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페미니즘, 우리에겐 더 나은 선택지가 있다![백래시 시대, 다시 쓰는 페미니즘] 인공지능 시대의 페미니스트 윤리※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과 공격이 심각한 백래시 시대,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로 다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스무 편이 연재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새벽 디버깅과 함께하는 초조한 인공지능 연구자입니다
임금노동자가 된 지 일년을 갓 넘겼다. 나는 IT회사의 인공지능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한다. 조금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딥러닝 기반 생성 모델을 연구하고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가진 컴퓨터를 만드는 기술인데, 이를 실제 구현하기 위한 연구 분야의 하나가 기계 학습이며, 이 기계 학습 알고리즘 중에 인공 신경망을 기반으로 한 방법론을 통칭하여 딥러닝이라고 부른다. 요즘 많이 언급되는 대부분의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딥러닝 기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회사 다니는 게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아직 연차가 낮은 이유도 있겠으나, 회사 생활이 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못 견딜 정도로 힘들지는 않다. 나는 이전 기술들의 한계를 찾아내고, 그 점을 개선하여 더 나은 기술을 제안하는 이 일을 좋아한다. 각자가 생각하는 기술 개발의 방향에 대해서 동료들과 자존심 싸움 없이 자유롭게 토론하고, 논문에서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으면 자유롭게 묻고 답할 수 있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내가 속한 부서는 야근을 지양하고, 나이와 학벌을 묻지 않는다. 유연출퇴근제를 시행하고 있어서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운 편이다. 복장에 대한 규제가 없어서 트레이닝복을 입고 가도 상관이 없고, 여름에 반바지를 입고 오는 사람들도 많다. 안경 쓰고, 화장을 하지 않고 출근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 삶이 편안하고 행복하기만 하다면 당연히 거짓말이다. 이 직종은 과로를 하기 좋으며, 개발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반복해야 하는 프로그래밍의 특성에서 오는 심적 부담이 크다.
나의 업무는 상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보다는, 선행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도구로써 프로그래밍을 이용하는 연구개발이다. 그러다 보니 완전히 같은 직군은 아니어도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를 자주 참조한다. 소프트웨어 개발은 근본적으로 효율성을 추구하는 일이다. 좋은 프로그램은 목적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 외에도 실행 시간동안 적은 자원을 소모해야 하고, 다른 프로그래머가 코드를 빠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독성이 높으면서도 간결해야 하고, 차후 빠른 이식과 수정이 가능하도록 탄력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코드를 짜려면 아직 주니어인 나는 긴 시간을 투입할 수밖에 없다.
프로그래밍은 끝없는 시행착오의 과정인데, 내가 사용하는 프로그램의 코드는 짧게는 수백에서 길게는 수만 줄에 육박하다 보니 어디서 버그가 발생했는지 하나씩 추적해나가다 보면 의도치 않게 긴 시간 일하게 되는 경우가 잦다.
가끔 동료들과 하는 이야기 중에 ‘새벽 3시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실험을 한 번 돌리는 데에 짧게는 수 시간에서 길게는 수 일이 걸리는 딥러닝 연구 분야 특성상, 자는 시간 동안 실험이 돌아가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코드를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짜는 일은 드물고, 주로 코드의 일부를 수정하다 보니 일이 간단해 보여 “이거 하나만 고치면 프로그램이 돌아가겠지..”하면서 코드를 고치지만, 실행을 하면 그 다음 에러가 발생한다. 새벽 세 시 무렵에만 이상하게 프로그램이 문제 없이 실행되고, 다음날 출근해야 하니 피곤한 채로 업무를 마치게 된다는 이야기다.
프로그래밍 직군은 원격 프로그램을 이용한 재택근무가 용이하기 때문에, 퇴근하고 나서도 이렇게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제법 많다. 이 외에도 매일 쏟아지는 수십에서 수백 편의 프리프린트(pre-print) 논문들을 파악하고, 사이드프로젝트(side project)를 장려하고, 퇴근하고 나서도 프로그래밍 방법론이나 새로운 언어를 공부해야 하는 등, 자기계발을 끝없이 하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방법들이 하나의 문화로 정착된 곳이 개발자 커뮤니티이다.
이렇게 숨가쁘게 돌아가는 개발자 커뮤니티에 있다 보면, 나만 뒤쳐지는 것 같은 불안감을 필연적으로 느낀다. 한창 커리어를 만들어나가는 주니어 개발자의 경우가 특히 그러한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의 성과를 자랑스럽게 세상에 발표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일이 일반적인 이 커뮤니티에서, 나 또한 다른 ‘성공한’ 사람들처럼 열심히 일을 해서 더 많은 것을 성취해내고, 이걸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면 직장을 계속 다닐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일상은 누가 돌보지?
그러나, 이렇게 불안을 조장하는 현상은 개발직군만의 특징이 아니다. 불안을 유발하여 더 높은 생산성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개인의 시간을 통제하는 현상이 자본주의 기반의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타율적 효율성에 휩쓸려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많은 성취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주도성을 내가 운용하기 위해서 내 삶을 구성하는 여러 시간의 재배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꾸준히 지적해왔다. 그리고 시간의 재배치 작업을 나 혼자 진행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통제가 다중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깨닫고,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 페미니스트의 윤리이다.
장시간 몰입하여 일하는 것과 끝없는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시간을 내어 돌봄 노동으로 그 사람의 삶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돌봄 노동을 간단한 일이기에 숙련이 필요 없고 부차적인 일이라고 분류하는 것이 불평등의 시작이다. 돌봄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일이다.
매일 해야 하는 ‘식사’를 예로 들어보자. 식사는 단순히 남이 차려준 밥을 먹는 것이 아니다. 나는 뒤늦게 독립을 하면서 적당한 크기의 부엌과 커다란 냉장고를 구했고 대부분의 주방도구를 선물 받았다. 하지만, 식생활은 장비만 갖춰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 갖은 양념을 위한 재료들, 조미료들을 구매할 때에는 마냥 즐거웠다. 좋아하는 식재료를 구매하는 일도 처음에는 즐거웠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생활 중에 구매한 사실을 잊어버린 식재료는 검고 흐물흐물하게 변해서 괴상한 냄새를 뿜거나 표면에 알록달록한 색깔의 솜털같은 곰팡이가 표면에 자리잡았다. 큰 마음 먹고 비싼 돈 주고 산 과일에서 상상한 맛이 아니라 밍밍한 물맛이 나면 돈을 물에 빠뜨린 것마냥 속이 다 쓰렸다. 가장 맛도 좋고 가격도 좋은 식재료는 결국 제철 식재료였기 때문에, 일년동안 꾸준히 동네 슈퍼에 가면서 제철 식재료가 어떤 것인지 파악해나갔다.
이렇게 부지런히 다니며 파악하게 된 제철 식재료와 두부나 유부 같은 가공식품과의 조합을 잘 맞춰서 구매해야 하고, 상하기 전에 조리해야 하고, 보관 기간과 다른 식재료와의 조합을 생각해서 다양한 조리법을 활용할 줄 알아야 했다. 요리법을 찾기 쉬워진 세상이긴 하지만, 내 입맛에 맞고 내 몸이 거부하지 않는 조리법을 찾아나가야 했다. 식사를 스스로 준비하면서, 다른 사람의 몫까지 식사를 차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 경험과 성실함을 필요로 하는 일인지 깨달았다.
돌봄 노동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일이다. 단순히 이러한 노동을 거부하고 외주화하는 것이 여성을 해방시키는 작업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 돌봄의 과정에서 협동과 협력의 가치를 배울 수 있으며,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도 알게 된다.
나에게 페미니즘은 일과 돌봄을 양분할 것이 아니라, 일과 돌봄이 내 삶에서 항상 함께 자리잡아야 한다는 점을 끊임없이 일깨워준다. 페미니즘은 데버라 캐머런의 지적 대로 “남성의 필요를 중심으로 구성된 이 세계에서 무급 노동과 유급 노동의 요구를 어떻게 협상하는가”라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나 혼자 내릴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차이를 세세히 살펴가면서 ‘타인을 착취하지 않는 방식’을 참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내가 배운 페미니즘의 윤리다.
개인의 특출한 역량보다 챙기고 협력하는 가치가 중요해진 시대
사실 나는 하루 세 끼를 회사에서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출근을 하는 날 굳이 매번 식사를 준비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나처럼 지내는 건 아니니까, 만들어 본 반찬을 주변에 나누기로 했다. 건강한 음식이 삶에 어떤 기쁨을 갖다주는지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시작은 열무김치였다. 자주 보는 유튜브 채널에서 열무김치 만들기가 쉽다고 했고, 열무김치를 썰어서 된장과 참기름에 밥 비벼먹으면 맛있을 것 같아서 열무를 사왔다. 곱게 붉은 빛이 나는 양념은 어차피 믹서기가 갈아주는 것이라,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일은 열무를 다듬는 일이었다. 많은 나물들이 그렇듯 흙을 씻어내고 긁어내고 잔뿌리를 정리하고 잘 안씹힐 것 같은 겉껍데기를 벗기는 일들이 가장 품이 많이 든다. 소금에 절여 숨이 죽은 열무에 여러가지 맛을 겹겹이 쌓아 만든 양념을 버무리니 김치가 완성되었다.
평평한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네모난 키보드 자판을 하나 하나 도각도각 누르며 코드를 짜고, 실험 결과를 기다리는 일과는 다르게, 요리가 주는 즉각적인 만족감이 있었다. 식재료의 배합 비율과 배합 과정에 따라 미묘하게 맛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요리하는 일이 더 즐거워졌다. 지금까지 밥을 해 먹인 사람들이 빠지지 않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이 일을 지속하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고춧가루에 끓는 기름을 부었을 때 올라오는 갓 짜낸 고추기름의 알싸한 향, 설탕에 버무린 마늘에서 나는 찐득하고 매콤한 향, 기름에 오래 볶은 양파의 은은한 단맛은 집에서 직접 만들지 않고서는 얻기 어려운 것들이기 때문에 집에서 요리를 더 즐겨 하게 되었다.
큰 수술을 한 친구의 회복을 바라며 직접 재료를 사다가 손질해 사골곰탕을 끓인 날도 있었다. 화력이 낮아 가뜩이나 조리하려면 오래 걸리는 하이라이트가 5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꺼진다는 사실을 자고 일어나서야 알아서, 줄어들지 않은 국물을 허탈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이틀 내내 집안에 배어 버린 기름 냄새를 지우느라 겨울에도 온 집안 창문을 하루 종일 열어놔야 했다. 하지만,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는 친구를 먹여서 살릴 수 있었으니 다 괜찮았다.
과거의 개발자 문화는 특출한 역량을 가진 소수의 프로그래머가 뛰어난 프로그램을 만들어 조직을 이끌어나가는 방식으로 발전해나갔다. 그러나 전사회적으로 수많은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게 된 시대가 오고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이 소프트웨어들이 다양한 기능을 제공하는 것이 당연해졌고, 소프트웨어를 소수의 사람이 유지 보수하는 일은 어려워졌다. 여러 사람이 함께 업무를 맡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협동할 줄 아는 것의 가치가 점점 올라가고 있다. 지금 시대에는 돌봄을 통해 타인과 협력하는 법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페미니스트 윤리가 더욱 주목을 받는 것이 타당하다.
기계와 사람의 대결? 페미니즘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인공지능에 대하여 조금 더 이야기하고자 한다. 인공지능이 사람과 대결을 해서 이겼다는 기사가 나온다. 다른 기사는 청취 평가에 참여한 사람들의 다수가 인공지능 모델이 생성한 가짜 음성과 사람이 발화한 진짜 음성을 구분하지 못했다고 서술한다. 이러한 테스트를 인공지능의 성능측정 지표로 사용하는 것은 탁월한 수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자였던 앨런 튜링이 고안한 튜링 테스트 때문일 것이다.
튜링 테스트를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기계와 사람을 분리된 방에 두고 서로 텍스트로 대화를 나누게 하여, 사람이 이 기계를 사람이라고 판별하는지 관찰한다. 테스트에 참여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 상대방(기계)을 사람이라고 판별한다면, 그 기계는 지능이 있다고 봐야 한다고 튜링은 주장한다. 통상적인 논문들이라면 ‘지능' 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시작하겠지만, 튜링은 의도적으로 ‘지능'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않았다. 이 개념에 대해 정확하고 다른 사람들이 대체로 동의할만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튜링의 논문은 사람 같은 기계라면, 사람은 지능이 있으니 이 기계도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냐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의 필요조건이 ‘지능’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잘 안다.
여기서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왜 기계와 사람을 구분하는 일이 중요한가? 지금 필요한 것은 기계와 사람이 협력하여 새로운 번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닐까? 이미 많은 과학자들은 이 방향으로 연구를 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힘을, 페미니즘 인식론으로 사유하는 과정에서 기를 수 있었다. 나에게 페미니즘은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들 사이에 숨겨진 위계와, 그로 인한 불평등을 찾아낼 수 있게 해주는 사유의 원천이다. 그러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끈질기게 토론하고 협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이러한 과정이 ‘덜 과로하고 덜 착취하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것을 주변의 페미니스트들의 말과 행동들로부터 배웠다. 타인을 고통 속에서 외롭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다정한 약속, 누군가가 겪는 억압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용기, 새로운 미래를 다함께 이 곳에 먼저 가져와보자는 호쾌한 제안을 건네는 사람들이 내가 만난 페미니스트들이다.
[필자 소개] 강현주. 수도권 소재 IT회사의 인공지능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10여년동안 성소수자의 자긍심 고취와 문화 향유의 장을 여는 서울퀴어문화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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