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로 기소된 성폭력 피해자와 ‘함께’한 시간

피해자 편에 서는 법[法] 무고죄 피의자가 된 피해자를 변론하다 下

이은의 | 기사입력 2022/07/19 [17:46]

무고로 기소된 성폭력 피해자와 ‘함께’한 시간

피해자 편에 서는 법[法] 무고죄 피의자가 된 피해자를 변론하다 下

이은의 | 입력 : 2022/07/19 [17:46]

※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첨예한 논쟁이 된 성폭력과 미투 사건들을 맡아 해결해 온 이은의 변호사의 기록, ‘피해자 편에 서는 법[法]’을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고백하건대, 박유천 성폭행 관련 무고 사건을 맡기 전에는 국민참여재판을 경험하기는커녕 구경도 해본 적이 없었다. 로스쿨에서 형사소송법 시간에 이런 제도가 있다고 들어본 게 전부였다. 직전 해에 이천 공기총 살인사건을 맡아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한 적이 있는데, 당시 법원에서 부적합한 사유가 있다며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재판기일이 두 번이나 열렸고, 적극적으로 항명해 봤지만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고 싶어도 할 도리가 없다는 것만 배우고 끝난 경험이었다.

 

국민참여재판이 받아들여지면 향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도 난감했지만, 정작 국민참여재판으로 하고 싶다고 해서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준다는 보장이 없었다. 더구나 이 무고 사건의 고소인이 한류스타로 세간의 주목을 받는 사건이니, 반대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런데 국민참여재판을 반대하는 것이 상대방만은 아니었다. 과거 성폭력 관련 사건에서 국민참여재판으로 만족할만한 결과가 얻어진 적이 별로 없다 보니, 내부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 와중에 국민참여재판이 결정된 것에는 피해자가 변호사의 판단에 보내준 전적인 신뢰와 지지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 2017년 4월 3일 서울지방법원 앞, ‘유명연예인 박OO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사건 피해자에 대한 명예훼손 및 무고죄의 올바른 판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성폭력 피해자를 입막음하는 가해자의 역고소를 비판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일다

 

피해자는 무고를 하지도,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국민참여재판이 결정되었지만 증인을 부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피해자는 무고죄 혐의만으로 기소된 것이 아니라, 언론출판물에 의한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로도 기소되었다. 무죄 입증을 위해 법정에 불러 심문해야 할 증인들이 여럿 있었다. 자기가 원하는 이득이 없는 이상, 수사기관이나 법정에 기껍게 출석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게다가 당시 이 사건은 언론에서 거의 유죄추정을 받는 수준의 상황이었다. 증인으로 나와주어야 할 사람들에게 무고죄와 명예훼손죄로 기소되어 피고인이 되어버린 피해자가 법정에 나와달라 부탁하고 설득할 상황이나 형편이 되지 못했다. 졸지에 피고인이 되어버린 피해자를 대신해 증인들을 직접 만나 법정에 나와 달라고 설득했다. 이렇게 녹록지 않은 날들이 지나 재판일이 되었다.

 

재판정에는 피고인이 된 피해자를 지지하기 위해 법원을 찾아준 여성단체 분들도 많았지만, 박유천이 억울하게 무고와 명예훼손을 당하였다며 그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해 온 팬들도 많았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대법정이 자리가 부족할 정도였다. 사람으로 가득한 법정이었지만, 피해자와 단둘이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안면인식 장애가 있어서, 피해자를 지지하러 온 이들과 상대방을 지지하러 온 이들을 구분하지 못해, 쉬는 시간에 화장실 갈 때마다 아무나 보고 벙싯거렸다가 민망해지기도 했다. 사람들의 첨예한 관심과 믿음이 부딪히는 시공간이다 보니 변호사도 평정심을 유지하기 쉽지 않았지만, 피해자는 꿋꿋하게 잘 버텨냈다.

 

이날 증인으로는 박유천을 비롯해서 상담사나 언론종사자 등 여러 사람들이 출석했다. 박유천에 대해서만 4시간 가까운 증인신문이 있었다. 나는 한때 팬심으로 접했던 사람을 법정에서 상대방으로 만나 신문하게 되었다. 그런 소회를 전하며 증인신문을 시작했다. 이날 피해자의 무죄를 입증해 준 1등 공신은 단연 박유천이었다. 긴 질의응답 속에서 피해자가 고소한 성폭행 사건 당시 피해자가 이를 원하였거나 동의하에 성관계를 하였다고 보기 어려움은 진즉 소명되었다. 그에 대한 4시간의 증인신문을 마치고도 여타 절차가 남아있었지만 초조함이 가셨다. 변호사가 돼서 처음 경험하는 국민참여재판은 종일 당황스러운 일들 투성이었지만, 당연한 결론에 가닿을 것이란 믿음이 생겼다. 그 믿음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곧 실현됐다.

 

배심원들의 평결은 ‘피해자가 딱하니 그 정도는 봐주자’는 온정주의에 따른 것이 전혀 아니었다. 배심원들도 재판부도 ‘피해자가 무고를 하지도,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다’라는 취지를 분명히 하여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은 새벽에 끝났지만, 함께 연대했던 수많은 여성운동가분들이 법정에 남아있다가 판결을 들었고 도열하여 박수를 보내주셨다.

 

피해자에 대한 책임감으로 사건을 맡았던 날부터 내내 마음 한 켠이 먹먹했고,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며 이 사건이 당연한 끝을 못 보고 끝나면 어떡하나 어깨가 묵직했다. 처음 경험하는 절차 속에서 사건을 이고 지고 관통하느라 심신이 노곤했다. 그러나 무죄가 선고되고, 피해자와 함께 법정을 나와 연대해 준 이들이 보내주는 갈채를 받은 것은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의 순간이었다.

 

피해자는 한 사람이라도 더 진실을 알기를 원했다

 

1심에서 무죄가 판결됐다고 다 끝이 아니었다. 그간 피해자가 무고 범죄를 저질렀다는 누명과 낙인을 해소할 만큼의 보도가 부족했다.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되고 항소심으로 넘어가자, 우연인지 알 수 없으나 재판 관련 보도가 있는 날마다 박유천과 ‘재벌 3세’라는 여성 간의 스캔들 기사가 쏟아졌다. 항소심 결심일에 온 모 연예매체 기자들이 판결일에 박유천이 결혼을 할 거라며 무죄 선고 소식이 다시 한번 묻힐 수 있다고 언질을 줬다.

 

“우리 항소심 판결 선고일에 기자회견 할 건데요. 기자회견 한다고 보도해 주십시오.”

 

피해자에 대한 무죄 선고 보도가 또 묻히겠다는 다급함에 일단 이렇게 말했다. 피해자의 억울함에 대한 보도가 나는 날이면 박유천의 스캔들 기사로 묻혔는데, 이날 처음으로 피해자 측이 항소심 판결일에 기자회견을 한다는 보도가 스캔들 기사를 압도했다.

 

기자회견을 한다고 일단 말을 했지만, 사전에 결정된 것도 아니었고 이렇다 할 계획도 없었다. 그렇지만, 말은 그 자체로 힘이 셌다. 기자회견을 한다고 말을 해놓고 나니, 사람들이 우리가 기자회견을 한다고 떠들어댔고, 그러니 기자회견이 당연한 수순처럼 여겨졌다. 누구보다 피해자가 원했다.

 

즉흥적으로 촉발된 기자회견 이야기에 내부적으로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 상황에서 피해자가 기자회견장에 직접 나와 얼굴은 가리되 직접 소회를 전하고자 했다. 성폭력 피해자가 직접 언론 앞에 나서는 것은 그때만 해도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피해자가 2차 피해를 입을 것을 걱정하는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기자회견일 전날 아침까지도 우리 사무실에서 피해자가 참석하는 기자회견을 할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여러 의사가 합치되지 못한 채 자리가 마무리됐는데.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던 피해자가 부랴부랴 다시 돌아왔다. 피해자는 항소심 판결일에 꼭 기자회견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자기가 소회를 직접 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고민 끝에 피해자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자비로 대관료를 지불하고 부랴부랴 보도자료를 만들어 돌리고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그렇게 항소심 선고일에 차단벽 뒤에 앉은 피해자와 둘이 앉아 기자회견을 했다. 피해자가 원한 것은 자신이 입은 피해가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려지는 것이었다. 그 바람은 그날 절찬리에 이루어졌다.

 

2017년 2월에 시작해, 그해 9월 항소심에서 무고죄 등에 대한 무죄가 선고되기까지는 6개월여에 불과했지만, 숨 가쁘고 빼곡한 날들이었다. 누군가는 내게 ‘사람을 구했다’고도 하고, ‘정의를 세웠다’고도 말했다. 그렇지만 그 기간과 과정은 내게 그간 배우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는 학교 같은 것이었다. 변호사가 되고 개업을 한 후 성폭력과 성차별 사건들을 주로 다뤘지만, 내가 어떤 방향을 향해 걷고 싶으며 왜 그 방향인지는 모호했다. 누군가 이런 걸 물어보면 그럴듯하게 답해왔지만, 실상은 주어진 사건들을 열심히 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알게 되었다. 내 바람은 대단히 진보적인 기치를 내세워 큰 정의를 실현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당연한 가치를 따라 걷는 것이다.  나도 누군가의 삶에 기여하겠지만, 내 삶 역시 그들로 인해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변호사임을 만끽하는 시작점이 되었다.

 

[필자 소개] 이은의. 2014년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후, 서울 서초동 법원검찰청 코앞에 <이은의 법률사무소>를 열고 지금까지 여러 성폭력, 성차별 사건들을 다뤄왔다. 특별한 정의와 굉장한 진보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당연한 일들이 당연하게 처리되는 세상을, 합리적인 사고와 담론이 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어느새 9년째 말하고 글 쓰며 싸우는 최전방에서 세상을 계속 배워가는 중이다. 저서로 『삼성을 살다』, 『예민해도 괜찮아』, 『불편할 준비』, 『상냥한 폭력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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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2022/07/22 [18:01] 수정 | 삭제
  • 상대 동의없이 성행위 하면 안되는 거 왜 상식이 못될까.. 피해자들이 너무 큰 걸 감당하게 된 것 같아요. 변호 맡아 준 분이 이은의 변호사라서 다행이었던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 ㅇㅇ 2022/07/20 [13:06] 수정 | 삭제
  • 역고소 당할까봐 피해자가 고소를 두려하는 지금 상황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거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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