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쓰레기봉투를 묶는다. 2인 가구에서도 쓰레기는 매번 무지막지하게 발생한다. 쓰레기를 줄이고자 뭐라도 해본다. 샴푸 대신 샴푸바 사용하기, 휴지 대신 행주 사용하기 등등 실천은 하지만 그래도 쓰레기는 늘 한 바가지씩 쏟아진다.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 날이면 언제 또 이만큼 썼냐 싶을 만큼의 쓰레기가 봉투를 가득 메운다. 쓰레기를 만드는 삶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삶 자체가 쓰레기로 다가오기도 한다.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2000)에는 무언가를 줍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하고 밭을 뒤지기도 한다. 그들이 뒤져서 건져낸 것은 쓰레기가 아니다. 누군가는 쓰레기라고 생각하고 버린 것임이 분명한데 그들이 줍는 순간 그것은 쓰레기가 아니게 된다. 예술품이 되기도 하고 식량이 되기도 하고 인테리어 소품이 되기도 한다.
과소비의 시대
바야흐로 과소비의 시대다. 환경오염, 기후위기 뉴스가 매일 같이 경종을 울리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가닿지는 않는 듯싶다. 서울 시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한 적이 있었다. 점심 시간대여서 점심을 먹고 나온 직장인들을 대거 마주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플라스틱 일회용 잔에 담긴 음료를 들고 있었다. 한 쪽에서는 텀블러가 대량 생산되어 문제를 일으키고 또 다른 쪽에서는 여전히 플라스틱 쓰레기가 난무하고 있다. 다른 세상에 와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른 세상이 아니다. 같은 세상이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우리는 계속해서 미래에 쓰레기를 버리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미래의 쓰레기통은 이제 가득 차고 넘치고 있다. 이런 사태에도 공장에서는 쉴 새 없이 새것들을 만들어 내고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는 상품들은 쉽게 버려진다.
버려지는 이삭들
영화 속에는 감자 밭이 나온다. 상품성이 있는 감자들만 가져가고 남은 감자들이 어마어마하다. 이삭 줍는 사람들이 모인다. 각자의 바구니를 들고 와 먹을 수 있는 감자들을 골라 가져간다. 그렇다. 먹을 수 있는 감자들이다. 하지만 마트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감자들이다. 조금의 하자가 있다는 이유로, 크기가 조금 작거나 크다는 이유로, 모양이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버려지는 감자들이다. 몇 톤의 감자가 이런 식으로 버려진다고 한다. 감독은 하트모양 감자를 줍는다. 감독도 줍는 사람의 대열에 합류한다.
감독은 단지 하트모양 감자만 줍지 않는다. 감독은 버려지는 물건들뿐만 아니라 버려지는 이미지를 줍는다. 촬영 중 깜빡하고 카메라를 끄지 않은 장면이 있다. 그때 렌즈 뚜껑이 덜렁 거리는 장면이 그대로 찍혔다. 누군가는 버렸을 이미지이다. 하지만 감독은 렌즈가 춤을 추는 장면이 찍혔다며 버려질 이미지를 줍는다. 감독의 이삭줍기는 영화 내내 계속된다. 그것이 물적인 이삭이든 이미지적인 이삭이든 간에 말이다.
‘어글리어스’라는 플랫폼이 있다. 판로가 없거나, 하자가 조금 있다고 해서 ‘상품성 미달’을 받은 버려질 채소들을 배송하는 시스템이다. 2주에 한 번 배송을 시키고 있는데 항상 종이 한 장이 함께 온다. 채소들의 사연이 구구절절 적혀있다. 조금 휜 오이가 있고, 약간 작은 감자가 있다. 긁힌 자국이 있는 피망과 가지가 있고, 조금 큰 상추 등이 있다. 맛과 신선함은 그대로다. 하지만 저마다의 이유로 마트에는 진입하지 못하였고 버려질 운명에서 이삭을 줍는 사람들에 의해 멋진 식료품으로 재탄생한 채소들이다. 깨어지거나 흠이 나서 못 쓰게 된 물건을 ‘파치’라고 한다. 파치 식품들을 파는 개인 농부들도 많이 있다.
쉽게 버려지는 것들에 대한 감독의 추적은 계속된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을 발견한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감독은 카메라를 가져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쓰레기통을 뒤져서 음식물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유통기한 하루가 지난 음식 등을 가져다 요리해 먹는다. 유통기한은 소비기한과 달라,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도 소비기한에 따라 식용 가능 날짜가 다르다. 예를 들면 두부는 냉장 보관하면 유통기한에서 90일이 지나도 식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쉽게 이를 버리고 어떤 이들은 이를 주워 끼니를 때운다.
식료품을 줍는 이들은 주로 식당 앞을 서성인다. 하지만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 식당 또한 존재한다. 남은 식재료들은 각각 다른 용도로 재활용된다. 식료품을 줍는 요리사도 있다. 그의 주방에서는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방법도 있다는 것을 감독은 세세하게 담는다.
버려지는 식료품, 물건, 이미지 그리고
촬영 중간중간 감독은 자신의 개인적인 영역으로 빠진다. 자신의 늙어가는 손을 찍고 늘어나는 흰머리를 찍는다. 갑자기 왜 감독은 자신의 모습을 찍어 보여 줬을까? 감독의 장난기 때문일까? 나의 견해는 다르다. 감독은 버려지는 것들을 모두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나이 듦 또한 버려짐의 영역 중 하나일 것이다. 버려지는 식료품, 물건, 이미지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버려지는 늙음 또한 감독은 버리지 않았다. 감독은 자신의 장난기 또한 버리지 않는다. 지나가는 화물차들을 촬영하며 손으로 잡아 감추는 장난을 친다. 저 화물차들은 엄청난 생산품들을 싣고 달릴 것이다. 그 과정을 잠시라도 멈추고 싶었던 것처럼 감독의 의미심장한 장난이 스크린을 메운다.
버려지는 것은 가전제품도 많다. 한 아티스트는 버려지는 냉장고들을 모아 인테리어 제품으로 재활용했다. 한 쪽에서는 계속 줍고 한 쪽에서는 계속 과한 생산을 하고 한 쪽에서는 계속 버린다. 이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인터뷰이의 시선, 관객의 자리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답변자(인터뷰이)들은 대체로 질문자(인터뷰어), 즉 감독을 본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을 봄으로써 관객은 질문자와 답변자에서 조금 동떨어진 제3자로 영화를 보게 된다. 바르다 감독의 영화에서는 종종 답변자들이 카메라 렌즈를 응시한다. 이는 우리가 광고를 보는 듯한 효과를 주기도 한다. 관객에게 직접 말하는 이 시선을 통해 우리는 이 과소비와 줍는 문제에 대해 한 발 짝 떨어져 볼 수 없다. 감독의 자리에 관객을 앉히기도 하는 이 효과를 통해 관객은 스스로가 질문을 품었던 것 같은 착각을 경험할 수 있다.
이 시선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은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바르다 감독이 얼굴 바짝 카메라를 대고 있었을 것, 다음은 의도적으로 감독이 답변자에게 부탁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다른 답변자들과 다르게 갑자기 화면을 보며 말을 하는 답변자들은 귀여워 보이기도 한다. 살짝 어색함이 자아낸 귀여움이다. 이 다중의 효과를 통해 감독은 재치를 잃지 않으며 관객을 문제 안으로 직접 끌어들인다.
바르다 감독은 본래 픽션과 논픽션을 오가는 천재로 유명하다. 두 가지 다른 장르를 결합시켜 하나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쾌감을 선사한다.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는 완벽한 논픽션 다큐멘터리 영화다. 하지만 두 가지 결을 오가는 것은 분명하다. ‘이삭 줍는 사람들’의 세계와 ‘나’, 즉 감독의 세계다. 감독은 영화 중간 자신의 개인적인 모습을 넣음으로써 카메라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두 세계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끝내는 보여준다.
감독은 결국 줍게 된다. 이미지, 장난기, 하트감자 말고도 초침이 없어 버려진 시계를 줍는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 인테리어로 놓는다. 초침이 없는 시계도 근사하다는 감독의 나레이션이 나온다. 장르를 통합시키던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다른 두 세계를 통합시킨다.
버려지는 것들에 대해 영화 중간중간 랩이 등장한다. 영화의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랩은 관객들이 기대하는 노년 여성 감독의 영화와는 새삼 다른 결일 것이다. 그 충격의 힙합은 다시 한번 바르다의 천재성을 드러낸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시작한 랩은 영화 후반부에 가자 감독의 목소리로 바뀐다. 노년 여성 감독의 환경에 관한 랩을 들으며, 버려뒀던 내 힙합에 관한 애정을 다시 주울 수 있었다.
이삭와 쓰레기의 차이점
영화가 후반부에 치닫을수록 이삭과 쓰레기의 차이점을 분간하기 어렵다. 이삭만 골라내던 감자 씬에서 이제는 파장한 시장을 뒤지고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이미지로 달려간다. 어디까지가 이삭인 걸까. 어디까지가 쓸모이고 어디까지가 쓰레기인 걸까. 어디까지가 상품이고 어디까지가 파치인 걸까. 세상은 너무 좁게 쓸모를 규정 짓는다. 그 얄팍한 정의는 수많은 이삭들을 버려지게 만든다. 비단 물품에만 한한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요구되는 각종 ‘정상성’을 수행해야만 쓸모 있는 인간으로 취급을 받는다.
바르다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은 이삭을 줍는 것과 같다.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사람들을 집요하게 쫓아가 이미지를 줍는다. 그리고 이로써 과소비 과대 생산 사회에 저항한다.
중고 거래 어플리케이션인 당근마켓이 엄청난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버릴, 나에게 필요 없는 물건을 내놓았다. 중고 거래가 붐을 일으켰고, 이사를 가기 전 필수 과정처럼 사람들은 ‘당근’을 했다. 이 또한 이삭을 줍는 행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너무 많이 생산되고 있고 너무 많이 버려지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더 주울 수 있을까. 얼마나 덜 버릴 수 있을까. 하루라도 버리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떨어진 이삭 한 알이라도 주울 수 있을까. 둘러보면 이삭이 너무나도 많다.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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