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개] 여성들의 말과 글이 세상에 더 많이 퍼지고 새겨져야 한다고 믿으며, 서점에서 퍼뜨리고 싶은 여자들의 책을 고른다. ‘살롱드마고’의 신간 책장에서 마음에 새겨지는 책을 한 권씩 밑줄 그으며 꼭꼭 씹어 독자들과 맛있게 나누고자 한다.
그림자의 언어, 최승자의 시
“말하자면 나는 애초에 내 인생을 눈치챘다. 그래서 사람들이 희망을 떠들어댈 때에도 나는 믿지 않았다.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언제나 확실한 절망을 택했다.”(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22쪽)
볕도 잘 들지 않고 먼지가 쌓여 퀴퀴한 시집 코너에서 최승자라는 이름을 처음 보았다. 우연히 펼친 그의 시는 첫 장 첫 구절을 읽자마자 심장이 쿵 내려앉는 동시에 뇌에 번개가 치는 듯했다. 윤색하지 않은 어둠이 거칠고 낯선 언어로 내가 꽁꽁 숨겨두었던 그림자를, 차마 말하지 못했던 불경스러운 감정과 욕망을, 날 것 그대로 비춰주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최승자 시집 『이 시대의 사랑』에 수록된 첫 시)을 읽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그 다음 장에선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 온다. 매독 같은 가을”(개 같은 가을이)로 이어졌다. 아 짜릿하여라! 그의 말은 위반적이어서 강렬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게다가 일찍이 나 또한 세상에 대한 환멸, 죽음에의 충동을 수없이 느꼈기에 최승자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저히.
그래서 최승자의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가 새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팬심’을 담아 우리 책방에 바로 입고했다. 손님이 이 책을 골라 사가면, 책방을 나가는 등에 대고 ‘당신도 그 황홀한 어둠을 아는군요’ 속으로 몰래 말을 걸었다.
“때로는, 산다는 게 지저분한 오물들을 입안에 잔뜩 처넣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58쪽) “죽음은 언제나 유혹처럼 감미롭게 찾아드는 ‘다른 손길’이었다.”(52쪽) “그 모든 죽음의 의식은 어디로부터 왔을까. 나의 경우, 그것들은 공포로부터 왔던 것 같아. 세계에 대한 공포로부터.”(160쪽)
대학 도서관에서 한국의 여성 시인들과 만났던 시간
얼마 전 고등학생 대상 페미니즘 수업을 하며, 신여성 작가들의 역사와 삶을 다루었다. 학생들은 이광수, 김동인은 알아도 김명순, 나혜석은 처음 들어보았다고 했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에게 소감을 받았는데 대부분 그 여성 작가들의 기구한 삶과 가부장제 사회에서 받은 혹독한 피해에 관한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들이 얼마나 천재적이었는지, 한국 근대 문학과 예술에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남기고 크게 기여했는지에 대한 내용은 인상에 덜 남은 것 같았다. 나 역시 근대와 현대의 여성 시인들의 삶을 처음 접했을 때 ‘정신병자’, ‘행려병자’ 같은 명칭이 그들의 대표적 소개 문구에 들어가 있는 걸 무심히 보곤 했다. 뛰어난 여성들의 몰락이 마치 자연스러운 전개인 것처럼.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선구자의 길을 걷는 여성 작가와 예술가들은 그들의 사적인 삶이 작품 활동보다 한층 더 과하게 부각된다. 여성의 삶이 불행하고 불운하게 여겨질수록 작품보다 사건이 주요 서사의 자리를 차지하며 ‘명성’은 가십거리로 전락한다. 그것은 외국의 여성 작가들도 마찬가지여서 독보적인 예술세계와 대작을 남긴 실비아 플라스나 에밀리 디킨슨 같은 시인에 대해서도 늘 우울하고 고립된 이미지만 반복되며 주목받곤 한다. 그것은 같은 여성들로 하여금 그들과 같은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로 작동하거나, 똑똑한 여자는 사랑받지 못하고 ‘박복’하다는 인식을 부추겨 예리한 지성을 꿈꾸는 여성들을 위축시킨다.
“미국에서 얻었던 굉장한 체험은 “나는 변할 수 있는 인간이다”라는 것이었어. (중략) 내가 몸담는 사회가 달라지면 나도 달라질 수 있다고, 한국에서 내가 달라질 수 없는 고질적인 인간이라고 느꼈던 것은 그 사회가 달라질 수 없다는 절망감의 내적 투영이었다고 결론지었지.”(164~165쪽)
대학 도서관에서 만난 여성 시인들의 작품은 남성중심 문학에 갇힌 ‘문학소녀’였던 내게 완전히 새롭고 찬란한 세상을 열어주었다. 서가를 따라 걷다 보면 최승자 시집 근처에 고정희, 김혜순, 김승희, 신현림, 나희덕, 최영미, 김선우가 있었다. 늘 끝까지 쓰지 못하고 다음 학기로 넘어가는 강의노트의 뒤편에는 그들의 시를 필사한 페이지가 점점 늘어났다.
돌아보면 당시 처음 페미니즘 수업을 듣고 여성주의 활동을 시작한 내가 여성 시인들과 도서관에서 내밀하게 만났던 시간들은 삶의 동시성을 보여주는 장면 같다. ‘여성으로서’ 어떤 찝찝함이나 혼란으로 남아 있던 감정과 문제들이 그들의 시를 만나면 더욱 명료히 자극되거나 응어리진 게 풀리곤 했다.
깊은 바다에 잠겨 있던 산호나 진주를 하나씩 꺼내오듯 고요한 서가에서 여성 시인들의 작품을 소중히 발굴하며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는 왜 이런 시를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아쉬웠다. 김소월, 윤동주도 좋고 한때 기형도, 안도현의 시도 즐겨 읽었지만 내 오장육부의 뿌리와 희미하게 이어진 영혼들, 그 분방한 혀가 들려준 말을 일찍 듣고 배웠더라면- 나는 더 넓은 꿈을 꾸고 더 멀리 항해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지금의 공교육은 좀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최근 입시교육을 하는 남성 국어강사가 김승희 시인의 작품을 분석하며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애써 강조하는 학습자료를 본 적이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내 책장에 꽂혀 있던, 김승희 시인이 모은 국내외 페미니스트 여성시 앤솔로지 『남자들은 모른다-여성·여성성·여성문학』(마음산책, 2001)를 떠올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우리 여자들은 외부적, 사회적 조건들의 개선을 위해서 싸워야 함은 물론 자기 내부의 적과 더 크게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더 큰 싸움의 출발은 분명 여자 자신의 의식적 자각으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한다. 이젠 여자도 인간이라는 자각을 갖자.”(147~148쪽)
“죽음은 존재 양식의 변화일 뿐”…사막에 닿은 물처럼
1989년 처음 출간되었다 2021년 개정증보판으로 다시 나온 최승자의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는 작가 초기 시절인 1970년대 중반부터 2013년까지 사이의 띄엄띄엄한 기록이 담겨 있다. 시인의 통찰과 사유가 담긴 일기부터 궁시렁대는 혼잣말 같은 잡설, 세계의 문학과 철학을 넘나드는 논평까지 다양한 글이 섞였으나 그 중심엔 삶과 죽음이 내내 무겁게 관통하며 엎치락뒤치락한다. 그는 마치 죽음에의 어쩔 수 없는 끌림과 삶에 대한 치열한 의지 모두를 저울 양쪽에 올려놓고 일생을 홀로 분투해온 것만 같다. 산문집은 그 해답을 찾고자 자신만의 연구와 방랑을 거친 시인이 툭 던져놓은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왜 살아야 하나, 는 나의 어린 시절부터 평생을 따라다닌 오랜 질문이기도 하여 어쩌면 최승자의 시가 가슴에 더 깊이 박혔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나는 삶의 이유가 아니라 사실은 내가 살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는 데 더 몰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나를 죽이려는 이유를 찾기 위해 20대 후반 처음 심리상담을 찾았다. 그리고 (다행히)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최승자는 어머니의 죽음을 마주하며 자신이 “삶의 편에서 죽음을 짝사랑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53쪽)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야겠다는 본능을 되찾은 것 같다”고 소회한다. 그리고 자유롭게 날아다니지만 쉼 없이 노동하는 새들을 보며 “쉬운 삶이란 없다. 어떤 존재든 혼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158쪽)이라 말한다.
얼마 전 백상예술대상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조현철의 수상소감이 참 인상 깊었다. 그는 병으로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너무 무서워하지 말라며 “죽음이라는 게… 그냥 단순히 존재 양식의 변화인 거잖아”라고 담담히 말했다. 그리고 많은, 슬픈 죽음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고, 기억으로 그들을 되살려냈다.
최승자의 책에 사막에 닿은 물의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이 사라질 것을 두려워한 물에게 사막은 공기로 변해 하늘로 올라가라고 하지만, 물은 육체(형태)의 아이덴티티밖에 모르기에 공기로의 변화는 곧 자신의 죽음이라 믿는다. 그때 불어온 바람은 물에게 속삭였다. “우리와 함께하라. 우리는 수도 없이 이 일을 해왔다. 우리가 공기가 된 너를 실어날라 그 산으로 데려다주마. 그러면 너는 거기서부터 다시 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170쪽) 내가 물이라면, 무엇을 선택했을까?
[필자 소개] 달리. 전북 남원에 있는 지역서점이자 페미니즘 문화공간 ‘살롱드마고’의 공동운영자이며 에세이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2021)의 작가이다. 완간된 지역독립잡지 『지글스』를 비롯해 여성들과 함께 글 쓰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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