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과 공격이 심각한 백래시 시대,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로 다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스무 편이 연재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능력주의의 반대말
나와 동료들은 지난 4월, 『돌봄 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이라는 책을 함께 읽었다. 이 책을 쓴 ‘더 케어 컬렉티브’는 2017년 영국 런던에서 학술모임으로 시작한 단체로, 오늘날 세계적으로 ‘돌봄’이 마주한 다면적이고 심각한 위기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되었다고 한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투명가방끈’은 11년 전 대학입시거부 선언자들의 조직으로 시작해 학력차별반대 운동을 해오고 있는 단체이다. 작년부터 조직 내 안티-능력주의팀을 결성해 능력주의 사회에서 다른 삶을 상상을 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안티-능력주의팀 결성 첫 해에는 팀원들끼리 『능력주의와 불평등』(박권일, 홍세화, 채효정, 정용주, 이유림 지음, 교육공동체벗, 2020)을 읽었다.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능력주의가 왜 비판되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고, 능력주의 비판에 대한 악플에 반박하는 영상을 찍거나, 카드뉴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올해 상반기는 ‘투명한 책갈피’라 이름 붙인 책모임을 통해, 회원들과 능력주의 대안 모색을 주제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함께 선정한 책이 『돌봄 선언』이었다.
능력에 따라 차등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치이념이 능력주의다. 동시에 능력에도 위계가 있다고 간주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가장 낮은 등급은 쉽게 말해 돈도 명예도 재생산해내지 못하는 능력이다. 그 다음으로 낮은 등급이 있다면 아마 돈, 그러니까 재화는 벌 수 있지만 재화를 벌어들이는 생산구조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혹은 다른 일자리로 상향 이동할 수 있는 경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수많은 저임금 노동력이 이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 가장 좋은 능력은 재화를 벌어들이는 생산구조를 소유하고 있거나, 상향 이동할 수 있는 경력으로 인정받는 능력들이다. 부동산이나 고학력, 학벌 등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능력주의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물론, 내가 정답을 알고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무엇을 떠올릴지 너무 궁금하다. 나는 우선 내가 이 사회에서 획득해야 한다고 압박을 받았던 ‘능력’을 얻기 위해 무엇을 가장 많이 희생하고 있는지, 무엇을 가장 저평가했는지 되돌아보았다. 그게 바로 ‘돌봄’이었다.
돌봄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가장 능력으로 평가 받지 못하는 지대이기도 하다. 돌봄은 돈을 벌어다 주지 않으며, 사회적인 명예를 누릴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다른 일자리로 상향 이동할 수 있는 경력으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게다가 돌봄은 매우 귀찮은 일이기까지 하다. 반드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며, 심지어 숙련이 필요한 일이다.
누군가의 돌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돌봄은 개인과 공동체, 나아가 사회가 안녕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다. 하지만 나는 유년기에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엄마를 지켜보며, 나는 어른이 되면 아무도 돌보지 않겠다고, 나는 나만 돌봐도 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수많은 딸들 중 한 사람이었다.
퀴어 페미니스트, 우리가 서로를 돌보지 않는다면
2010년대 중간 언저리에 나는 퀴어이자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재정체화 했다. 당시는 수많은 권력형 성범죄와 온라인 성범죄, 페미사이드(여성살해) 사건에 비로소 이름이 붙여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나는 단순히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것을 넘어서 페미니스트로서 다른 페미니스트들과 만나고, 페미니즘 운동을 함께하게 되었다.
퀴어로서 연대하는 것은 또 다른 과정이었다. 나는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영원히 퀴어로 재정체화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내 친구들은 우리 엄마한테 ‘나쁜 친구’들일 것이다. 나에게는 연대를 통해 퀴어로 살아갈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정체화 한 이후에는 더 열심히 퀴어들을 찾아다녔다. 고립되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도 찾아다녔던 것 같다. 그렇게 만난 소위 ‘나쁜 친구’들 덕분에 내가 아직 살아있다.
이렇게 ‘나쁜 친구’들인 퀴어와 페미니스트들의 ‘돌봄’이 있었기에 내가 죽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과거에 엄마를 지켜보며 어른이 되면 아무도 돌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시간들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퀴어와 페미니스트들의 돌봄이라고 말하면 너무 아름답게 들리지만, 사실 그 시간들은 끔찍할 때가 더 많았다. 돌봄이라는 것은 단순히 응원을 보내는 행위가 아니다. 접촉해야 하고 감정을 끌어 안아야 하며, 타자와 같은 시공간에 머물러야 하고, 돌발적이고 우발적이며, 때론 예측 불가능하다. 돌봄은 서로의 밑바닥을 보여줘야 하는 일이자 그 밑바닥을 쓸고 닦아줘야 하는 일인 것이다. 타자의 타액을 받아내고, 배설물을 치워주는 일이 바로 돌봄이다. 세상에 우아한 돌봄은 없다.
취약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안그래도 번거로운 돌봄이 한층 더 심란해지고 끔찍해진다. 내가 겪은 퀴어와 페미니스트들의 돌봄이 그러했다. 우리는 자주 소진되고, 서로에게 화가 났으며, 서로가 미워졌고, 걱정됐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세상이 인정해주는 능력을 가지지 못해서 우리가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야만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그래야 우리의 존재도, 운동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를테면 이런 기분이다. 충분히 노력하면 남자만큼 신체적으로 강해질 수 있음을 입증해야할 것만 같은 기분, 좋은 학벌을 취득해서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네트워크 안에 들어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 열심히 노력해서 일터에서 승진하여 소위 ‘정상’에서 만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 내가 하고 싶은 예술을 하더라도 반드시 국가기관으로부터 인정받는 예술을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 그렇다. 바로 이 사회의 능력주의가 주입하는 기분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수자 운동을 한다는 것은 능력주의에 더욱 취약해지는 일이기도 했다. 비가시적인 존재들이 능력주의 사회에서 가시적이 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회가 인정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그래서 퀴어 페미니스트인 우리는 능력주의에 편승해야 할 것 같은 압박과 갈등을 느꼈고, 그럴수록 서로를 돌보고 서로에게 의존하는 일은 끔찍한 것이 되어 갔다.
하지만 서로를 돌보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 퀴어로 살아가면서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오랜 역사에서 돌봄은 언제나 여성을 비롯한 약자들의 희생으로 이뤄진 비가시화 된 노동이 아니었는가! 내가 보고 자란 엄마의 노동과 같이 말이다. 돌봄을 계속해서 약자의 노동으로 떠넘기고 나 스스로에게도 비가시화 된 영역으로 만들 것인가? 결국, 나에게 돌봄은 가장 큰 화두가 되었다. 그리고 돌봄을 고민하는 일이 곧 능력주의에 저항하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경쟁이 아니라 돌봄을 배웠어야 했다
나는 돌봄을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능력의 개념은 너무 많은 것을 손쉽게 개인의 몫으로 전가하기 때문이다. 돌봄을 능력의 범주에 포함시키면, 내가 나를 잘 돌보는 능력이 중요한 것으로 취급되면서, 결국 돌봄은 다시 자기관리와 자기계발로 축소되어버리고 만다.
돌봄은 개인이 아무리 취약한 상황에서도, 타자와 연결되고 도움받을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언제든 취약한 타자를 도울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사는 삶들로 사회가 구성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노력과 기여를 ‘공정하게’ 평가해준다는 명분으로 사회 구성원을 개인 단위로 조각 내고, 서로를 경쟁시키는 능력주의 사회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능력주의적인 인간으로 성장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학교는 아주 유력한 혐의자이다. 학교는 우리가 처음 공식적으로 경쟁을 배우는 곳이니까. 우리는 왜 함께 살아야만 하는 사회에서 서로를 돕는 법보다 경쟁하는 법을 먼저 배운 것일까. 학교, 특히나 입시교육제도는 우리로 하여금 경쟁 속에서 남보다 나은 성적을 받아 남을 이기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자꾸 착각하게 만든다.
사실은 교육도 돌봄이어야 한다는 것을 모두 잊은 것일까? 타자를 도울 수 있고, 타자와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기 위해 돌봄으로써 학교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돌봄으로서의 교육이 경쟁하는 교육으로 전면대치되어 버린 결과가 바로 능력에 따라 남을 차별해도 되고,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하대해도 된다고 믿는 혐오사회일 것이다. 그렇게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회, 남을 돕는 것이 어리석다고까지 여겨지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사실은 사회라는 것이 함께 생존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약속해서 일궈낸 것이라는 역사적 진실이 우리들 사이에서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서로를 돕지 않았다면, 사회도 존재할 수 없었다. 함께 살자고 약속해서 사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개인으로서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어서 사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의 몫을 개인에게 전가하고, 사회의 단위를 개인의 단위로 축소시키는 능력주의야 말로 정말 반사회적인 가치가 아닐 수 없다.
능력주의에 질문을 던지는 ‘페미니스트 킬조이’
투명가방끈이 학력-학벌 폐지와 함께 ‘능력주의에 대한 저항’을 함께 외치면, 사람들은 꼭 ‘그래서 대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한다. 그럴때마다 나는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이제 어떤 사람들에게는 능력주의를 신봉하지 않는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힘마저 사라져버린 것일까 싶어서. 능력주의의 대안이 무엇이냐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차별의 기준과, 경쟁하라는 구호에 대해 의문을 품고 질문하는 것이 아주 좋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질문함으로써 분위기를 깨뜨리는 것이다.
에린 웡커(작가이자 캐나다여성문학예술위원회CWILA 이사장)의 ‘페미니스트 킬조이’(Feminist Kill Joy)라는 개념을 좋아한다. 그는 저서 『웃어넘기지 않는다』(송은주 옮김, 신사책방. 2021)에서 무심코 차별하는 행동에도 참고 넘어가지 않으며, 가부장제의 흥을 깨트리고 순응하지 않는 이들을 ‘페미니스트 킬조이’라 칭한다. 나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서로를 돌볼 수 있기 위해, 기꺼이 신자유주의가 바라는 경쟁체제를 웃어넘기지 않는 ‘킬조이’가 되려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사회에 반드시 돌봄이 필요하며, 우리는 모두 돌봄에 대한 권리와 책임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 다음은 우리에게 필요한 돌봄을 단순히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데에서 나아가 ‘실천하는 과정’으로서 돌봄을 행동으로 세분화하고, 그 세세하고 번거로운 과정에 구체적으로 이름 붙일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그 과정에 수반되는 감정과 시간, 장소에 대해 공론장에서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돌봄을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논의와 협상의 장으로 가져와야 한다!
능력주의에 대한 페미니즘적인 저항은 더이상 공공의 몫을 개인의 몫으로 전가하지 말라는 주장이기도 하다. 공공의 몫이 줄어들수록 개인들은 더 불평등해지고, 불평등해질수록 ‘공존’이라는 사회의 본령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나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분위기를 깨트릴 것이며, 열심히 이 사회에 돌봄의 몫을 달라고 구할 것이며, 경쟁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할 것이다.
[필자 소개] 연혜원. 투명가방끈 활동가이자 퀴어예술매거진 ≪them≫을 발행하는 사회학 연구자. 고양이 하쿠와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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