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페미니즘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제주 달리도서관 이야기

수달 | 기사입력 2022/05/30 [13:34]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페미니즘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제주 달리도서관 이야기

수달 | 입력 : 2022/05/30 [13:34]

※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과 공격이 심각한 백래시 시대,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로 다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스무 편이 연재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 제주시에 있는 달리도서관 내부 모습. 달리는 ‘달빛 아래 책 읽는 소리’라는 뜻이다.   ©달리도서관

 

나의 의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본명 대신 ‘수달’이라는 활동명을 (스스로 지어) 붙이고, ‘달리지기’로 지낸 지 5년 차. 달리도서관을 찾는 분들에게 제일 많이 들은 말은 단연 “수달이라는 별명은 무슨 …?”이다. 말줄임표 안에는 아마도 ‘그렇게 닮지도 않았는데 왜?’라는 말이 담겨있을 테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수달’(천연기념물이기도 한 야생동물)을 그렇게 많은 분들이 귀여워하고 애정하고 있는 줄 몰랐다.

 

너무나 싱거운 이유라 듣고 나면 더 허탈해지는 그런 이름 ‘수달’은 ‘수요일의 달리지기’의 줄임말일 뿐이다. (심지어 2022년 5월 기준, 나는 토요지기다.) 수요지기, 토요지기라는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달리도서관은 요일마다 담당하는 지기가 다르다. 일주일에 5일을 열어두는데, 총 다섯 명의 지기가 하루씩 맡아 공간을 지키고 방문객을 맞이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형식이다. 월리/토토/목사/마음/수달 이렇게 다섯 명의 지기가 따로 또 같이 운영하고 지켜가는 곳, 이곳이 달리라는 공간이다. (‘목사’는 나보다도 더 많은 질문을 받곤 한단다. 당연히 그 ‘목사’는 아니다.)

 

제주 달리도서관의 ‘재칠의삼’ 운영 방식

 

달리가 이런 식의 운영을 해온 것은 사실 오래되진 않았다. 2009년 개관을 하여 한동안은 상근하는 지기들이 여럿 있었다 한다. 시간이 되는 사람이 요일이나 시간의 구별 없이 달리를 지켰고, 그 덕에 늘 열려 있는 달리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기가 되기 이전에도 달리 프로그램을 수시로 찾았던 나의 기억으로는, 달리는 늘 ON이었고 溫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게 열려 있는 공간을 유지하는 데 드는 수고로움에 대해서는 그때는 알 수 없었다. 어느 해, 개관 멤버였던 몇몇이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그 일에 집중을 하게 되자, 그만큼의 공백을 남아있는 사람이 짊어지게 되는 시기가 오게 됐다.

 

그 시기를 ‘공간 슬럼프’라고 표현한 토토는 “정말이지 그때는 너무 힘들어서 문을 닫고 싶었다.”고 말한다. 근데 닫지 않은 이유는 “(공간을 내어준 선배들에게) 미안해서도 있지만 (내가) 너무 아쉬워서였다”고. 좋아하는 일, 재미있는 일을 하려고 만든 공간에서 너무 큰 목적의식이나 대의명분을 따르려고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뒤로, 최대한 가벼워지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 노력 중 하나가 함께 가벼워질 동료(지기)들을 모으는 일이었다. 그렇게 몇 명의 달리지기들이 모여 2018년에 ‘달리 시즌2’가 시작이 되고 지금의 요일지기로 정착이 된 것이다.

 

▲ 2018년 7월 11일, 제주여성가족연구원과 공동 주최한 중 손희정 문화평론가의 “페미니즘 리부트: 신자유주의, 한국영화, 젠더” 강의가 끝난 후.(왼쪽 위) 2019년 10월 31일, 달리도서관 개관 10주년을 맞아 <2019이어달리기>의 주자로 나선 토토 관장과 참여자들의 기념 사진.(오른쪽 아래) 앞으로의 10년이 어떠할지가 더 궁금하다는 이야기에 다시금 힘을 얻은 날이기도 하다. ©달리도서관

 

시즌2의 지기들은 대부분 (이전의) 달리 프로그램 참여자들이었다. 달리를 누려본 적 있는 사람들이 모여 앞으로 누릴 프로그램들에 대해 논의를 하는 것은 (조금 어렵고) 대체로 신나는 일이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프로그램으로 만들자’는 모토 아래, 각자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하나 꺼내놓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필사를 해보겠다 하고, 누구는 타로카드를 배워보겠다 하고, 낭독모임을 하겠다, 드로잉을 배웠으면 좋겠다, 북클럽을 하겠다 등등. ‘도서관에서 할 수 있는 101가지~’ 프로그램을 만들 수도 있겠다 싶게 쏟아져 나왔다.

 

그 중 많은 것들을 해보았고, 지금까지 꾸준히 하는 중이다. 어느 프로그램을 하든 잊지 않으려 하는 것은 오직 ‘좋아하는 일을 (이왕이면) 재미있게 하자’뿐이다. 운칠기삼(運七技三, 운이 70% 재능이 30%)이라는 말도 있다지만, 달리는 주로 재칠의삼(재미 70% 의미 30%)의 자세로 임한다고 할까.

 

코로나19로 닥친 위기에도 이야기는 이어졌다

 

새로운 시작과 모험을 사부작사부작 진행하면서 달리 시즌2의 합이 좀 맞아간다고 여겨질 즈음, 준비 없이 닥쳐온 코로나19로 인해 다시 약간의 침체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필사 모임과 낭독 모임, 글쓰기 모임과 타로 모임, 청/중/장년 여성들이 모여 세대를 잇는 기록을 하는 모임 등 여러 소모임들이 하루아침에 멈추었다. 누구도 모일 수가 없게 되자, 달리도 그대로 멈춘 느낌이었다.

 

달리가 사람들에게 공간을 내어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 안을 채우고 있던 사람들이 공간을 유지하고 존재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 자각에서 나온 기획이 <2020이어달리기 -耳共異空, 공간을 듣다>이다. ‘유의미한 공간을 만들고 지켜내는 사람들에게서 듣는 공간과 시간과 인간의 이야기’라는 컨셉으로, 여러 다양한 공간의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 제주의 여성주의 공간 달리도서관은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청해 들으며 공간과 시간을 채워갔다. ©달리도서관

 

서울 마포에 있는 퀴어페미니스트 책방 ‘꼴’의 이야기에선 달리도서관과 닮은 듯 다른 책방지기 “꼴키퍼”들의 애환을 들으며 많이 웃었다. 지방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보슈’(대전 페미니스트 문화기획자 그룹)의 이야기를 들을 땐, 제주 페미니스트분들의 격공이 있어 더욱 흥겨운 자리였다. ‘다른 가족구성권으로 살아가는 공간 이야기’라는 주제로 찾아준 홍승은/우주/지민 님과 함께 한 자리에서는 참여자분들의 끊임 없는 질문과 다정한 소감들이 넘쳐나 겨우 마쳤던 기억이 있다.

 

추적단불꽃과의 만남

 

시작은 소박했으나 끝은 여러 사람의 연대로 창대해졌던 경험도 있다. 달리에는 매달 한 번씩 진행하는 북클럽이 있는데, ‘이 달의 책’을 읽고 만나 책 이야기 나누는 <부끄럼북클럽>이 그것이다. 2020년 11월, 북클럽에서 만날 책이 추적단불꽃 르포 에세이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라는 공지가 나가고 며칠 뒤, 해당 출판사(이봄)에서 연락이 왔다. 저자와 온라인 북토크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가벼운 제안이었고, 우리는 지체 없이 바로 수락했다.

 

더하여 달리에서 역제안을 한 것이, 이왕이면 북토크를 오프라인(제주도 대면)으로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 코로나 상황도 악화되었고, 추적단불꽃 멤버 두 분 모두 신원을 밝히지 않고 취재하는 것을 잘 알기에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소 무리한 제안을 한 이유는, 디지털 성범죄 실태의 심각성을 알리고 싶다 + 제주도 내의 우리(편)들을 서로 확인하고(받고) 싶어서였다.

 

결국 추적단불꽃의 제주도 북토크가 확정이 되었고, 판이 커진 만큼 준비의 판도 커졌다. 달리와 함께 제주 청년,청소년 페미니즘 책모임 FAGE가 공동으로 주최를 하게 되었다.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자체적으로 가드를 배치하고 대처법을 공유하는 준비를 해두었다.

 

▲ 2020년 12월 5일, 추적단불꽃(현 불꽃)과 함께하는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북토크를 달리도서관과 제주 청년,청소년 페미니즘 책모임 FAGE가 연대하여 진행했다.  ©달리도서관

 

어쩌면 <부끄럼북클럽>에서 몇몇의 사람과 책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서 그쳤을 수도 있었다.(물론 그 자체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이 달의 책’ 게시글을 보고 연락해준 출판사, 시간과 마음을 내어준 작가들, 기꺼이 함께 자리를 만들어 준 연대단체, 드러나지 않게 안전한 공간을 제공해준 단체 등 각기 다른 몫들이 합쳐져 만들어낸 결과를 생각하면, 어느 하나 놀라지 않을 것이 없다. 모두에게(달리에게도) 자주 고맙다. 이런 놀랄 합작들이 종종 있어 즐겁다.

 

안전한 공간, 존중의 감각

 

달리지기로 결합한 이후에도 나는 문득문득 달리 방문객이었을 때를 생각한다. 대부분 프로그램만 참여하고 끝나면 후다닥 사라지는 무척 샤이한 참여자였지만, 그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달리 표현은 안 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즐거워하고 신이 났으며 입맛이 쓰지 않았다. 무섭지 않고 불편하지 않았으며 찜찜한 기분도 없었다. 그러니 나는 달리 시즌1의 최대의 수혜자였던 셈이다. (그래서 뭐 빚 갚는 마음으로 시즌2 달리지기를 하고 있냐 하면 그건 아니다.)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내게 그러한 감각이 생긴 것처럼, 누구라도 안전한 공간에서 받는 감각을 경험하기를 바랄 뿐이다. 누구이기 때문에, 무엇을 했기 때문에 대접 받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만으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받아봐야 하고, 느껴봐야 하고, 거듭거듭 반복되어 익숙해져야 한다. 그제서야 다른 이에게 그 존중의 감각을 줄 수 있다.

 

본 적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상상의 영역이지만, 이미 한 번 본 것이나 겪었던 것을 재연해내는 것은 기술의 영역이라 한결 쉬워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열과 성을 다해 기술적으로 반복한다.

 

“프로그램 진행시 사진을 찍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기록용이기도 하지만 달리도서관 SNS 등에 홍보용으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촬영을 원치 않으시면 손가락으로 X자를 표시해주시고, ZOOM에 계신 분이라면 채팅창에 남겨주세요. 원치 않는 분들은 가급적 걸리지 않게 할 것이고, 만일 찍혔더라도 그 사진은 절대로 올리지 않겠습니다.”

 

[필자 소개] 수달. 제주시 달리도서관(@dalli_jeju) 토요지기.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것이다.’라는 말을 추앙하여 오늘도 열심히 사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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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라 2022/06/04 [10:04] 수정 | 삭제
  • 거기 달리가 있네. 공간을 채워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생명이 유지되는 곳.. 코로나로 문 닫고 있는 곳들도 많은데 이런 소식이라니, 무척 반갑네요.
  • 2022/05/31 [20:04] 수정 | 삭제
  • 수달님 사랑해요…
  • 반갑다 2022/05/31 [19:56] 수정 | 삭제
  • 달리도서관 소식 오랜만에 듣네요. 항상 문이 열려있는 공간이 그냥 있는 게 아니라는 말 너무 공감 가요.
  • 쯔니 2022/05/30 [18:20] 수정 | 삭제
  • 수달이라니 너무 귀여운 고 아닙니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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