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끝난 후 ‘최초’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된 사람이 있다. 서울 마포구 바선거구(서교동, 망원1동) 구의원으로 당선된 차해영 씨다. 그는 이제 ‘국내 최초 성소수자 구의원’, ‘국내 최초 성소수자 선출직 정치인’으로 불린다. 이에 대해 차해영 의원은 “그건 모르는 일 아닐까요? 정말 저 말고 성소수자가 없었을까요?” 반문한다.
누군가에겐 갑자기 ‘성소수자 구의원’으로 유명해진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차해영은 사실 다양한 시민사회운동에 참여하며 ‘마포’와 ‘청년’, ‘1인가구’, ‘소수자’ 등의 키워드로 다방면에서 목소리를 내어 온 활동가이자 기획자다. 마포를 기반으로 활동해 온 그의 이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구의원 당선 소식이 크게 놀랍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정치인이 된 그에게 묻고 싶은 질문들이 있었다.
13일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한 ‘공간 곁’에서, 차해영 의원과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숨기거나 돌려 말하지 않고 허심탄회하게 인터뷰를 하는 차 의원을 보면서, 흥미롭고 당당한 청년 정치인이 등장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번 마포구의회 의원선거 출마 전까지 언니네트워크, 서울퀴어문화축제, 마포청년들 ㅁㅁㅁ, 1인생활밀착연구소 ‘여음’,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오셨는데요. 어떻게 시민사회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부터 듣고 싶어요.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는데, 대안미디어와 관련된 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 때 시민들이 주파수를 갖고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시민 미디어 방송국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서울엔 마포FM이랑 관악FM으로 있고, 특히 마포FM엔 페미니스트 방송 ‘꽃다방’과 레즈비언 방송 ‘L양장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게 2007년이었는데요. ‘마포FM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마포FM에서 활동하면서 ‘주민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고, 이 목소리가 다른 주민들에게도 가닿아야 한다’는 걸 배웠어요. ‘지역이 중요하구나’, ‘지역에서 사람들을 만나야겠다’ 싶었죠. 그 즈음에 성소수자 인권운동도 시작했고, 운동 현장을 기록하는 활동도 하게 되었습니다.”
-마포라는 지역이 각별하게 느껴졌을 것 같네요.
“굉장히 재미있는 곳이자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공간이었죠. 다양한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고요. 저는 은평구에서 태어났는데, IMF 금융위기 이후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경기도 곳곳에서 지낸 기간이 있어요.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 은평으로 돌아갈 것인가, 마포에 새롭게 자리잡을 것인가 고민했었죠. 근데 아무래도 친구들이 마포에 많이 있으니까 마포를 선택하게 되더라고요. 이젠 그 친구들이 은평구, 강서구, 경기도로 넘어가서 남은 사람이 별로 없지만요. 어떻게든 버텨보자고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그런 장면들을 목격하면서, 마포에서 사는 것과 살지 못하게 되는 것(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됐죠.”
-여러 활동 중에서 특히 지금의 차해영이 있기까지 큰 영향을 준 게 있다면요?
“정말 고마운 단체들이 많지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어요.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와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활동. 퀴어문화축제의 경우, 예전에 비해 점점 규모가 커지고 참여자, 참여 단위가 많아지는 걸 보면서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걸 체감하게 해 준 곳이에요. 이만큼 성장하는 걸 봤기 때문에 ‘내가 (축제조직위원회가 아닌) 다른 일을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할 수 있었고요. 굉장히 치열한 현장이었고, 그래서 많이 배웠죠. 또 한편으론 바뀌지 않는 것에 대한 답답함도 느꼈어요. 서울시청 광장 사용을 둘러싼 갈등과 차별이 계속되는 걸 보면서, 행정이나 정책, 시스템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배워야겠구나 깨달았죠.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이하 청정넷) 활동은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해줬어요. 청정넷 활동을 하면서, 나한텐 성소수자 의제가 내 인생의 의제이고 가장 중요한 건데, 다른 사람들한텐 노동 문제, 주거 문제, 기후 문제가 1순위라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이렇게 주요 의제가 다를 수 있고, 이들에게 내 의제를 이야기해야 하고 함께 논의해야 한다는 것, 내 문제가 해결된다고 모든 게 다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해준 게 청정넷이었어요. 그 안에서 성소수자 분과를 만들고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나 또한 여러 정체성을 가진 복합적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고요.
또한 행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보게 됐죠. 내가 한 문제 제기가 어떤 것이 해결됐다 혹은 해결되지 않았다 라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내가 말한 부분이 지금의 구조 안의 어느 지점에서 왜 멈춰지는지’ 과정을 보는 것이라는 걸요. 우리 사회에선 항상 ‘그래서 됐냐 안 됐냐’만 이야기하니까 계속 분노만 하게 되는데, 결과값만 보는 게 아니라 과정을 보게 되면 그 분노를 원동력으로 쓸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행정과 정책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정치 활동으로 이어진 것 같네요. 더불어민주당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해요.
“문재인 전 대통령이 후보였던 2017년 대선 토론회에서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됐었잖아요. 그 때 ‘다음 대선 때는 저런 말이 미디어에 등장하지 않게 해야 한다’, ‘저런 말에 상처 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했어요. 민주당에서 당장 뭘 못하더라도, 다음을 위해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지금까지 시민사회 활동을 해왔으니까 이제 정당으로 위치를 옮겨 보자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게 2017년이에요.
그런데 막상 정당 가입은 했는데 어떻게 활동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사실 주변 동료들한테 민주당에 입당했다는 이야기도 못하겠더라고요.(웃음) 사실 고민의 시간이 길었어요. 그러다 2019년, 당원 중에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할 참여단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한 거죠. 성소수자 당사자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더불어민주당 당원으로서 이 축제에 참여하는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뻤어요. ‘내가 이걸 하기 위해서 더불어민주당에 남아있었던 거구나’ 싶더라고요. 그렇게 성소수자위원회 준비모임을 시작하게 됐죠.
그 즈음에 한국 사회에 트랜스젠더 혐오가 부각되는 일들이 있었고, 故 변희수 하사의 사망 사건이 있었어요. 당내에서 내가 역할을 더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에 힘쓰기 시작했어요. 토론회 자리도 만들고요. ‘목소리를 내자, 청년 정치인 혹은 청년 당원들과 연대를 쌓아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이라는 과업을 해내자’고 움직였죠. 그러면서 저 스스로에게도 조금 더 (민주당을 선택한) 명분이 생긴 것 같아요.
약간 방향을 전환해서 보면, 저한테 민주당은 블루오션 같기도 해요. 무슨 말이냐면 정의당엔 예전부터 성소수자위원회가 있었고, 녹색당엔 심지어 ‘장애인, 이주민, 탈북주민, 성소수자 등의 인권을 보호하고 존중한다’는 강령이 있어요. 그런 것들을 민주당에서 만들어 가야 한다는 점에서 저한텐 할 일이 많고, 할 수 있는 역할도 많은 거죠. 또한 앞으로 저출생 고령화 시대라 인구정책이 중요할 텐데, 성별 이분법과 이성애중심, 혈연가족 중심주의를 벗어난 관점의 정책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이 절 필요로 할 거라고 봐요.”
-더불어민주당이 양당 체제에서는 ‘진보’로 분류되지만, 여러 면에서 진보적이지 않은 정치 행보를 보여 비판도 많이 받잖아요. 민주당의 행보가 차혜영 당선인의 지난 활동이나 방향과 맞지 않는 일들도 꽤 있었을 텐데요, 계속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떤 일 때문에 탈당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어요. 부끄러운 적은 있었죠. 주변에서 ‘평등법 제정 안 되면 민주당 탈당할거냐’ 물어보면, ‘그래도 제가 있으니까 여기까지라도 온 거에요’라고 답하며 웃었어요. 오만한 생각일 수 있지만,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목소리가 나오는 건 확실히 다르거든요. 당원이 됐고, 정치하려고 마음 먹은 이상, ‘어떻게 하면 같이 바꿀 수 있을까, 내가 무슨 역할을 해야 할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당 내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 갈 것인가, 내 목소리를 어떻게 더 잘 들리게 할 것인가’ 고민해야 하고요. 권력욕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저한테 권력욕이 있는 거겠죠.”
-보통 시민사회운동을 하다 정치권으로 이동하는 경우, 안 좋은 시선을 받기도 하잖아요. ‘결국 정치하고 싶은 거였냐’, ‘권력욕 있냐’ 이런 말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스스로 권력욕이 있다고 말씀하신 부분이 흥미롭네요.
“성소수자 인권운동도 저에겐 사실 욕망의 운동이었다고 생각해요. 그 욕망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고요. 저한텐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걸 보고 싶다’는 욕구가 있는데, 이건 사실 굉장한 통제 욕구가 있다는 거기도 하거든요.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 활동이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내가 통제하고 있는 어떤 상황 속에서 축제가 열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본다는 거였어요. 우야식당, 1인생활밀착연구소 ‘여음’을 만들고 활동하면서, 사람들한테 밥을 해 주고, 먹는 모습을 보는 것도 그런 제 욕구와 연결되어 있죠. 그런 욕망을 더 크게 실현하려면,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의제들을 실제로 실행할 수 있어야 하죠. 그러려면 선출직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전 ‘당선이 안될 걸 알지만 선거에 나간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당선될 수 있는 선거에 나가서 당선이 된다’는 게 목표였어요.”
-지방선거 출마 결심은 언제, 어떤 계기로 한 건요?
“2019년 6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월드 프라이드’에 갔을 때, 경찰 등 공권력이 과거 스톤월 항쟁에서 성소수자들을 폭력으로 진압했던 일을 사과하는 모습을 봤어요.(월드 프라이드 2019는 미국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상징인 스톤월 항쟁 50주년을 기념하여 뉴욕에서 대규모로 열렸다.) 또 시의회 성소수자 정치인들이 퍼레이드 제일 앞에 서서 함께 축하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세상을 다 바꿀 순 없어도 ‘낯선 사람들을 환대하고 누구도 차별 받지 않는 도시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시민사회운동 하면서 느끼고 배운 것들을 실현하고 싶다, 구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거죠. 동네가 바뀌는 사례를 만들 수 있다면, 분명 민들레 홀씨처럼 퍼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결심을 한 것과 별개로, 당내 공천을 받아야 하잖아요. 쉽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제 경우가 흔한 건 아닐 거에요. 정당 활동도 오래하지 않았고, 심지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지역위원회 활동이 어려웠거든요. 그러다 대선을 맞이하게 됐고, 이재명 후보 캠프에서 일하게 됐죠. 1인가구와 관련된 활동을 해 온 경력 덕에 1인가구 서울시당 공동선대위원장이 되었고요. 이후 민주당 내 청년 정치인 연대모임도 만들었고, 마포구 지역위원장과 만나는 기회를 얻었어요. 이런저런 상황이 잘 맞아떨어졌던 것 같아요. 지난 대선 때, 박지현 전 공동비상대책위원장과 여성 청년들이 보여준 힘이 있었고, 당내에서도 (이번 지방선거 때) 변화를 같이 만들어 보자는 부분이 있었고, 우리 지역위원장도 그런 입장이었고요.”
-출마할 때 커밍아웃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아요. 사실 이미 몇 번 매체를 통해 커밍아웃을 한 이력이 있지요. 가장 최근엔, 대선 때 이재명 후보의 ‘닷페이스’ 영상에도 출연했고요. 거기서 ‘제가 후보님의 첫 성소수자 친구가 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기억납니다.
“커밍아웃이 큰 고민이긴 했어요. 사실 예전에 이미 다 한 거긴 한데(웃음) 다시 또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이 많았죠. 그러다 닷페이스에 출연하게 된 거고요. 주변에서 말리기도 했는데, 당내에서 이재명 후보에게 누군가 성소수자 관련 이야기, 차별금지법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내가 그걸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점에서 보면, ‘동성애에 반대한다’던 2017년 대선보다 조금 나아졌다는 생각이 드셨겠네요.
“개인적으로 뿌듯했어요. 그런 이야기가 다시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5년 동안 버텼는데, 기회가 오긴 오는구나 싶었고요. 이재명 후보 공약으로 1인가구 정책, 특히 ‘연대 관계인 등록 제도’(혼인, 혈연 관계가 아니라도 돌봄, 의료, 장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포함시킨 것도 의미가 있었죠. 저 스스로는 열심히 했다고 생각해요.”
-대선 캠프에서 선거 운동을 한 경험이 있지만, 본인의 선거 운동은 좀 달랐을 것 같아요. 특히 ‘차해영 후보가 성소수자다’라는 점을 악용하려는 움직임도 좀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구의원으로서 자질을 보여줘야 함에 있어서 성소수자이고 아니고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기에 특별히 드러낼 필요도 없지만, 감출 필요도 없다고요. 근데 어떤 분들이 제가 성소수자임을 약점으로 잡아 이용하려고 하고, 주민들에게 퍼트리려 한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됐어요. 공유되고 있다는 문자를 직접 본 적도 있고요. 그렇다고 직접적인 대응할 생각은 없었어요. 진짜 낙선운동을 하거나 제 현수막을 훼손하거나 하는 등의 물리적인 폭력이 있지 않는 한. 다만, 만일을 대비해 다양한 방면에서 대외적인 연대체를 구축해 놓으려고 노력했어요. 이 일을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논의하려 했고요. 결과적으로 큰 문제는 없었지만, ‘카더라’ 식의 소문이 계속 돌고 주민 분들도 걱정하고 하니까 막연한 두려움이 생기긴 하더라고요. 그래도 티 내진 않으려고 했죠.
-한편으로, 선거 기간 동안 성소수자 인권운동과 여성주의 활동 이력이 부각되지 않았던 점에 대해 아쉽다는 의견은 없었나요?
“선거 운동 기간이 2주밖에 안 되는 상황 속에서 성소수자나 페미니즘의 언어들을 설명하는 과정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 한국 사회에서 그 단어들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나라는 사람을 알리는 시간이 굉장히 한정적인 상황에서 어떤 단어에 잠식되면 안 된다는 판단을 한거죠. 하지만, 그 활동들을 통해 내가 배운 가치를 전해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히 있었어요. 그래서 그 누구도 차별 받지 않는 마포, 여성 1인가구에게 안전한 마포, 모두가 존중 받을 수 있는 마포를 만들겠다고 했어요.
성소수자 임을 대놓고 말하지 않았던 부분에 있어선 아쉬움보다 슬픈 감정이 드는 게 사실이긴 해요. 주변 지인들이 선거 동안 아무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또 선거가 끝나고 대만 언론에서 최초로 관련 기사가 나가고 난 뒤에 저한테 슬쩍 ‘이제 얘기해도 돼요?’라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슬프더라고요. 앞으로 이런 사회를 바꿔나가야겠죠. 전 당선이 될 수 있는 전략을 선택했어요. 저에게도 이와 관련해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만큼 다른 사람들도 이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정리하지 않을까 싶어요.”
-‘한국 사상 최초 성소수자 의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어요. 부담스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할 것 같고, 여러 기분이 교차할 것 같은데요.
“사실 제가 한국 최초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껏 얼마나 많은 선출직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명도 없었을까요? 그러면 이상한 거죠.(웃음) 여러 기분이 드는데, 슬프기도 해요. 아직까지도 성소수자임이 약점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드러내기 어렵다는 부분이요. 그래서 속상한 마음이 들고요. 한편으론 기대도 돼요.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요. 동시에 그러기 위해선 내가 일을 정말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도 들죠.”
-임기 4년 동안 어떤 정치활동을 펴고 싶은 가요?
“많은 분들이 뭘 할거냐 물어보시더라고요. 일단은 4년을 안정적으로 일을 잘 해내고 싶어요. 운동의 언어와 정치의 언어를 중간에서 잘 번역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요. 1인가구 관련, 인구정책 관련된 부분은 제 강점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또 취약한 부분도 있으니까 그런 것에 대한 공부도 많이 하고 싶고요.
주민들을 위한 공론장을 많이 열고 싶어요. 주민들과 대화를 하는 일에 대한 용기를 잃지 않겠다는 마음으로요. 그리고 그 논의가 극단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되지 않게 하고 싶어요. 예를 들어 ‘차별금지법에 찬성하세요, 반대하세요?’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어떤 것이 차별일까요? 우린 이 차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를 논의하는 자리를 만들겠다는 거죠. 주민들이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자리를요. 좋은 질문을 던지고, 건강한 대화를 이끄는 정치를 하고 싶어요. 그래서 우리의 삶이 나아질 수 있도록이요. 그게 목표에요.”
-구체적으로 어떤 공약을 실천해나가실지 궁금하고, 기대가 되네요.
“제 공약 중 하나가 여성 혼자여도 안전한 동네였기 때문에 ‘1인 생활 보장 조례’를 만들고 싶어요. 이 조례는 여성뿐만 아니라 다양한 1인들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조례입니다. 개인의 생활을 보장한다는 게 과연 무엇일지, 그러면서 동시에 공동체성을 잃지 않는다는 건 어떤 것인지 고민해서 담아낼 생각입니다. 이걸 1년 안에 해내겠다는 말은 현실성이 없는 것 같고, 제 임기 내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고 논의하면서, 다른 동네와 지역에도 퍼져나갈 수 있는 조례를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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