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 사회가 돌봄에 얼마나 취약한지 여실히 드러내었고, 서로 돌보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돌봄 사회를 위하여,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돌봄 현장을 조명하고, 다양한 돌봄의 경험과 아이디어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무사히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어릴 때 가끔씩 내가 과연 무사히 어른이 될 수 있을지 걱정을 하곤 했다. 아이들은 어른의 돌봄을 받고 자라면서 서서히 자신을 돌보는 사람을 돌보는 존재로 자라난다. 어깨를 주무르고, 수저를 놓고, 가게 심부름을 한다.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나도 가끔 그러긴 했지만, 심부름은 주로 동생들 몫이었다. 아이들과 어른들의 돌봄 관계는 일방적이기보다 쌍방적이며, 시소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내가 앉은 시소는 영 둔하게 움직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돌봄에 참여하고 싶어 기회를 노리곤 했다. 잽싸게 수저통을 잡아 식탁에 수저도 놓아보고 싱크대를 선점해 설거지를 독점해 보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 일을 쟁취해 내지 않는 한, 노동력으로 인정되기는 어려웠다. 이런 나의 입지는 불안정해 보였고, 돌본다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기에 내가 무사히 어른이 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성인이 된 후에는 새로운 관계의 형태를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가족 안에서 내가 받는 돌봄과는 다른, 좀 더 평등하고 새로운 형식의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실험해보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크면 독립을 하겠다고 종종 떠들고 다녔다. 현실적으로 일상 활동에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실현하기 쉬운 계획은 아니어서 한참동안은 그저 말뿐인 계획이었다. 그러다 실제로 독립을 감행하게 된 건 서른한 살 때였다. 전보다 더 돌봄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나도 돌볼 수 있다는 믿음
이십대 후반, 내 몸의 변화가 찾아왔다. 팔, 다리, 허리 등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균형이 맞지 않고 힘이 한쪽에 쏠리며 강직이 있는 몸이다 보니 올 것이 온 셈이었지만, 어쨌든 겁이 좀 나긴 했다.
이 새로운 상황에 대해 내게 필요한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나 책은 없었다. 다들 아프면 죽거나 낫거나, 그것도 아니면 타인의 돌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수동적 존재가 될 거라고만 생각했다. 아픈 것도, 의존하는 것도 공포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기껏 내놓는 대안은 안락사 정도였다. 이 중에서 내가 적용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통증은 내 몸의 새로운 특성이 되었다. 일종의 새로운 룸메이트인 셈이었다. 맘에 드는 녀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날 죽이러 잠입한 연쇄살인마는 아니었다. 날 꽁꽁 묶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묶어놓는 강도도 아니었다. 난 그냥 녀석과 함께 내 삶을 살면 되는 거였다.
사실은 전혀 생소한 과목의 시험지가 내 앞에 놓인 기분이었다. 수많은 문제 중에 난이도가 제일 높아보이는 것 중 하나가 돌봄에 관한 부분이었다. 나는 아프지 않을 때보다 추가적인 돌봄을 받아야 할 텐데, 반대로 내가 누군가를 돌볼 여력은 더 줄어드는 게 아닐지 불안해졌다. 하지만 적어도 후자는 아니라고 믿었다. 몸이 아파도 대개 삶은 지속되며, 삶이 지속되는 한 나는 누군가로부터 돌봄 받을 뿐 아니라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존재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결국 해보기로 했다. 내 몸 그대로 가족이 아닌 누군가에게 돌봄 받고, 또 돌볼 수 있다고 믿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집을 나왔다.
공동체 생활, 민폐 끼치는 연습
몸의 취약성을 직면했을 때 독립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혼자서도 잘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참에 가족이 아닌 다양한 사람과 상호의존하며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그리고 나 또한 그 누군가를 돌보며 살 수 있다는 걸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다. 질병과 장애를 가진 다양한 몸들이 혈연가족을 초월한 돌봄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일상의 많은 부분을 타인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조건은 나를 오랫동안 머뭇거리게 했다. 쓰레기봉투 묶기, 손발톱 깎기, 상처에 반창고 붙이기, 국이나 물 같은 액체류를 흘리지 않고 옮기기…… 모두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다. 결국 나는 누군가와 함께 살거나 최소한 믿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과 가까운 곳에 살아야 한다. 그래도 돌봄이 필요하다는 말이 독립을 할 수 없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닐 거라 믿었다.
마침 다니는 교회에서 만든 마을공동체가 있어서 그리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무턱대고 들어간 마을에서 교회 안의 다른 비혼 여성들과 4년여를 함께 살게 되었다. 집이 필요해서, 혹은 공동체와 살고 싶어서 동거하게 된 룸메이트들은 예민한 부분도, 성격도, 상황도 모두 달랐다. 2030이란 유동적인 나이대였으므로 멤버 변동도 꽤 자주 있었다. 새로운 룸메이트가 들어올 때마다 우리는 긴장했다. 새로운 조합으로도 과연 같이 잘 살 수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살면서 우리는 교회에서 배운 한 문장을 계속 기억하려 애썼다.
“서로 민폐를 끼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내가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동거할 수 있는 용기를 내는 데 가장 결정적인 힘을 준 문장이다. 혼자 스스로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없음을 인정하라는 문장, 기꺼이 서로 돌보고 또 돌봄 받으며 살자고 초대하는 문장이다. 이 문장을 공유하는 관계에서는 나도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필요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장애가 없는 룸메이트도 주저하지 않고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돌보는 역할에 굶주려 있던 나는 할 일이 주어지면 신이 나는 어린 아이와 같았다. 쓰레기를 버려야 하는데 다들 퇴근 후에 등을 바닥에서 떼고 싶지 않아 눈치만 보던 밤, 하루종일 집안에서 일한 내가 바람이라도 쐬고 싶어 몸을 일으켰다.
“봉투 묶어줘. 내가 내려갔다 올게.”
친구는 씨익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내가 일어나면, 차마 나를 시킬 수는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켜 나를 제지했을 것이다. 나는 괜히 나섰다는 민망함을 삼키며 하릴없이 주저앉았겠지. 그런 관계에선 편견으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딱딱한 ‘에티켓’ 이상을 기대할 수 없고, 나의 필요를 말하기도 쉽지 않다. 그 사람에게는 나의 필요보다 장애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관념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룸메이트들은 나라는 고유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알았다. 그 정도 투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간이 쌓인 우리의 집에는 장애인과 그 옆에선 언제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비장애인이라는 돌봄의 위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 서로를 나를 돌보는 자로 인정하는 것. 우리 사이에 형성된 돌봄의 모습이었다.
돌봄의 가능성을 묻다
사실 우리가 타인의 돌봄을 받아들이기란 여간해서는 쉽지 않다. 평생에 걸친 ‘민폐를 끼치는 연습’이 필요할 정도로. 룸메이트들과 서로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고 가끔씩 투정도 부리는 사이가 되어도, 내가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돌봄의 한계는 엄연히 존재했다. 본가와의 거리가 많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내 밥상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바쁘거나 아플 땐 주로 본가에 가 있었다. 딱 한 번 밤중에 통증이 심해져서 응급실에 가야 했을 때도 친구들이 아닌 엄마를 깨웠다. 응급실 행이 처음이 아니었다면 혼자 택시를 탔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사실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에서는 서로의 감정과 노동에 대해 고민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활동지원서비스를 이용하는 장애인들은 돌봄 받는 순간의 힘든 감정과 관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을 고려해 돌봄 받는 정도와 활동지원인과의 관계를 세밀하게 조정한다.
우리가 복잡한 존재인 딱 그만큼 돌봄을 주고받는 문제도 복잡하다. 하지만 그러한 복잡함과 어려움이 서로 돌보고 돌봄 받는 삶의 불가능성을 증명한다고 절망하기는 조금 이르다. 오히려 우리가 상대에 대해 그리고 서로와의 관계에 대해 얼마나 깊이 생각하는 존재인지 보여주는 증거일 수도 있다. 당시 나는 친구가 낮에는 고생하고 밤에는 잘 잠들지 못하는 걸 잘 알기에 친구를 깨우지 못했다. 의존하는 사람은 그의 몸을 떠받치는 사람의 몸을 걱정한다.
책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조한진희는 신문에 연재한 글에서 ‘역방향 돌봄’에 대해 소개했다.(“나는 돌봄노동자에게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한겨레, 2021년 3월 13일) 그는 친구였던 중증장애인 주영이 어떻게 자신을 돌보는 사람들을 돌보는지 묘사했다. 주영은 돌봄인들 간에 노동량이 공평하게 돌아가도록 일을 신경 써서 배분했다. 누군가 자신의 몸을 들어 옮겨야 하는 경우에는 옮기는 사람이 최대한 덜 힘들도록 호흡을 조절했다. 주영의 이야기는 돌봄을 받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순간에 어떻게 상대를 돌보는지 보여준다.
물론 나는 돌봄 받아야 할 순간마다 회피하고 싶고, 돌봄 받는 이의 마음을 알기에 도움의 손길을 쉽사리 뻗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나는 평생 운동화끈이 풀어질 때마다 누군가를 붙들고 발을 내밀었다. 하지만 아직도 매번 끈 풀린 운동화를 신고 내가 불러세운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서로의 마음을 더 자주 짐작하게 될수록, 결국은 질문하게 된다.
‘과연 우리는 돌보고 돌봄 받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의 마지막 시간, 돌보고 돌봄 받다
‘역방향 돌봄’은 돌봄 받는 사람이 주체적으로 행하는 돌봄이다. 그래서 아이를 돌보는 동안 아이의 웃음소리와 손짓이 우리를 돌보는 순간과 역방향 돌봄은 분명 그 의도성 면에서 구분되어야 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돌봄 관계가 형성되면, 돌봄 받음을 통해 돌보는 주체가 되고 돌봄으로써 돌봄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내 제한적인 경험으로나마, ‘돌보는 동안 돌봄받는다’는 말이 단순한 수사만은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어느날 할아버지와의 이별이 성큼 다가왔다. 서서히 힘을 잃어가시던 할아버지는 어느 새벽 침대에서 일어나셨다가 그대로 주저앉으셨다. 나는 자취집에서 새벽에 택시를 탔다. 그 후 할아버지가 하늘로 떠나시기까지 40여 일간 가족들이 돌아가며 할아버지의 침대맡을 지켰다. 할아버지는 생존에 필요한 거의 모든 활동을 타인에게 오롯이 맡기실 수밖에 없었다.
식구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저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조금씩 달랐지만, 자녀들과 손주들은 우리가 무사히 자라날 수 있었던 울타리를 기억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만큼 그의 곁에 머물고자 했다.
할아버지는 내게도 특별한 분이었다. 내가 어릴 때 할아버지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꼬박꼬박 차를 몰아 나를 재활병원에 데리고 다니셨다. 나는 성인이 되어 나이가 들어가고 할아버지의 몸은 계속 약해져 갈 때도, 할아버지는 방송에서 배운 운동을 직접 시범 보이시며 내 건강을 챙기셨다. 그렇게 나는 할아버지 몸의 움직임이 제한되어 갈 때도 그의 돌봄을 받았다.
거의 전적으로 타인에게 몸을 맡겨야 했던 기간 중에 할아버지가 누군가를 챙기려 하시는 순간이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척의 가족들 안부를 묻기도 하고, 계속 침대맡을 지키는 딸을 쉬고 오라며 보내기도 하셨다. 하지만 그 기간 중에 우리 가족을 돌본 것은, 혹독하기까지 한 돌봄의 시간 중에 아주 간혹 있는 그런 순간만은 아니었다.
우리 가족 누구도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허투루 보내기를 원치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손 떨림이 있는 내가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 사람과 접촉하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었지만, 어쨌든 나도 할아버지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다.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도. 뜻밖에 내게도 일이 하나 주어졌는데, 바로 할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있는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팔을 움직이시면 탈수를 막는 링거 바늘이 빠져 대형사고가 날 수 있었다. 결국 거의 24시간 내내 누군가 할아버지의 팔을 옆에서 지켜야 했다. 나는 고작 한나절 정도 할아버지의 팔을 지켰지만, 내게는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시간이자, 돌봄노동의 무게를 경험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전통적으로는 ‘작게라도 보은할 기회를 얻었다’고 표현하겠지만, 이 문장은 그 순간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나와 우리 가족은 고된 노동으로 점철된 시간이었을지라도, 우리에게 그 시간이 허락되었음에 감사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시간은 ‘은혜를 갚는’, 밀린 숙제를 해버리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동안 가족 내에서 돌봄 주체로 인정받지 못한 내 한을 풀 기회도 아니었다. 그날들이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해도, 그 시간 속에서 할아버지와 우리, 할아버지와 나, 할아버지와 각자의 관계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계속되는 통증 속에서도 내게 사랑의 말을 속삭여주길 기대하고 그의 옆에 머무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할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있는 것, 할아버지는 아픔을 표현하고 나는 그가 통증을 느끼는 부위를 찾아 쓰다듬는 것으로 그 시간 우리는 서로를 돌볼 수 있었다. 그 경험을 통해, 할아버지가 돌봤던 어린 나도 그 순간 할아버지를 돌봤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을 포함해, 생을 마감해가는 할아버지 곁에서 보낸 이 시간이 앞으로 오래도록 나를 지탱해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돌봄 받고 있었다.
감당할 만큼의 기간 동안만 할아버지를 돌보며 이별을 준비할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물론 외면할 수 없는 돌봄노동의 구체적 무게를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무리 거부하고 싶어도 점점 더 많은 돌봄에 의존해야 하는 사람의 정신적 고통도 옆에서 지켜봐야 했다.
우리는 할아버지의 존엄을 제대로 지켜드린 걸까? 그 시간을 보낸 후, 혼자 움직일 수 없고 누군가 내 얼굴과 몸을 닦아줘야 하는 때를 상상하기는 더 막막해졌다. 돌보는 것도 돌봄 받는 것도 더 어렵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할아버지와 보낸 시간이 함께 한 모든 이를 지탱해줄 거라는 것도 진실이었다. 그 시간의 무엇이 우리의 속을 보듬고 채웠다는 것, 우리를 돌보았다는 것, 돌보고 돌보아지는 것이 모두 극도로 고통스럽다는 것 모두가 진실이었다.
나와 너의 존엄을 지키기 위하여
돌보는 사람과 돌봄 받는 사람이 함께 있는 공간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매번 돌봄의 불가능성을 실감한다. 돌봄 받고 돌보는 수많은 방법을 숙고하고 또 시도하는 과정은 계속해서 다른 장애물을 만난다. 계속 공부를 하고 대화를 시도해 보아도 어떻게 살고 아프고 죽을지 답을 내리기는 어렵고, 끝까지 나와 너의 존엄을 지킬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다.
다만 오늘 존중하며 돌보고 돌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옆에 있음에 약간 안도한다. 물론 서로의 살결을 만지며 서로를 돌보는 사이일지라도,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알 수도 다 해결할 수도 없다. 너와 나를 존중하고 보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돌봄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 정도다. 돌봄노동의 고통을 인정하면서도 돌봄받는 고통 또한 간과하지 않기 위해 서로에게 계속 말을 걸기를, 표현되지 않는 마음을 읽기 위해 눈을 마주보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딱 그 정도지만, 오늘도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손을 다시 한 번 고쳐 쥘 수 있다.
[필자 소개] 박은영. 공부하고 글쓰는 장애여성. 장애인으로서 비장애인과 함께 살아온 삶을 엮어 책 《소란스러운 동거》(IVP)를 냈다. 사회단체 다른몸들 산하 모임 '질병과 함께 춤을'에서 5년째 다른 아픈 여성들과 함께, 다양한 몸을 가진 이웃들이 동등하게 존중받으며 함께 사는 길에 대해 수다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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