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에 대한 페미니즘의 대안은?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학력차별 반대운동가의 ‘돌봄 선언’

연혜원 | 기사입력 2022/06/21 [12:22]

능력주의에 대한 페미니즘의 대안은?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학력차별 반대운동가의 ‘돌봄 선언’

연혜원 | 입력 : 2022/06/21 [12:22]

※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과 공격이 심각한 백래시 시대,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로 다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스무 편이 연재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능력주의의 반대말

 

나와 동료들은 지난 4월, 『돌봄 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이라는 책을 함께 읽었다. 이 책을 쓴 ‘더 케어 컬렉티브’는 2017년 영국 런던에서 학술모임으로 시작한 단체로, 오늘날 세계적으로 ‘돌봄’이 마주한 다면적이고 심각한 위기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되었다고 한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투명가방끈’은 11년 전 대학입시거부 선언자들의 조직으로 시작해 학력차별반대 운동을 해오고 있는 단체이다. 작년부터 조직 내 안티-능력주의팀을 결성해 능력주의 사회에서 다른 삶을 상상을 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안티-능력주의팀 결성 첫 해에는 팀원들끼리 『능력주의와 불평등』(박권일, 홍세화, 채효정, 정용주, 이유림 지음, 교육공동체벗, 2020)을 읽었다.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능력주의가 왜 비판되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고, 능력주의 비판에 대한 악플에 반박하는 영상을 찍거나, 카드뉴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올해 상반기는 ‘투명한 책갈피’라 이름 붙인 책모임을 통해, 회원들과 능력주의 대안 모색을 주제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함께 선정한 책이 『돌봄 선언』이었다.

 

▲ 투명가방끈 활동가들과 책모임 신청자들이 『돌봄 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더 케어 컬렉티브 지음, 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2021)을 함께 읽었다. ©투명가방끈

 

능력에 따라 차등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치이념이 능력주의다. 동시에 능력에도 위계가 있다고 간주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가장 낮은 등급은 쉽게 말해 돈도 명예도 재생산해내지 못하는 능력이다. 그 다음으로 낮은 등급이 있다면 아마 돈, 그러니까 재화는 벌 수 있지만 재화를 벌어들이는 생산구조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혹은 다른 일자리로 상향 이동할 수 있는 경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수많은 저임금 노동력이 이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 가장 좋은 능력은 재화를 벌어들이는 생산구조를 소유하고 있거나, 상향 이동할 수 있는 경력으로 인정받는 능력들이다. 부동산이나 고학력, 학벌 등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능력주의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물론, 내가 정답을 알고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무엇을 떠올릴지 너무 궁금하다. 나는 우선 내가 이 사회에서 획득해야 한다고 압박을 받았던 ‘능력’을 얻기 위해 무엇을 가장 많이 희생하고 있는지, 무엇을 가장 저평가했는지 되돌아보았다. 그게 바로 ‘돌봄’이었다.

 

돌봄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가장 능력으로 평가 받지 못하는 지대이기도 하다. 돌봄은 돈을 벌어다 주지 않으며, 사회적인 명예를 누릴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다른 일자리로 상향 이동할 수 있는 경력으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게다가 돌봄은 매우 귀찮은 일이기까지 하다. 반드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며, 심지어 숙련이 필요한 일이다.

 

누군가의 돌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돌봄은 개인과 공동체, 나아가 사회가 안녕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다. 하지만 나는 유년기에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엄마를 지켜보며, 나는 어른이 되면 아무도 돌보지 않겠다고, 나는 나만 돌봐도 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수많은 딸들 중 한 사람이었다.

 

퀴어 페미니스트, 우리가 서로를 돌보지 않는다면

 

2010년대 중간 언저리에 나는 퀴어이자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재정체화 했다. 당시는 수많은 권력형 성범죄와 온라인 성범죄, 페미사이드(여성살해) 사건에 비로소 이름이 붙여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나는 단순히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것을 넘어서 페미니스트로서 다른 페미니스트들과 만나고, 페미니즘 운동을 함께하게 되었다.

 

퀴어로서 연대하는 것은 또 다른 과정이었다. 나는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영원히 퀴어로 재정체화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내 친구들은 우리 엄마한테 ‘나쁜 친구’들일 것이다. 나에게는 연대를 통해 퀴어로 살아갈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정체화 한 이후에는 더 열심히 퀴어들을 찾아다녔다. 고립되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도 찾아다녔던 것 같다. 그렇게 만난 소위 ‘나쁜 친구’들 덕분에 내가 아직 살아있다.

 

이렇게 ‘나쁜 친구’들인 퀴어와 페미니스트들의 ‘돌봄’이 있었기에 내가 죽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과거에 엄마를 지켜보며 어른이 되면 아무도 돌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시간들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청소년인권단체 공동 기자회견에서 발언 중인 연혜원 투명가방끈 활동가 모습 ©투명가방끈

 

퀴어와 페미니스트들의 돌봄이라고 말하면 너무 아름답게 들리지만, 사실 그 시간들은 끔찍할 때가 더 많았다. 돌봄이라는 것은 단순히 응원을 보내는 행위가 아니다. 접촉해야 하고 감정을 끌어 안아야 하며, 타자와 같은 시공간에 머물러야 하고, 돌발적이고 우발적이며, 때론 예측 불가능하다. 돌봄은 서로의 밑바닥을 보여줘야 하는 일이자 그 밑바닥을 쓸고 닦아줘야 하는 일인 것이다. 타자의 타액을 받아내고, 배설물을 치워주는 일이 바로 돌봄이다. 세상에 우아한 돌봄은 없다.

 

취약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안그래도 번거로운 돌봄이 한층 더 심란해지고 끔찍해진다. 내가 겪은 퀴어와 페미니스트들의 돌봄이 그러했다. 우리는 자주 소진되고, 서로에게 화가 났으며, 서로가 미워졌고, 걱정됐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세상이 인정해주는 능력을 가지지 못해서 우리가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야만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그래야 우리의 존재도, 운동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를테면 이런 기분이다. 충분히 노력하면 남자만큼 신체적으로 강해질 수 있음을 입증해야할 것만 같은 기분, 좋은 학벌을 취득해서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네트워크 안에 들어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 열심히 노력해서 일터에서 승진하여 소위 ‘정상’에서 만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 내가 하고 싶은 예술을 하더라도 반드시 국가기관으로부터 인정받는 예술을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 그렇다. 바로 이 사회의 능력주의가 주입하는 기분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수자 운동을 한다는 것은 능력주의에 더욱 취약해지는 일이기도 했다. 비가시적인 존재들이 능력주의 사회에서 가시적이 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회가 인정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그래서 퀴어 페미니스트인 우리는 능력주의에 편승해야 할 것 같은 압박과 갈등을 느꼈고, 그럴수록 서로를 돌보고 서로에게 의존하는 일은 끔찍한 것이 되어 갔다.

 

하지만 서로를 돌보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 퀴어로 살아가면서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오랜 역사에서 돌봄은 언제나 여성을 비롯한 약자들의 희생으로 이뤄진 비가시화 된 노동이 아니었는가! 내가 보고 자란 엄마의 노동과 같이 말이다. 돌봄을 계속해서 약자의 노동으로 떠넘기고 나 스스로에게도 비가시화 된 영역으로 만들 것인가? 결국, 나에게 돌봄은 가장 큰 화두가 되었다. 그리고 돌봄을 고민하는 일이 곧 능력주의에 저항하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경쟁이 아니라 돌봄을 배웠어야 했다

 

나는 돌봄을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능력의 개념은 너무 많은 것을 손쉽게 개인의 몫으로 전가하기 때문이다. 돌봄을 능력의 범주에 포함시키면, 내가 나를 잘 돌보는 능력이 중요한 것으로 취급되면서, 결국 돌봄은 다시 자기관리와 자기계발로 축소되어버리고 만다.

 

돌봄은 개인이 아무리 취약한 상황에서도, 타자와 연결되고 도움받을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언제든 취약한 타자를 도울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사는 삶들로 사회가 구성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노력과 기여를 ‘공정하게’ 평가해준다는 명분으로 사회 구성원을 개인 단위로 조각 내고, 서로를 경쟁시키는 능력주의 사회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능력주의적인 인간으로 성장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학교는 아주 유력한 혐의자이다. 학교는 우리가 처음 공식적으로 경쟁을 배우는 곳이니까. 우리는 왜 함께 살아야만 하는 사회에서 서로를 돕는 법보다 경쟁하는 법을 먼저 배운 것일까. 학교, 특히나 입시교육제도는 우리로 하여금 경쟁 속에서 남보다 나은 성적을 받아 남을 이기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자꾸 착각하게 만든다.

 

사실은 교육도 돌봄이어야 한다는 것을 모두 잊은 것일까? 타자를 도울 수 있고, 타자와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기 위해 돌봄으로써 학교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돌봄으로서의 교육이 경쟁하는 교육으로 전면대치되어 버린 결과가 바로 능력에 따라 남을 차별해도 되고,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하대해도 된다고 믿는 혐오사회일 것이다. 그렇게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회, 남을 돕는 것이 어리석다고까지 여겨지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 올해 5월 5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어린이날 100주년 맞이 기호0번 청소년 후보 출마선언’ 기자회견이 열렸다. ©투명가방끈

 

사실은 사회라는 것이 함께 생존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약속해서 일궈낸 것이라는 역사적 진실이 우리들 사이에서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서로를 돕지 않았다면, 사회도 존재할 수 없었다. 함께 살자고 약속해서 사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개인으로서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어서 사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의 몫을 개인에게 전가하고, 사회의 단위를 개인의 단위로 축소시키는 능력주의야 말로 정말 반사회적인 가치가 아닐 수 없다.

 

능력주의에 질문을 던지는 ‘페미니스트 킬조이’

 

투명가방끈이 학력-학벌 폐지와 함께 ‘능력주의에 대한 저항’을 함께 외치면, 사람들은 꼭 ‘그래서 대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한다. 그럴때마다 나는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이제 어떤 사람들에게는 능력주의를 신봉하지 않는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 힘마저 사라져버린 것일까 싶어서. 능력주의의 대안이 무엇이냐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차별의 기준과, 경쟁하라는 구호에 대해 의문을 품고 질문하는 것이 아주 좋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질문함으로써 분위기를 깨뜨리는 것이다.

 

에린 웡커(작가이자 캐나다여성문학예술위원회CWILA 이사장)의 ‘페미니스트 킬조이’(Feminist Kill Joy)라는 개념을 좋아한다. 그는 저서 『웃어넘기지 않는다』(송은주 옮김, 신사책방. 2021)에서 무심코 차별하는 행동에도 참고 넘어가지 않으며, 가부장제의 흥을 깨트리고 순응하지 않는 이들을 ‘페미니스트 킬조이’라 칭한다. 나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서로를 돌볼 수 있기 위해, 기꺼이 신자유주의가 바라는 경쟁체제를 웃어넘기지 않는 ‘킬조이’가 되려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사회에 반드시 돌봄이 필요하며, 우리는 모두 돌봄에 대한 권리와 책임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 다음은 우리에게 필요한 돌봄을 단순히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데에서 나아가 ‘실천하는 과정’으로서 돌봄을 행동으로 세분화하고, 그 세세하고 번거로운 과정에 구체적으로 이름 붙일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그 과정에 수반되는 감정과 시간, 장소에 대해 공론장에서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돌봄을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논의와 협상의 장으로 가져와야 한다!

 

능력주의에 대한 페미니즘적인 저항은 더이상 공공의 몫을 개인의 몫으로 전가하지 말라는 주장이기도 하다. 공공의 몫이 줄어들수록 개인들은 더 불평등해지고, 불평등해질수록 ‘공존’이라는 사회의 본령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나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분위기를 깨트릴 것이며, 열심히 이 사회에 돌봄의 몫을 달라고 구할 것이며, 경쟁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할 것이다.

 

[필자 소개] 연혜원. 투명가방끈 활동가이자 퀴어예술매거진 ≪them≫을 발행하는 사회학 연구자. 고양이 하쿠와 함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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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06 [15:53] 수정 | 삭제
  • 저 아래 댓글단 ㅈㄱ 님이 돌아오시진 않겠지만...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이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건지 전혀 못 읽으신 거 같아서 조금 답답하네요... 애초에 능력주의가 그 '능력'이라는 걸 한 개인에게 속한 것으로 보고, 그 능력을 위해 전제되어야 했던 수많은 돌봄노동, 사회적 구조 등을 배제하고 있지 않나요... 그리고 이 글이 '엄마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가 결론인 글로 읽히셨나요.. 이미 글쓴분이 다 글에서 언급한 부분인데, 글을 제대로 보지 않고 허구의 개념을 비판하는건 댓글단 분 본인 아닌지...
  • mnipar 2022/06/28 [13:07] 수정 | 삭제
  •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소중한 글이었어요. 고마워요!!!
  • 하루 2022/06/27 [06:49] 수정 | 삭제
  • 잘 읽었습니다! 내가 오늘 이렇게 숨쉴수 있는 것은, 숱한 이들의 돌봄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다시 생각하며, '능력'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애용해왔다는 생각이 드네요.
  • 멋진글 2022/06/24 [15:10] 수정 | 삭제
  • 개인의 능력이라고 해봐야 서로 돕고 마음을 모으는 사람들의 힘에 비하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내가 어떤 사람을 곁에 두고 싶어하는지 떠올려봐도 자기 혼자 잘난 사람보다는 힘들 때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이 훨씬 좋죠. 나도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
  • 바잠 2022/06/24 [06:26] 수정 | 삭제
  • 능력주의의 반댓말은 ‘꽁짜로 얻어먹는 주의’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능력주의 안에 수치화에 대한 거부성이 있는데, 그 반댓말에 공짜라는 단어가 어울리지는 않아요. 공짜라는 개념도 수치화된 기준이니까요. 능력이 있어야 타인을 돌볼 수 있다는 것도 능력주의가 전제된 말이지요. 타인을 돌볼 때 필요한 능력이란 무엇일까요? 현실적인 재력? 혹은 체력? 시간이 될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면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예로 들어봅시다. 그들과 반려동물 사이의 관계에서 사람은 반려동물을 위해 식사를 제공하는 등 돌봄을 실행하겠지요. 그런데 말이죠. 돈을 벌어다 주는 것도 아닌 반려동물 또한 그 반려인에게 돌봄을 행사합니다. 하물며 동물도 그러합니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돌본다는 ‘능력’에 자신만의 기준과 수치를 달지 않는것이 능력주의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요? 수치화가 아닌 관계성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거죠. 즉 능력주의의 반대가 0에 수렴하는 무엇의 개념이라기보다, 오히려 각자의 능력과 그 기준을 인정해주자는 이야기에요. 저마다의 개별적인 수고와 발현, 주고받음, 그런 것들이 여기서는 돌봄이라는 단어로 사용된것 같아요. 글 잘 읽었습니다.
  • 흐음 2022/06/23 [17:11] 수정 | 삭제
  • 돌봄으로 인권을 인정하고 함께 성장하는 페미니즘의 온기. 기대하겠습니다.
  • 크루아상 2022/06/21 [23:00] 수정 | 삭제
  • 능력주의의 반대말이 돌봄인 것 같다는 얘기에 아,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학교 다니면서 왜 수학 과학 역사는 필수인데 사회생활의 상식적인 것들은 제대로 못 배운 건지, 학교는 왜 협동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지, 왜 관계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지 늘 의아했어요. 주위를 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 때도 있죠. 사랑과 믿음을 주는 친구들, 상호의존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경쟁하고 우월감이나 열등감 느끼는 것보다 백배 행복한데.. 거기엔 꼭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 공감 2022/06/21 [19:58] 수정 | 삭제
  • 자기계발서들이 흥행하지 않는 사회가 언젠가는 오길 바랍니다.
  • ㅈㄱ 2022/06/21 [19:28] 수정 | 삭제
  • 능력주의의 반댓말은, ' 공짜로 얻어먹는 주의 ' 입니다. 돌봄이라는 것도 내가 돌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남을 돌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능력은 글쓴이 님께서 허구로 잡고 네거티브로 말하는 그런 능력이 아님은 당연히 아니겠죠. 사회에서 요구하는 무언가의 기대치를 벗어나고 싶다면 벗어나면 됩니다. 그렇게 모인 분들끼리의 능력은 또 나타나겠지요. 또 거기서 요구하는 기대치에 내가 따라가지 못한다면 또 뭐라고 하실건가요? 별거 없습니다. 글쓴이님께서 엄마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 부분에 대해 안타깝게도 훌륭한 어머님을 만나뵙지 못한 부분은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다만 어머님께서 살아왔던 삶에 있어서도 당신 나름대로의 최선의 삶을 사셨을 뿐입니다. 그것이 다만 글쓴이 님께는 좋게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겠지만, 어머니의 삶도 어머니의 삶이었음을 인정하는게 필요하겠죠. 다만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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