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던 나는 대학원에서 함께 여성주의와 생태주의를 공부했던 선배가 갑작스럽게 귀농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 또한 막연하게 귀농을 꿈꾸고 있었기에 선배가 내려간 강원도 홍천에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찾아가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주로 정신노동에 시달리던 터라 단 며칠이라도 땅에 발을 붙이고 몸을 놀리며 육체노동을 하면 뭔가 균형이 맞춰지는 듯, 빈 곳이 채워지는 듯했다.
그곳에서 선배처럼 농사를 배워 농촌에 정착하고자 내려온 미연 씨(46세)를 만났다. 남편과 함께 3년 정도 도시농업을 경험하고 여기서 본격적인 귀농 준비를 하고 있었다. 1년에 서너 번 정도 내려가 서툰 일손을 보태던 내 눈에 미연 씨는 농사일도 능숙하고 살림도 척척이었다. 밝고 씩씩하고 주변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사람이라, 갈 때마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해가 거듭되면서 또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매화 아주머니(72세). 그 마을 어르신으로, 미연 씨와 마찬가지로 유기농 농사를 지으셨는데, 두 사람이 유난히 스스럼없이 지내는 모습이 조금은 의아했다. 귀농한 사람들이 지역민과 갈등을 빚어 고립되거나 결국 떠나는 사례가 많다는 얘기를 심심찮게 들어왔기 때문이리라. 두 사람은 어떻게 그런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 나이 차도 크게 나고, 살아온 환경도 가치관도 주어진 여건도 다를 터인데. 그리고 특히 고되다는 고랭지 농업 지역에서 서로 다른 여성 농민으로서 각자 어떤 노동을 하고 어떤 삶을 꾸리고 있을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젊으니까 힘들어도 자고 일어나면 거뜬했지
춘천이 고향인 매화 아주머니는 1970년 당시 사촌 시누이의 중신으로 남편을 만나 이곳 홍천 내면으로 왔다. 그때 나이 스물이었는데, 시부모와 십대인 시동생 셋, 운전 일을 해서 거의 밖으로 돌아다니는 남편과 함께 농촌에서의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그때는 가진 땅도 얼마 안 되고 워낙에 산골에다 추운 곳이라 농사라고 해봐야 겨우 가족이 먹고살 만큼 짓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남편은 운전 일로 벌이를 하고 나머지 가족들이 농사를 맡았다. 매화 아주머니는 새댁이라 집안일을 도맡았다.
“그때는 농사는 별로 안 하고 밥만 해줬어요, 딸내미 키우면서. 70년대만 해도 경제가 어렵잖아요. 작업복 같은 것도 지금은 5천 원짜리, 만 원짜리도 좀 좋아요? 그때는 바지랑 작업복이 다 떨어져서 밥만 먹으면 나는 미싱을 돌려댔어. 밥만 먹고 설거지해놓고는 계속 바지를 짓는 거야. 작업복 해진 거 박고. 빨래하고 밥 해 먹고. 그냥 그렇게 하다가, 시집살이 살림 몇 년 하다가 막내아들 가져서부터 내가 (농사)일을 하기 시작했을걸?”
논농사는 거의 안 되고 감자 옥수수만 심으니까 당시 내면 사람들을 ‘감자바우’라 부를 정도였다. 쌀이 워낙 귀해서 옥수수로 쌀을 삼아 감자와 함께 밥을 지어 먹었다. 옥수수쌀로 밥을 짓기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감자를 까서 밑에 놓고 옥수수쌀을 불려서 위에 놓으면 이놈의 것이 눌어요, 자꾸만. 그래서 첫 번에 우루루 끓을 때는 불을 세게 때다가 앞으로 끌어내야 돼. 뜸이 시름 들어야 밥도 딱딱하지 않고 물렁하게 되고. 불이 확 달아오르면 단내가 나면서 누룽지만 눋고. 그래서 자잘한 불로 뜸을 어지간히 들인 다음 감자랑 옥수수랑 짓찧고. 어쩌다 돈이 좀 생기면 쌀을 사와. 어른들 있는 집은 밥을 삼팔선처럼 (나눠서) 두 개를 해. 이쪽으로는 쌀을 안치고 이쪽으로는 옥수수쌀을 안쳐서 어른들은 좀 섞어서 주고 식구들은 옥수수밥을 더 먹고.”
시어머니는 새벽 4시면 일어나 가마솥에 엿을 고았다. 며느리 된 입장에서 ‘잠만 쿨쿨’ 자고 있을 수 없어 ‘억지로 억지로’ 일어나 일을 도왔다. 그러면 시어머니가 “야, 이제 혼났으니까 넌 들어가 더 자라” 그러고는 자신은 불을 때서 소여물을 끓이고 솥을 싹 씻어서는 마저 엿을 고았다. 그 엿을 장이나 동네를 돌아다니며 팔고, 또 감도 떼다 팔고, 사탕가루도 떼다 팔아 조금이라도 수입이 생기면 애들 옷도 사주고 며느리 스웨터도 사주었다. 그런 시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매화 아주머니도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나서부터 조금씩 바깥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아줌마들이 새댁 나무 심으러 갈라우? 그러더라고. 도시락만 싸 가지고 나오래, 괭이 하나하고. 그래서 따라갔더니, 쪼그만 묘목을 다발로 가져와서 허리에 차고 산으로 쭉 줄을 맞춰 올라가면서 심는 거야. 올라가다 땅을 파고 이만큼 심고 발로 꾹꾹 밟아놓고 또 올라가서 심고. 그렇게 며칠을 다녔더니 돈을 주더라고. 그래서 이걸로 뭘 해야 되나. 그러다 내가 전기밥통을 샀어. 그전엔 맨날 밥 해가지고 사기 밥그릇에 덮개를 덮어서 불 때는 데다가 모셔놔. 그리고 어른들이나 아저씨(남편) 일 갔다 오면 꺼내 드리고. 그렇게 살았다니까.”
내면이 조금씩 개간되고 밭이 많아지면서 배추나 무 농사를 크게 짓는 농가가 생겨났다. 그러면서 김을 매거나 작물을 심거나 수확하는 작업을 주로 나가게 되었다. 그렇게 일당을 벌고, 집집마다 서로 돌아가면서 품앗이로 마을 농사를 짓기도 했다. 그러다 남편과 함께 본격적인 농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당시 유기농업 생산자 조합이었던 ‘북한강 유기농’과 인연을 맺으면서였다. 그렇게 처음 농사를 유기농으로 시작했다. 농사일이라는 게 전적으로 육체노동에 의지하기 때문에 힘들었지만, 그래도 ‘젊으니까 자고 일어나면 개운하고 거뜬’했다.
“아주 막 죽겠어도 자고 일어나면 또 든든하고. 애들도 많이 부려먹었어요, 옛날엔. 그래서 우리 셋째 딸이 군인 갔는데, 여자가 무슨 군인을 가냐, 감당할 수 있냐 그러니까 얘 하는 소리가 그래. 엄마, 농약 줄 당기는 것보다는 훈련받는 게 낫겠지. 그래도 그땐 젊으니까, 이걸 해서 팔면 돈이 되고 애들한테랑 혜택이 된다 생각하니까 재밌더라고. 근데 이제는 나이를 먹으니까 힘들지.”
왜 고생하러 제 발로 들어왔나 안타깝더라고
그렇게 농촌으로 시집와서 어쩌다 보니 농부의 삶을 꾸리게 된 입장에서 미연 씨처럼 제 발로 농사를, 그것도 유기농 농사를 짓겠다고 찾아 들어온 젊은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아주 아유, 저거는 왜 고생을 하러 들어왔나 안타깝더라고. 그래서 속으론 그랬어. 나 같은 사람은 젊어 못 배워서, 무식해서 이런 데 와서 고생하지, 저건 배웠다는 게 왜 고생을 하려고 들어왔나. 근데 자꾸 얘기를 해보면 아주 좋대, 편안하고 좋다는구먼. 그래서 뭐 본인이 좋아하면 (됐지).”
매화 아주머니는 미연 씨를 볼 때마다 “몸 아껴라, 너 그러다 나처럼 된다” 그러신다. 자신도 젊을 땐 무슨 일이든 달려들어서 하고 몸 아픈 건 생각도 안 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좀 쉬면서 할 걸 후회가 된다.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으니까. 골병들면 고치기도 힘드니까.
그렇다면 올해로 귀농한 지 딱 10년이 되는 미연 씨는 왜 농촌으로 내려와 살고 싶었을까.
“사회복지 일을 꽤 오래 했어요. 워낙 사람들 좋아해서 사회복지가 나한테 되게 잘 맞는 일이라 생각하고 나름 열심히 했는데, 어느 순간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회복지사라는 타이틀이 내 권력이 되는 걸 느꼈어요. 그게 너무 싫었어요. 그때 한창 생태적인 삶에 대해서 책도 많이 읽고 관심도 많았고. 사회복지가 아니라 생태적인 삶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연두농장(도시농업을 실천하는 자활공동체)에 들어갔고, 거기서 농사를 하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그러면서 시골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하지만 막상 귀농해 정착하면서 마주친 현실은 예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특히 이곳 내면은 농사일이 힘든 지역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밭작물을 이모작으로 재배하니 두 배로 노동을 해야 한다. 게다가 유기농을 짓다 보니 힘쓸 일도 많고 대부분 ‘몸’으로 때워야 한다.
“그래서 우리같이 귀농하는 사람들은 여기 잘 안 와요. 사실 나도 귀농을 꿈꿀 때는 내 집 하나 있고 나 먹을 것만 하고, 과하게 농사 안 짓고 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여길 딱 왔는데, 어휴, 앞으로 내 모습이 보이는 거야. 주구장창 일만 하고. 또 한편으로 우리는 농사로만 먹고살 생각으로 왔는데, 그러려면 일을 해서 (농산물을) 팔아야 하잖아요. 어쨌든 출하를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아, 내가 되게 환상을 가지고 왔구나 했지. 어쨌든 농사 외에 다른 거 하지 않고 농촌에서 살려면 이렇게 살 수밖에 없구나라는 걸 절실히 느끼면서 10년 동안 시행착오를 겪어온 것 같아요.”
그런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되었던 분이 바로 매화 아주머니였다. 농사지으며 살아보겠다고 들어오는 젊은 도시 사람들을 경계하기보다 먼저 손을 내밀고 다독여주는 분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딸도 같고 아들도 같고. 저렇게 열심히 살려 하는데 같이 어우러져야지. 또 모르는 거 가르쳐주면서 조금씩 보태주고, 말이라도. 그렇게 살게 해줘야 마음이라도 정착하려고 노력하지. 어떤 덴 사람들이 자꾸 똥구녁 쑤석거려가지고 내쫓으려 그러잖아.”
그런 아주머니의 마음이 이곳에 마음을 붙이고 ‘기어코’ 정착하겠다는 미연 씨의 다짐에 힘을 실어주었다.
“저희는 되게 운이 좋았던 게, 귀농인들이 지역에 가면 약간 왕따 같은 것도 당하고 텃세도 많이 부리고,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나는 좀 다르다고 생각해서 잘 못 어울리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 와서는 많이 도와주셨거든요. 그런 것이 귀농하는 데 진짜 큰 도움이 되었어요. 어쨌든 내가 귀농을 결심하고 들어왔는데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도 자존심 상하고. 그래서 죽어라 더 열심히 하겠다는 오기도 생기고.”
도시처럼 스트레스 받는 거는 전혀 없어요
유기농이라 제초제를 쓸 수 없다 보니 눈만 뜨면 밭에 나가 풀을 잡는 게 일이다. 잠시 때를 놓치기라도 하면 풀이 작물을 뒤덮어 거의 ‘수풀을 헤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말 그대로 ‘풀매다 1년 농사 끝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거의 40년 가까이 농사일을 해온 매화 아주머니도 마찬가지다.
“깨끗이 (풀을) 매고는 아, 이제 깨끗해서 좋구나. 그러고 일주일만 되면 벌써 밭에 풀이 곡식보다 더 어우러지니, 그걸 잡아야 곡식도 크죠. 어떨 땐 앉아서 김매다가 그런다니까. 아니 돈은 평생 못 벌었으니까 돈의 원수는 못 갚고 죽는데, 이놈의 풀 원수는 갚고 죽으려는데 이걸 못! 잡겠다고. 죽자고 잡아 뜯어도 원수를 못 갚고 죽겠다고.”
부부 노동력만으로 이모작 기준 거의 7천 평에 달하는 밭농사를 짓는 미연 씨가 처음 밭일을 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쪼그려 앉는 것’이었다. 작물을 심으려도, 풀을 매려도, 고추를 따려도 일단 쪼그려야 했다. 익숙지 않은 자세에 일주일을 앓아눕기도 했다. 그래도 도시 노동과 달리 농사 노동에서 얻는 깨달음이 있다. 온전히 육체노동 같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눈 뜨면 밭에 나가서 작물 키우고, 계속 관찰해서 뭐가 잘못되면 고쳐주고, 유기농 제재 쳐주고, 수확하고, 진짜 아침부터 끝까지 몸 쓰는 일이잖아요. 근데 난 솔직히 농사지으면서 머리가 더 좋아진 것 같아. 왜냐면 이 과정들을 계속 관찰하고 연결하고 예민하게 봐야 하니까 단절 없이 사고하게 되더라고요. 몸 쓰고 머리 안 쓴다지만 지속적으로 머리를 쓰고, 그게 내 삶하고 직결되니까 더 폭넓은 사고를 하게 되는 것도 있어요. 그래서 몸도 힘들지만 정신적으로 신경 써야 하는 것도 많은 게 사실이에요. 근데 그게 도시와는 좀 달라. 스트레스보다는 계속 생성되는 자연스러운 생각인 것 같아요. 그래서 도시처럼 스트레스를 받는다거나 그런 건 전혀 없어요.”
여기에 매화 아주머니가 한마디를 보태신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안 받으니까,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개운하니까 또 일을 하게 되고.” 이 말이 정답이리라. 그저 육체노동이 전부라면 어찌 이 일상을 지속해나갈 수 있겠는가.
남편이 집안일에서 딱 손 떼버리는 거야
하지만 여성에게 농촌 노동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밭일을 마치고 들어오면 집안 살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는 일을 하다가도 삼시 세끼 다 챙겨 먹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참 여성 농부들이, 밥하고 농사일하고 애 키우고 남편 보살피고 가축 있으면 여물도 해야 되고,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나야 지금 두 살림만 하면 되는데도 삼시 세끼 해 먹는 게 너무 힘들어. 왜 시골에는 배달 문화가 없는 거야! 그래서 농촌 여성들은 멀티가 되어야 하는 것 같아. 농사 끝나면 여자들은 그 순간부터 뒤에 더 많은 일이 있는 거예요.”
이런 점이 귀농해서 가장 크게 괴리감을 느낀 지점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도시에도 성별 분업 문제는 있다. 집안일을 여성에게만 전가하는 가정도 많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도시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남성도 농촌에 오면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자도 똑같이 노동을 하는데, 노동 이후에 (살림은) 어쨌든 당연히 필요한 일이잖아요. 근데 그걸 인정을 못 받아. 남편이 도시에 있을 때는 밥도 잘하고 세탁기도 잘 돌렸거든요. 시골 왔는데 딱 손을 떼더라고요. 같이 귀농을 준비하고 도시에서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 농촌 와서 남녀의 일을 너무 구분 지어버리니까 약간 당황스럽고. 그리고 똑같이 일을 해도 여자는 힘이 약하다고, 남자가 항상 많은 일을 한다고 밥도 더 많이 주고 품값도 더 많이 주고. 근데 남자들이 크고 무거운 거 한번 들 때 우리는 끊임없이 사부작사부작 다른 일을 더 많이 하거든요.”
그래서 미연 씨는 ‘나도, 여자도 할 수 있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무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매화 아주머니 말마따나 ‘골병드는’ 원인이 된다. 노동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이런 처우는 자주 경험한다.
“나는 아줌마가 대단하다고 느낀 게, 한번은 마을 잔치를 하고 이장을 뽑았어요. 아줌마들이 음식을 준비해서 다 같이 먹는데, 이장이 올해 수고한 사람들 인사를 시키는 거예요. 새마을회, 대동회 등등. 근데 아줌마가 번쩍 손을 들고 오늘 음식 만든 부녀회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소개를 안 하냐고 그런 거야. 그러니까 어 예예 그러더라고. 이장도 그런 일은 당연히 여자가 하는 거니까 수고로 부칠 생각을 못한 거지. 마을 행사 같은 데 가잖아요. 할머니들이 다 나르고 그래요. 젊은 남자들도 다 앉아 있어. 그나마 이장이 바뀌면서 조금 나아지긴 했는데…”
그래도 미연씨가 그런 자리에 마다 않고 따라나서는 이유는 자신이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준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착해 어우러져 살아가야 하니 무조건 거부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가끔 그래요, 남자들한테. 여기 젓가락 좀 놔주세요, 소심하게. 대놓고 확 하기에는 좀 그래요. 시골 문화가 아직도 그런 게 있으니까. 이렇게 조금씩 변화시키려고 그러는 거지 내가 농촌 문화를 확 바꿔야겠다 그런 생각은 못하죠.”
재미나게 살아봐요, 우리, 사는 날까지
미연 씨는 지난 2~3년 사이 처음으로, 농사와 함께 다른 활동을 모색하는 젊은 여성들과 만나 모임도 하고 농산물 꾸러미 보내기도 하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농사와 이런 활동을 병행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면서 그들의 삶의 방식과 자신의 방식은 다르구나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앞으로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옛날에 처음 꿈꿨을 땐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었는데, 이제 나는 이만큼 너무 멀리 와 있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농사를 지으면서, (양파나 명이나물 등) 직거래하면서 사람들하고 문자나 전화로 소통하고, 거기에 더 중심을 두는 게 맞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10년차에 아, 난 농사만 짓고 살아야 되는구나 결론이 난 것 같아요. 지금은 귀농해도 예전과 다르게 그 범위도 언어도 사업 분야도 다양해졌더라고요. 트렌드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래서 다양한 방향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난 이제 관심 분야가 줄어든 것 같아. 그냥 내 일 하고 농산물 가격이 좀 좋아져서 내일 빚을 걱정하지 않는, 그런 정도가 맞겠구나…”
뭔가 새롭고 색다른 일을 해야만 충만감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세월이 쌓이면서 형성된 자신만의 여건 안에서 얻는 행복이 있다. 이 공간이기에 가능한 일이 있다. 소소하지만 즐거움을 주는 재미난 일들. 장 담그고 김치 담그고 토종 먹거리를 유지하고. 이건 노동이 아니라 오히려 놀이에 가깝다. 그걸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즐거움은 덤이다.
“아줌마랑 가끔 머리나 식히자고 장을 가요. 근데 오일장 가면 죄다 사는 게 또 농사에 필요한 거.”
“혼자 가는 것보다 같이 가서 먹을 것도 좀 사 먹고 필요한 것도 사고, 그냥 땅만 파다가 나가서 몇 시간이라도 콧바람을 쐬고 오면 (좋잖아). 그래서 미연 씨 내일 서석장인데 갈까? 그러면 아줌마 좋아!!!”
마을에 여자들이 좀 더 많으면 더 북적북적 어울려 지내고 좋겠지만 미연 씨 말마따나 ‘아줌마랑 나랑’ 둘뿐이다. 그래서 둘은 절친, ‘베프’가 되었다. 서로 믿고 의지하고 스스럼없이 소통하는.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서 새로운 ‘바람’을 좀 일으켜주면 좋겠지만 그저 바람일 뿐이다. 지역 인구가 줄고 마을 인프라도 축소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터를 잡은 이곳에서 앞으로 꾸려나가고 싶은 삶이 있다. 크고 원대한 꿈이 있는 건 아니다.
“나? 꽃밭을 더 크게 만들고 싶어. 농사를 많이 늘리지 않고. 밭에서 편한 것도 있지만 집에 들어왔을 때 편한 것도 있잖아요. 그래서 집도 좀 넓히고, 주변도 좀 (예쁘게) 정리하고. 더 큰 꿈도 없고, 소소하게. 너무 일만 하지 않고 내 삶도 즐기면서 할 수 있는 것을 사부작사부작.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왔을 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그래야지 멀리 봤을 때 좀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고. 장독대도 만들고 화덕도 만들고 싶고. 커피 볶고 그런 거 좋아하는데, 그런 걸 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미연 씨에게 “앞으로 그렇게 만들면 되지, 농사 좀 줄이고 집도 어떻게 늘리든 달아 짓든 해서 넓게 해가지고 편안하게 즐겁게 살아가면”이라고 덕담을 보태는 매화 아주머니는 노후가 조금 걱정이긴 하다.
“여기서 여직 살았지만도, 노후를 어떻게 편안히 잘 지냈음 좋겠는데 그게 잘될 것 같지가 않아서 걱정이에요. 농사짓더라도 조금씩 돈이 생겨서 다만 몇백이라도 안전하게 통장에 있어야 사는데 이건 뭐 맨날 달랑달랑하니까 마음도 불안하고. 그리고 수시로 몸도 아프니까. (병원에) 한번 갔다 오면 몇만 원이에요, 못 써도. 다른 거 없이 더 아프지 않고 이대로, 일을 하더라도 그렇게 조금 호활하게, 남편이랑 그렇게 살다 가면 좋을 것 같아.”
두 사람은 “재미나게 살아봐요, 아줌마”, “사는 날까지”, “응, 사는 날까지”라고 만담하듯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마쳤다.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두 사람이 이곳 농촌에서 여성 농민으로 때로는 힘겹게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치열하게 꾸려온 삶을 절로 응원하게 되었다. 지금 귀농을 준비하는 내 입장에서는 많은 지혜와 경험을 ‘전수받은’ 자리이기도 해서 뜻깊었다. 미연 씨와 매화 아주머니가 변치 않는 절친으로, 베프로 ‘사는 날까지’ 재미나고 행복하게 지내길 진심으로 바란다.
[필자 소개] 류현영. 출판편집자. 여성노동자글쓰기모임 회원으로 『밀양을 살다』, 『기록되지 않은 노동』을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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