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경을 멈추기
올해 2월, 왼쪽 팔뚝에 임플라논을 심었다. 임플라논은 4cm 정도의 작은 플라스틱 막대인데 피부 아래에 삽입하면 호르몬이 조금씩 방출되면서 배란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대체로 잊고 살지만 가끔 생각나면 팔을 만져본다. 피부 바로 아래에 삽입하기 때문에 손가락을 갖다 대면 임플라논이 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임플라논은 피임 성공률 99%가 넘는 피임도구 중 하나다. 그런데 누구나 피임을 목적으로 임플라논 시술을 받진 않는다. 월경량이 많거나 월경통이 심한 경우에도 임플라논 시술을 받기도 한다. 내 가장 큰 목적은 월경을 멈추는 것이었다.
월경량이 많은 건 아니지만 때때로 월경통이 심했고, 무엇보다도 귀찮았다. 월경컵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이후로 월경 과정이 많이 편해졌다고 말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월경컵을 비우고 씻고 다시 넣는 일도 번거롭긴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하루종일 밖에 있는 날이 많으니 월경컵을 관리하기 더 힘들었다.
PMS(월경전증후군)도 한 가지 이유였다. 기분 조절을 돕는 약물을 복용하면서 큰 사고 없이 일상을 이어가고 있는 편이지만, 월경하기 며칠 전부터는 기분을 통제하는 것이 어려웠다. 식욕도 그랬다.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자꾸 음식을 찾고 기분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면 어김없이 며칠 후에 월경이 시작되었다. 이렇다 할 치료법도 없다. PMS에 도움이 된다는 광고를 보고 영양제도 사서 먹어보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월경을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임플라논 시술 비용은 30만 원이었다. 적은 돈이 아니었다. 6개월 할부를 긁었다. 시술은 금방 끝났고 통증도 크지 않았다. 후기를 찾아보니 임플라논 시술 후 부작용을 겪는 사람들이 많았다. 피부 문제에서부터 체중증가, 계속되는 부정출혈 등 증상도 제각각이었다. 복불복이라고들 했지만 내가 기대를 걸었던 건, 임플라논 시술 후에 ‘운이 좋은’ 사람은 임플라논이 몸 안에 있는 동안 월경이 아예 끊긴다는 거였다.
2주 정도는 아주 적은 양의 부정출혈이 때때로 있었다. 그러다 부정출혈 증상이 점점 사라지더니 그다음 달엔 월경을 하지 않았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몇 달째 월경이 없다. 드디어 월경이 사라졌다. 놀랍게도, 월경을 하지 않으니 PMS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임플라논 전도사가 되었다. 친구들에게 임플라논을 권했다. 친구들은 부러워하면서도 임플라논 시술을 한다 해서 무조건 월경이 멈추는 것도, 부작용이 없는 것도 아니니, 30만 원을 선뜻 투자하기에는 망설여진다고 했다. 왜 아직도 의료기술이 이 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 한탄을 남겼다.
월경은 오로지 재생산을 위한 것일까?
임신이나 출산에 대한 욕망이 없는 친구들은 대체 왜 월경을 수십 년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안 할 수 있다면 안 하고 싶다. 월경의 긍정적 의미를 찾아보려고 한 적도 있다. 월경은 오래 전부터 여러 문화권에서 여성에 대한 혐오와 멸시의 명분이 되어왔다. 월경혈은 오염 물질로, 월경하는 몸은 ‘남성’의 몸에 미달하는 비정상적인 몸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월경을 ‘임신 실패’의 서사로만 배우는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월경을 시작하면 ‘여자가 되었다’고 축하하고, 월경이 끝나면 ‘더이상 여자가 아니다’라고 비하한다. 월경을 하면서 살아가는 몸의 가치는 재생산의 기능과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임신과 출산을 통해 재생산의 주체로서 자신의 몸을 사용할 때야 ‘여자’의 역할을 한다고 이해된다. 임신에 대한 의지가 없는 가임기 여성에 대한 비난은, 월경을 하는 동안 임신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비난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월경을 임신 기능과 결부시키지 않고 사유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인류학자 에밀리 마틴은 월경의 목적이 임신이 아니라 질을 관통하는 혈류 자체, 즉 주기적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것 자체가 몸을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출혈이라고 쓰기도 했다. 월경을 ‘임신 실패’로 이야기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하지만, 몸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과정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이해하는 만큼, 월경에 동반되는 여러 불편함에 대한 연구와 개입은 늦어지는 측면이 있다.
저널리스트 마야 뒤센베리는 어떤 여성은 월경이 괴로운데 왜 다른 여성은 그렇지 않은지, 어떤 여성은 폐경기 증상을 겪는데 왜 다른 여성은 겪지 않는지, 의학은 여전히 이유를 모른다고 지적한다. 또한 이러한 무지는 오랫동안 의학이 ‘여성의 문제’를 정상으로 보거나 혹은 정신질환으로 다루어왔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여전히 ‘출산을 하면 월경통이 사라질 거다’라는 말을 듣고 사는 우리는 월경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 월경을 병리적으로 취급하지 않으면서도, 그에 따르는 통증과 불편함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고, 적절한 의료적 개입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완경’이라는 말은 적합한가
우리는 월경에 대해 모르는 만큼 월경이 끝나는 시간에 대해서도 모른다. 과거의 의학이 여성이 폐경으로 인해 겪는 고통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호르몬 대체요법 등을 포함해 폐경기에 얽힌 거대한 의료 산업이 형성되어 있다. 오히려 폐경 즈음한 시기에 몸에 일어나는 모든 증상을 폐경으로 인한 증상이라고 치부하며, 오진을 하거나 다른 질병의 치료 시기를 놓치기도 한다.
폐경에 관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듣긴 어렵다. 다른 무엇보다도 감정을 통제하기 어렵고 우울감을 지속적으로 겪는다거나, 자다가도 몸에 열이 확 올라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두려움이 앞선다. 폐경에 관한 가장 인상적인 글 중 하나는 시인 메리 루플의 ‘멈춤’이라는 산문인데, 그 산문에는 루플의 울음일기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폐경을 경험하며 매일 몇 번을 울었는지 기록해 둔 일기다.
“당신도 나처럼 19세기 정신병원 수용소의 기록을 찬찬히 살펴본다면, 마흔을 넘은 여성은 모두 입원 사유가 ‘월경 중단’이라고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끔은 완곡어처럼 들리는 ‘삶의 변화’라는 단어도 보았지만, 실은 완곡어법도 아니다”라는 문장을 보고 어떻게 겁이 나지 않겠는가.
이 산문은 그 멈춤(pause)의 시기를 지나 세상에서 ‘보이지 않게’ 된 존재가 되고,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야말로 세상의 가장 큰 비밀이자 경이로운 선물이라는 이야기로 끝난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을 ‘자유로움’으로 겪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관여가 없더라도 살아갈 수 있는, 그러니까 생존의 수단이 다방면으로 마련된 사람인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한쪽에선 든다. 그럼에도, 월경이 중단되고 임신을 할 수 없는 몸이 되면서 얻는 자유도 분명히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나는 이 시기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알고 싶다.
얼마 전 번역한 책 『턴어웨이』(다이애나 그린 포스터 지음)에서 나는 menopause를 ‘완경’이라고 옮겼다. 처음에 ‘폐경’으로 옮겼다가 편집자와 상의 끝에 ‘완경’으로 수정했다. 완경이 아닌 폐경을 쓰고 그렇게 번역한 이유를 덧붙일까 하다, 책의 맥락을 넘어서는 일일까 싶어 완경으로 두었다. 폐경이라는 말에 따라 붙는 부정적 감각에 대한 대안적 용어로 ‘완경’이 제시되었고, 페미니스트 사이에서는 이제 완경이라는 단어가 꽤 익숙하게 자리잡았다. 하지만 이 단어가 자리잡는 동안 우리가 폐경이 아닌 완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 그리고 월경과 폐경에 대한 이야기들이 사회에 충분히 쌓였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나는 굳이 완경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지 않은데, 매달의 월경을 하나의 완성 지점을 향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완경은 ‘월경을 완료했다’는 의미인데, 애초에 월경은 내가 완료하고 싶은 과제도 아닐뿐더러, 어쩐지 월경과 재생산에 관한 의무를 결부하는 세계와 별다르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책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마야 뒤센베리 지음)에는 1900년에 미국부인과학회장이 한 말이 인용되어 있다. “수많은 젊은 여성이 사춘기에 몰려드는 파도와 맞서다가 영원히 장애를 안게 됩니다. 이를 무사히 넘어서고 출산이라는 바위에 부딪혀 조각나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월경이라는 파도와 성적 폭풍에 곱게 갈리다가, 마침내 완경(menopause)이라는 잔잔한 항구에 다다르게 되죠.” 나에게 ‘완경’이라는 말은 이런 느낌을 준다.
‘폐경’에 들러붙은 혐오적 감각들을 떨쳐내기 어렵다면, 다른 단어를 만들어 볼 순 없을까. 재생산과 결부되지 않은 월경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발견하고 싶다. 월경이 전혀 쓸모없게 느껴진다면 왜 그렇게 느껴지는지, 월경에 동반되는 해결되지 않는 증상과 고통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탐구되어야 한다.
큰 문제가 없다면 임플라논을 계속 교체해가며 폐경의 날까지 달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월경을 인위적인 개입을 통해 중단시키면서 새롭게 감각하게 되는 것들도 잘 기록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며칠씩 집이 아닌 곳에서 잠을 자는 것이나, 운동을 망설이지도 않아도 된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제일 큰 건, 월경으로 인한 기분 변화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다. 월경하는 몸이 말하는 이야기들이 ‘히스테리’로 일축되어 온 긴 역사만큼이나, 앞으로 긴 시간 동안 월경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쌓아나가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마야 뒤센베리(2019).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김보은, 이유림 옮김). 한문화 -메리 루플(2021). 《나의 사유 재산》(박현주 옮김). 카라칼 -박이은실(2015). 《월경의 정치학》. 동녘
[필자 소개] 김보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에서 활동하고 있다.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 『출렁이는 시간[들]』 『아프면 보이는 것들』을 함께 썼고, 『턴어웨이』를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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