기검열’이라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자기검열은 자신을 탓하고 문제를 자신에게 찾는 것에서 멈추지만, 김유리는 그것을 벗어나 단호하게 결론짓는다. 그 사람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 사회가, 나를 보는 당신의 그 시선이 잘못된 것이라고. 그래서 김유리는 글을 쓸 때 어떤 느낌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글을 쓰면 해방감을 느껴요. 마음이 정리되는 것 같아요.”
김유리의 글은 언제나 ‘선’을 넘는다. 그 ‘선’이라는 것은 비장애인이 만들어 놓은 규범이거나 으레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일이므로, 선을 넘는 일은 항상 용기가 필요하다. 김유리는 그 선을 넘으며 고민하고 또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가 말을 덧붙인다.
“세상은 자꾸만 장애를 가진 저를 특별하게 보려고 해요. 그런 세상에 반항하기 위해 오늘도 글을 써요. 그런데 이렇게 내가 장애인으로 살면서 어떤 일들을 겪는 게 좋은 거 같기도 해요. 글을 쓸 수 있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들이 바로 김유리의 경험을 통해, 그의 시선에서 빚어낸 것들이니까.
앞으로 어떤 글들을 쓰고 싶은지 물었다. “치열한 글쓰기를 하고 싶어요. 발달장애인의 독립, 발달장애인을 부르는 호칭에 대해서도 쓰고 싶고.”
그런데, 김유리는 요새 혼란스러운 고민이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이야기와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가 다른 것 같다고. 비장애인들이 발달장애인에게 기대하는 이야기는 으레 학교에서 당했던 따돌림, 장애 때문에 얼마나 ‘불편한’ 삶을 살고 있는지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김유리는 장애는 ‘극복’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신이 왜 꼭 그런 글만 써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글쓰기 플랫폼인 ‘브런치’에 썼던 고민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며칠 전 불현듯 생각 하나가 뇌리를 훅 하고 스쳐 지나갔다. 꼭 처음부터 끝까지 장애 이야기로만 가득 채울 필요가 있을까? 글 속에 장애로 인한 사회 문제를 표출해 내지 않으면 사람들의 선입견을 깨뜨릴 수 없는 걸까? 글을 읽고 쓰는데 어려움을 겪는 내가 일기가 아닌 에세이를 쓰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이미 편견을 깨뜨리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여기까지 치닫자 장애를 쏙 빼놓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도 해보자고 마음 먹었다.> (카카오 브런치, “이다음에 쓸 글감은 또 어디서 찾지?”, 2021년 7월 23일 작성글 중에서)
그에게 ‘언제까지 글을 쓰고 싶냐’고 물었다.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평생이요. 글은 어디서나 쓸 수 있잖아요. 생활 속에 내가 쓸 수 있는 글쓰기가 전부 들어가 있으니까요.”
나는 김유리의 이야기를 쓰며, 조심스러움과 두려움에서 나온 그 시선들이 버무려진 다양한 글을 오래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김유리가 오래 쓸 수 있다면, 어쩐지 두려움이 많은 나도 글을 오래 쓸 수 있을 것 같다.
[필자 소개] 김혜미. 활동가는 아니지만 활동은 하고, 작가는 아니지만 책은 쓴 사람. 조작간첩이 되어버렸던 박순애와 가정폭력을 겪은 김혜미의 이야기를 엮은 책 <박순애, 기록, 집>(이매진, 2022)을 썼다. 자기를 설명할 명사가 무엇인지 아직 확신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명사에 관한 확신은 없는 대신, 자기를 빚어내는 데 큰일을 한 ‘고통’에 대한 관심은 깊다. 삶을 수놓는 사건보다, 사건을 살아내는 삶에 애정이 더 크다. 지금은 발달장애인 당사자 운동의 조력자로 살고 있다.
이 기사 좋아요 40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많이 본 기사
소수자 시선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