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 사회가 돌봄에 얼마나 취약한지 여실히 드러내었고, 서로 돌보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돌봄 사회를 위하여,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돌봄 현장을 조명하고, 다양한 돌봄의 경험과 아이디어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내가 아플 때 위탁할 수 있는 사람은?
작년 12월 중순, 이 시기의 많은 프리랜서들이 그러하듯 한 해의 일이 마무리되어 이제부터 한 달은 온전히 쉬겠다 마음먹고 있던 차였다. 25년 지기인 친구에게 신장 관련한 증상이 생겼고, 방문했던 1차 병원에서 3차 병원 재검을 권유받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순간 덜컥했다. 이제 이 친구가 아픈 것인가? 나의 1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는 나의 친구가 아픈가? 위험한 질병이면 어쩌지? 온갖 질문과 부정적인 생각들이 이어졌다.
친구는 2주 동안 세 곳의 병원을 방문하고 마지막으로 들린 3차 병원에서, 영상진료 결과 좋지 않은 모양의 무엇이 보이니 검사 하나를 더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 후 또 다른 오랜 친구인 A와 나는 아픈 친구의 돌봄을 자처하며 입원대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친구는 함께 살고 있는 부모님이나 유학 중인 동생이 아닌, 친구를 돌보기로 마음먹은 우리 둘에게 현재의 증상과 이후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에 대해서 논의했다. 치료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일이나 치료가 불가할 경우 우리들의 역할이 무엇이면 좋을지를 말하며 자신을 위탁하고자 했다.
친구는 아픈 몸을 먼저 경험한 나와, 아픈 당시의 나를 옆에서 지켜봐 온 친구 A를 법적인 가족보다 앞세워 보호자로 여겼던 것 같다. 친구의 부모님과 동생은 법적인 가족이지만, 부모님은 연로하셨고 동생은 어렵게 유학 생활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또한 가족은 너무나 가까운 사이이기에, 가족 구성원 누군가가 급작스럽게 중증의 질병 상태에 놓여졌을 때 오히려 자신을 위탁하기가 더 어려운 사이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공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친구는 우리를 선택했고, 우리는 기꺼이 그를 돌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아팠던 사람이었고, 질병과 장애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며, 그 경험이 자원이 되어 충분히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아픈 몸’으로서의 삶이 시작되다
친구의 질병 소식을 들었던 시기는 내가 종양수술 후 4년이 되던 때였다. ‘방골성 골육종’이라는 악성 희귀암 진단을 받고 급히 수술이 결정되었던 4년 전, 종양이 커질 대로 커져 있던 무릎뼈는 수술로 일부가 잘려나갔고, 뼈의 대체재가 신체 일부로 자리잡게 되었다. 떼어져 나간 종양은 길어도 10일 안에 분석이 될 것이라고 했지만, 복잡한 성질을 가지고 있던 그것은 분석이 어려워 실제로는 2주 정도가 되어서야 결과가 나왔다.
수술은 당시 상황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바로 수긍은 했지만, 전이 가능성으로 분석된 종양의 성질로 인해 수술치료를 마친 후 바로 항암치료를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통증으로 뒤덮였던 몸은 정서적 불안과 괴로움이 더해졌고 그제서야 질병 이후의 삶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29cm를 째고 집어넣은 보형물에 적응하기 위한 통증이나, 독한 항생제를 견디다 퍼렇게 멍들거나 붉게 부어오른 양 팔뚝의 혈관통으로 인해 울게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아픈 몸’으로 재정립될 삶이 너무나 막막하게 느껴져 그 순간 이전과는 다른 눈물이 쏟아졌다.
입원기간 동안 환자의 보호자는 과도한 업무에 시달려 환자의 요구를 일일이 파악하거나 수용하지 못하는 간호사의 다른 이름이었다. 아픈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나 역시 가족 돌봄에 의지하려고 했다. 얼마만큼 어떠한 형태의 간병이 이뤄져야 할지 모르고 퇴원일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엄마와 당시의 내 파트너에게 간병을 부탁하게 됐다.
70대 중반이 되어 검은 머리보다 흰 머리가 더 많이 보이는 엄마는 7년 전 무릎 관절염 수술을 한 이력을 갖고 있었다. 엄마는 이미 가사노동과 손주 돌봄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덜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돌보려 가방을 이고 지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타며 병원을 오갔다. 파트너 역시 예상치 못한 나의 질병 진단에 충격이 컸을 텐데,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돌봄을 시작하게 돼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친구들의 돌봄 릴레이
위급한 상태라는 담당의사의 판단에 급하게 결정된 수술 일정으로 병원 생활을 시작한 후, 마치 이 상황을 지켜보며 간병인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듯, 주변의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소통하고 개인적으로도 연락을 주어 돌봄을 자처했다. 상호 연락을 취해 일정을 계획하여 아픈 나를 위하고 주 간병인들을 쉬게 하기 위한, 아픈 사람을 위한 돌봄, 그리고 돌보는 자를 돌보는 ‘돌봄 릴레이’를 시작했다.
익히 아는 오랜 친구와 동네 친구들임에도 불구하고, 아픈 몸으로 만나는 이 사람들이 새로웠다. 수술 직후에는 이동이 어려워 침상에서 대소변을 보고 이들에게 치워달라는 요구를 해야 했는데, 하나같이 연습이나 했듯이 내가 내미는 간이변기를 받아들고 능숙하게 비소독물실로 가져가 처리를 하고는 보호자 자리로 돌아와 필요한 사항을 묻고, 없으면 자기 할 일을 했다.
밤샘을 할 때 넷플릭스로 보호자로서의 자신의 심심함을 달래고 코를 골며 자던 친구, 새로 시작한 수놓기로 커튼을 만들다가 내내 누워있거나 앉아있어 욕창이 생길 것 같은 나의 등과 엉덩이의 혈액 순환을 위해 손힘을 자랑하며 거침없이 마사지를 해주던 친구, 휠체어로 이동할 수 있는 병원 내부의 로비 산책길을 다니며 어느 여자 연예인의 이야기를 늘어놓던 친구 등. 나로선 다채로운 보호자들을 보는 재미도 있고, 이런 특별한 돌봄의 수혜자가 된 것이 큰 기쁨이기도 했다.
또 하나, 돌봄 받는 자로서의 태도는 무엇이어야 할지 생각해보는 계기도 되었다. 침상에서 대소변을 본 후 (나름 용기를 내어)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 처리를 부탁해야만 했던 나는, 항생제로 입맛을 잃어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아 걱정을 끼쳤던 나는, 다리를 접는 재활 운동을 시작하며 병동 복도가 떠나가라 소리 질렀던(그래서 정형외과 병동에서 유명인사였던) 나는, 첫 번째 항암치료 후 5분 간격으로 구토를 하지만 그만큼 섭식을 해내지 못했던 나는, 두 번째 항암치료를 거부하고자 했던 나는, 과연 그들에게 잘 돌봄 받을 수 있는 환자/친구/딸/파트너였을까?
가족 돌봄의 한계를 경험하며
항암치료는 한 달에 한 번씩 진행됐다. 2~3일을 입원해 몇 가지의 항암약을 투약받고 몸의 면역체계가 기준선에 도달하면 3주째에 의사를 만나 다음 항암 일정을 결정하고, 한 주 뒤 다시 입원해 항암약을 투약받는 것의 반복이었다. 그 사이 부작용을 확인하고 약을 조절하는 과정이 있었으나 첫 번째 항암치료는 내가 얼마만큼 견딜 수 있는지, 부작용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데이터가 전혀 없는 그야말로 첫 번째 치료이니 온전히 항암약의 부작용을 견디고 버티며 사경을 헤매는 시간으로 보냈다.
이미 수술과 22일 동안의 입원 치료로 인해 많이 약해져 있던 몸은 항암치료를 견디기에 역부족이었다. 몸무게는 계속해서 줄어들었고 약으로 인해 입맛은 쉽게 잃었으며 오심과 탈모, 설염과 같은 항암 부작용이 따라와 항암치료 기간 동안의 나는 앉거나 누워있거나 먹고 토하는 패턴으로 그저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그리고 만날 수 없는 집 밖의 시간과 관계들을 그리워했다. 릴레이 돌봄의 주역들, 걱정과 응원을 보내주는 오랜 친구들을 직접 보고 싶었고, 문 밖에서 먹거리와 응원을 건네는 친구들의 메시지를 대면해서 듣고 싶었다. 특별했던 돌봄의 경험이 이런 사무침을 만든 것인가 생각하며 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돌봄’을 떠올리고 또 떠올렸던 시간이기도 했다.
항암치료를 시작하며 나는 다시 엄마의 돌봄 자리로 돌아갔다. 원 가족이 살고 있는 집으로 복귀한 것이다. 당시 집에는 엄마 외에 나와 거의 등을 지다시피 한 아빠와, 동생 부부와 그들의 아이가 살고 있었다. 동생 부부는 같은 건물의 다른 층에서 장사를 하며 낮 시간을 보냈고, 그 시간에 엄마는 손주를 봐주거나 가사일을 해야 했다. 퇴원 후부터 첫 항암 후 이틀까지 약 열흘 동안 이 광경을 지켜보았는데, 동생 부부는 자신의 아이 전담 돌봄자를 뺏긴 불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었고, 엄마는 안절부절못하며 그들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손주 돌봄에 더 많이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엄마는 언젠가는 자신을 위탁하게 될(것이라 믿는) 동생 부부에게 도구화되어 있었지만, 지금 해내고 있는 일들이 자신의 당연한 역할이고 이후의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아픈 나는 엄마에게 버거운 인물이었고, 동생 부부의 안정적인 삶의 계획을 방해한 훼방꾼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항암치료의 부작용을 견디기도 힘들었지만, 가족들이 만들어내는 눈앞의 광경과 안정감을 느낄 수 없는 돌봄에 스트레스가 커지며 호흡 장애가 왔다. 응급실에서의 검사를 마치고는 다시 원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를 잘 돌봐줄 사람, 그런 환경은 따로 있었다. 혈연가족의 돌봄, 가족 밖의 돌봄을 받은 경험으로 인해 나는 앞으로 누구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더 깊게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었다.
여성주의 돌봄, 정의로운 상호 돌봄의 상상
어느 정도 회복이 된 후 나는 ‘젊은+비혼+중증질병 경험자’로서의 내 경험을 필요로 하는 자리에 종종 요청을 받아 아픈 몸의 이야기를 전해왔다. 그러면서 페미니스트이자 여성 1인 가구로서의 내 정체성을 존중받으며 돌봄의 의미를 만들어왔던 관계와 시간이 있었음을 기억해냈다.
몇 년 전 ‘비혼여성 1인 가구에게 돌봄의 연결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를 질문하며, 이 필요를 공감하는 동네 페미니스트들의 모임을 시도한 적이 있다. 몇 차례 만남을 가졌지만 어떤 이유 때문인지 모임은 지속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들 서로가 원하는 가구 형태로 존재하고 혼자의 삶을 살아가도, 서로의 연결과 지지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관계망’일 수 있겠다는 감각은 공유되었다고 생각한다.
여성주의 감수성을 지닌 사람들이 정상가족을 벗어난 가족 형태를 선택하거나 선택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그러한 삶에서 부족할 수 있는 자원이 무엇인지 서로 이해하고 자신과 서로를 위한 노력과 실천으로 일상의 자원을 함께 만들어 가고자 했던 것이 나에게는 ‘다른’ 돌봄을 기대하고 시작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그것이 이후 마을에서 새롭게 만난 페미니스트들과의 돌봄 관계망으로까지 확장되었다. 누구나 아픈 몸일 수 있다는 상상, 서로 돌보고 지원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구상, 그 역할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와 서로를 향한 지지, 그리하여 이뤄지는 정의로운 상호 돌봄….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에게 이러한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었던 어떠한 접촉면이 추가, 공유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는 동네에 존재하는 여성주의 의료기관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차별과 배제 없이 평등으로 이뤄내는 건강을 말하고, 환자 중심의 의료행위를 실천하고 알려내며, 협동으로 여성주의 건강의 가치를 실천하는 살림의료복지 사회적협동조합이 페미니스트들의 여성주의 가치관을 더 다양하게 만들고 페미니즘+의료행위의 의미를 공감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모이고 만나도록 한 것이다. 아픈 몸을 상상하고 지역과 주민이 함께 돌보는 마을, 나이들어가고 싶은 마을을 일구는 과정의 수혜를 내가, 주민들이, 지역 사회가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를 돌볼 수 있다
다시 돌아가 친구의 이야기를 해보자. 친구는 마지막 검사에서 다행히도 악성종양이 아닌 것으로 진단되었지만, 여전히 미스터리인 몸 속의 그것을 조심하고 있다. 아픈 친구 곁에서 역할을 고민했던 동안, 질병을 지나온 내가 다시 누군가를 돌보고자 했을 때 이전과는 달라진 점을 생각해보았는데 그 내용을 나누며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친구가 혹시 생길지도 모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사실은 그 이전에도 생의 활기를 잃었었다고 했을 때, 부모님에 대한 책임감을 이야기했을 때, 죽음과 장례절차, 어딘가에 적어둔 유언장을 말했을 때, 나는 아픈 사람이 죽음이나 남겨질 사람들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하거나 듣는 사람의 부담감을 예단하면서 자신의 말하기를 거르지 않고 그 이야기를 다 꺼내놓을 수 있도록 아픈 사람 곁에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어서 좋았다.
내 경험으로 경험주의자가 되어 속단한 답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휘몰아치는 불안을 나누고 충분히 떠올릴 수 있는 죽음을 예상하며 돌보는 우리 두 사람의 역할을 말해주어서 좋았다. 지독한 질병 경험을 했기 때문에 내 앞에서 자신의 아픈 몸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들을 경청하는 이로 나를 선택해주어서, 검사진료를 위해 입원했을 때 이제는 입원 짐을 싸는 것에 도가 튼 내가 필요한 물건을 챙길 수 있도록 해주어서, 오랜 공부를 마치고 우리가 다시 만난 연말연시에 좋아하는 술 한잔 하지 못한다는 칭얼거림을 곁들일 수 있어서, 아플 때의 내가 필요했던 이것들을 다 해낼 수 있는 입장이 되어서 좋았다.
그리고 제대로 말해내지 못한 채 질병을 통과해내는 나를 지켜보던 친구들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돌봄 릴레이를 맡아준 이들의 심정이 무엇이었을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느끼게 된 것도 고마운 경험으로 남아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아픈 몸이고 (질병 후유증으로 인한) 신체장애에 적응 중이다. 하지만 이 이유로 인해 취약해진 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 특별했던 돌봄 경험의 자원이 더해진 몸의 역할을 상기시킨다. 아픈 몸을 설명해 내고자 학습한 언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리가 생길 때마다 이 이야기가 필요한 1인 가구, 비혼인, 가족 밖 돌봄을 받거나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 닿기를 바라며 그 경험들을 알려내고 전하고 퍼뜨리는 중이다.
가족 돌봄에서 비껴난, 그러기를 선택한 비혼 여성/1인 가구가 언젠가 맞닥뜨릴지 모를 질병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건강할 때 돈을 많이 벌어 재산을 축적하거나 어떻게든 성공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 대신, 서로 돌보며 일상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관계를 만들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또한 죽음을 맞이하게 됐을 때 내가 원하는 관계 안에서 나답게 죽을 수 있도록 지금부터 서로를 살피고 돌봄의 관계망을 만들자고 권하고 싶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먼저 시도하고 곁의 사람을 만들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래서 서로 돌보고 함께 건강할 수 있는 변화를 만들자고 요청한다.
[필자 소개] 혜영. 두 고양이의 언니, 사진가, 교육활동가. 돌봄 관계와 죽음을 주제로 한 새로운 사진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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