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자는데 엄마가 방문을 열고 말해요. “얘들아, 우린 약속이 있잖아?”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요.
그림책 『어떤 약속』(마리 도를래앙 글‧그림, 이경혜 옮김, 재능교육)의 시작 글이다. 상상해 보자. 그다음 어떤 장면이 펼쳐질까?
책장을 넘기면, 두 아이가 주섬주섬 옷을 입는 장면이 나온다. 한두 시간밖에 자지 못했지만 아이들은 ‘군말 않고’ 채비를 한다. 그다음 장은 막 집을 나선 가족의 모습이다. 맨 앞에 엄마, 그 뒤에 남자아이, 여자아이, 맨 뒤에 아빠가 일렬로 나아가고 있다.
귀뚜라미 노랫소리가 들리는 여름밤, 네 사람은 차고 시원한 밤 공기에 실려 오는 붓꽃과 인동덩굴 꽃향기를 맡으며 골목을 걷고 또 걷는다. 아직 불이 켜진 두어 집을 지나기도 하지만 “낮 동안 지글지글 끓던” 동네는 깊이 잠들어 있다.
네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계속 걷는다. 어느새 ‘마른풀 냄새가 코를 확’ 찌르는 시골길에 들어선다. ‘치르치르 메뚜기의 노래’에 어깨를 들썩이기도 하고, 앉은 채 자는 들판의 소들을 마주치기도 하고 저 멀리서 지나가는 밤기차를 바라보기도 하면서 점점 더 숲으로 들어간다.
한여름 밤, 숲은 더없이 평화롭다. ‘비에 젖은 이끼 냄새에 나무껍질 냄새가 섞여서’ 난다. ‘와직와직’ 마른 나뭇가지 밟는 소리가 들리고 ‘고사리 잎들이 밤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린다. 숲속에 사는 동물이 혹시 네 사람을 보아도 놀라 달아나지 않을 만큼, 이들은 조심조심 ‘숲속으로 잠겨 들어’간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이들 앞에 무언가 나타난다. 이들은 놀라서 발을 멈추는데…
여자들의 도보여행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밤새도록 걷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인다. 낮의 더위가 사그라들고, 온통 차고 푸른 공기가 가득한 초여름 밤, 물기 머금은 풀 냄새, 흙 냄새를 맡으며 개구리들이 떼 지어 우는 들길을 걸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게 어렵다면 합정부터 동대문까지, 도시를 관통하는 큰 길을 가능한 나무가 많은 길을 따라서 새벽 내내 걷고 싶다. 동행이 있다면 성산대교부터 잠실대교까지 한강 길을 따라 걸어도 좋을 텐데.
내게 이런 감각이 생긴 건, 여자들과 떼 지어 걸었던 어느 날 이후부터다.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다. 밤낮으로 한 무리 여자들과 떼 지어 시골길을 걸었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시간은 쉬었고, 그 외 시간에는 정말로 내내 걸었던 초여름! 나는 ‘타고난 발바닥’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보름 동안, 아무리 걸어도 물집이 생기지 않는 넓대대 발바닥!
그 시절 소위 말하는 명문대에 떨어지고 지방 분교에 입학한 나는 ‘실패자’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어떤 꿈도 목표도 없이 대학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방황하며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고 있었다. 고등학교까지는 내 책상, 내 자리가 있었으나, 대학에는 내 자리도, 내 이름을 불러주는 이도 없다는 게 힘들었던 것 같다. 막연히 대학에 가면 사회과학 이론 공부와 토론을 활발히 하며 내 안에 있는 어떤 욕구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때의 나는 어떤 노력을 해야 그런 걸 만나거나 만들 수 있는지 몰랐다. 사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랐던 것 같다.
동네 책 대여점에서 알바를 하며 ‘야오이’물부터 무협지까지 전에 모르던 책들을 만나는 기쁨도 있었지만, 대부분 하루종일 정처 없이 떠돌았고 밤이면 나와 같은 불안을 갖고 있(었지만, 아직 그런 상태에 놓여 있는 줄 몰랐)던 친구들과 술을 마셔댔다. 그러던 어느 날, 종종 방문하던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이런 광고 글을 보았다.
‘다이어트 도보여행, 15박16일. 다이어트도 하고 국토대장정도 하는 기쁨. 하루 1만원.’
여행 출발 이틀 전에 보았고, 충동적으로 도보 여행을 신청했다. 나중에 들은 걸로는, 다이어트 도보여행을 기획한 주최 측은 예전에 어린이 해병대 캠프 같은 걸 운영했던 사람들이었다 한다. 해병대 캠프의 억지스러운 고생이 체중 감량 효과가 크니, 이걸 성인 여성에게 적용한 상품을 만들어보려고 시험삼아 도보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것 같다. 지금의 나라면 참여하지 않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 여행에 홀딱 반해버렸다.
밤낮으로 걸으며, 나는 여름이 주는 생기를 온몸으로 빨아들였다. 특히 낮의 더위가 사그라들고, 온통 차고 푸른 공기가 가득한 밤에 걷는 일은 나를 싱그럽게 자라게 했다.
참여자는 오십여 명이었다. 남자는 참여자 한 명과 운영진 세 명 포함해 넷이 다였고, 모두 여성이었다. 여중 여고를 다녔지만, 그 여행에서 만난 여자들의 관계맺기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웠다. 이십 대부터 사십 대까지 다양한 연령과 다양한 지역에서 모인 여자들은 서로를 힘껏 지지했고, 돌봤다. 서로의 발에 난 물집에 실을 꿰어 치료해주고, 걸을 수 있다고 격려하고 응원했다. 저 앞에서 걷는 이는 저 뒤에서 오는 이를 응원하는 노래를 불러주거나 함께 깔깔대거나, 울기도 했다. 우린 서로가 가진 몸의 콤플렉스에 공감했고, 보름을 만나는 동안 서로의 인생사를 다 알 수 있을 것처럼 온갖 생로병사, 가족사, 연애사를 나눴고, 그 모든 걸 흠뻑 응원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그때의 도보여행에 헤어나오지 못해서, 그해 여름 ‘도보 행진’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검색했고, 통일운동을 하는 시민단체에서 운영했던 도보부터 등산 동호회에서 운영하는 행진까지 두 번을 더 걸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뒤에 걸었던 경험들은 여러 사람에게 들떠서 말했지만, 사실 누구에게도 ‘다이어트 도보여행’에 대해선 제대로 말해 본 적이 없다. 다이어트를 위해 무리하게 걷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도 싫고, 엔젤 다이어트라는 이름도, 그때 운영진의 성격도, 어리숙했던 나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초여름 밤공기, 들판의 냄새, 숲속의 질감
유월 초, 동네 책방에서 운영하는 그림책 모임에서 『어떤 약속』을 소개받았다. 나도 이미 이 책을 충분히 좋아한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그날은 남달랐다. 다른 이가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고 보여주는 그림책은 그 책 속으로 더욱 집중해서 빠져들게 했다.
밤공기의 청량함, 그 온도와 냄새, 이웃집 창문에서 들리는 소리, 들판의 냄새와 숲속의 질감과 촉감을 생생히 느끼게 했다. 『어떤 약속』을 낭독하며 보여준 이는 이 책이 읽는 이를 곧 밤의 숲으로 데려다주어서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들은 이 글에 소개하지 않은 장면들, 그야말로 휴식이고 도전이 되는 장면들이다.
책의 제목이 왜 ‘어떤 약속’일까, 서로 질문해보기도 했다. 이 책의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다. 밤의 숲을 걸어 마침내 무엇, 그리고 또 무엇을 만나는 과정! 그러고 보면, 이 책은 한 가족이 밤 소풍을 하기로 약속했던 날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밤의 끝에는 반드시 아침이 찾아온다는 진실을 기억하자는 다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역시 그림책은 남이 읽어 줘야 제맛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그림책 읽기의 기쁨을 새삼 만끽한 자리였다. 그리고 문득 내가 이 책을 좋아하게 된 건 오래 전, 여자들과 힘껏, 초여름의 밤을 통과했던 그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기억을 반추해보았다.
[필자 소개] 안지혜 님은 그림책 『숲으로 간 사람들』(김하나 그림, 창비)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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