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가족부 폐지’에 맞서는 유쾌한 페미니스트들[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지속가능한 여성운동을 위하여※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과 공격이 심각한 백래시 시대,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로 다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스무 편이 연재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여성가족부가 없어진다면?
올해 1월, 대선 정국에 등장한 일곱 글자 공약. ‘여성가족부 폐지’, ‘무고죄 처벌 강화’. 성차별 문제에 이렇게나 무지한 공약이 있을 수 있나 많은 분이 놀랐을 듯싶다. 그런 공약을 내걸었던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병사 월급 인상’, ‘코로나19 피해 소상공인 지원’ 등 다른 공약은 폐기하겠다는 입장 속에서도 여성가족부 폐지에는 굳건한 행보를 보였다. 대통령 당선 직후인 3월부터 5월, 수차례 기자회견을 통해 여성가족부 폐지 입장에 변화가 없음을 공표하고, 이에 한 국회의원은 여성가족부를 폐지하는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급물살을 타던 정부의 여성가족부 폐지 입장이 지방선거로 인해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서는 듯 했으나, 지난 7월 25일 윤석열 대통령이 여성가족부 장관에게 여성가족부 폐지를 조속히 추진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최근 지지율이 떨어지자 여성가족부 폐지에 호응했던 지지층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수순으로 보인다. 태생부터 수많은 위기를 겪어온 여성(가족)부가 정말 폐지될까? 폐지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여성가족부가 폐지되어도 산하 여러 사업이나 여성폭력피해자 지원 사업이 바로 폐기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무 부처가 ‘성평등’의 관점에서 이를 추진하지 않게 되면 그 힘을 잃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일곱 글자로 축약된, 성폭력 무고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다는 정책은 성폭력 피해 신고가 다른 범죄보다 ‘가짜 신고’가 많을 것이라 단정한 관점에서 비롯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2017~2018년 검찰의 성폭력 범죄 사건 중 무고죄로 기소된 피의자는 0.78%, 그 중에서도 유죄로 확인된 사례는 6.4%에 불과했다는 국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성범죄의 허위 신고는 매우 드문 셈이다.
오히려 피해자들은 ‘진짜 성폭력’을 선별하겠다는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수사기관이나 주변인 등으로부터 수많은 2차 피해를 겪고 있다. 그런데 국민을 범죄로부터 보호해야 할 정부가 이러한 관점으로 피해자 지원 제도를 운용하게 된다면,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적인 피해자 보호 제도가 유명무실해질 가능성이 크다.
한편, 가정폭력 피해자 지원 사업은 현재로서도 문제가 많다. 가정폭력으로 쉼터에 입소한 피해자들은 자산 상황에 따라 차등적인 지원을 받는다. 가정폭력 피해자는 본인의 생활 공간에서 긴급히 탈출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산이 있더라도 그에 대한 권리를 제대로 행사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자산 상황을 따지는 복지 제도가 아닌, 범죄 피해를 입은 데에 대한 보호 제도는 다르게 설계되어야 하지만, 아직도 바뀌지 않고 있다.
현실이 이러할진대, 이러한 정책의 주무 부처가 여성가족부가 아닌 법무부나 보건복지부로 바뀐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진짜 피해자’를 선별하겠다는 관점으로 절차 등이 더욱 까다로워지거나, ‘복지 혜택’으로서의 관점이 강화되어 범죄의 특성을 간과한 차등적인 지원 정책이 더욱 일반화될 것이 우려된다.
결국, 성평등의 관점에서 피해자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현 제도는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정책의 컨트롤타워가 다소 부족하나마 여성가족부인 데에는 의미가 크다. 그럼에도 여성가족부가 역사적 소명을 다했다고 하다니, 여성의 현실을 외면한 채 지지율만 계산한 무책임한 정치에 제동을 거는 일이 필요했다.
정권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여성인권운동
내가 활동하고 있는 한국여성의전화는 ‘여성가족부를 폐지해선 안 되며, 오히려 현재의 여성가족부보다 더 강력한 성평등 추진체계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냈다. 또 이를 골자로 하여 4월에 전국적으로 회원 교육사업 <윤석열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더 강력한 성평등 추진체계로 바로잡기>를 열어 담론을 만들어갔다.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성폭력 등 여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단체와 기관들이 ‘여성폭력피해자지원 현장단체연대’를 구성하여, 항의 집회와 기자회견도 열었다. 정권 초기에는 인수위원회를 찾아갔고, 우여곡절 끝에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는 여성가족부 장관이 임명된 뒤에는 장관을 만나 새 정권에 여전히 구조적으로 존재하는 성차별의 현실을 바로 알리고자 노력했다. 1월부터 최근까지 수많은 논평과 입장문을 통해, 현실에 분노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알리고자 애썼다.
여성운동단체에서 활동을 해오면서, 정부가 바뀔 때마다 성평등 정책에 대한 기조도 변화하는 것을 보아왔다. 여성의 현실에 대해 무지한 것은 대동소이하나, 시늉이라도 하려고 하는 것과 아예 무시하는 것 정도의 차이는 있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지난 40여 년간 여성 인권에 관한 제도가 없을 때부터, 그 존재가 위협을 받을 때에도, 페미니즘이 한국 사회에 다시 뜨겁게 호출된 최근까지 ‘여성폭력 없는, 성평등한 세상’이라는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활동해왔다. 2022년의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활동가들은 정부의 기조와는 상관없이 조직의 독립성을 지키며 한결같이 활동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입을 모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나 기업에 의존하지 않는 ‘재정 자립’을 이루는 것이 필요했고, 우리의 뜻에 함께하는 시민들을 더 많이 만나고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했다.
최근 한 회원은, 많은 사람들이 여성가족부가 폐지된다는 게 내 일상에 어떤 변화로 나타날지 잘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얘기했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함께 헤쳐나갈지 실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주었으면 하고 말하는 회원도 있었다. 모두의 문제의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 한편, 피부에 와닿는 소통 방식이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올해 한국여성의전화 39주년 생일을 맞아 재정 자립을 위한 후원 행사를 기획하고 있었는데, 전체 회원들에게 행사를 알리는 전화 통화를 할 겸 ‘여성가족부 폐지’ 이슈에 대해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았다. 정치적 백래시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후원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긴 통화를 하면서, 혹시 후원 요청이 실례가 될까 봐 걱정도 되었지만, 많은 회원들이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셨다. 이제 이 뜻을 잘 전할 수 있는 행사를 꾸릴 차례였다.
백래시에 맞서는 힘은 만남과 연대, 후원이다
사실 여성운동에 대한 백래시는 언제나 있어왔지만, 노골적이고 조직적인 백래시가 심화되는 상황 속에서 우리의 운동에 함께할 사람들을 어떻게 만날지 고민이 많았다.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 만남에 익숙해진 와중에 오랜만에 다시 열린 오프라인 행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며 맞닥뜨린 경제적 어려움으로 어쩔 수 없이 후원을 중단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진 이때, 어떤 참여의 장을 만들 수 있을까? 백래시에 대한 피로감, 그로 인한 고립감이 커졌다고 말하는 회원들에게 어떤 응원과 위로를 전해줄 수 있을까?
힘든 때일수록 더욱 유쾌하고 신선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싶었다. 딱딱하고 위계적인 행사가 아닌, 누구나 가볍게 참여할 수 있는 행사 방식. 분노를 역으로 더 가볍게 털어낼 수 있는 콘텐츠로 다가가고 싶었다. 대규모 오프라인 만남이 중지되었던 동안 새롭게 생겨난 팬 문화인 ‘생일 카페’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생일의 주인공을 축하할 목적으로 카페를 대관하여 각자 전시를 감상하거나 굿즈를 나누고, 삼삼오오 음료를 마신 후 돌아가는 형식이었다. 생일 카페를 낯설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누구나 들르기 좋아 참여 장벽이 낮다는 점에서 낙점했다.
짧은 기간 동안 모집한 기획팀에는 열 분이 넘는 페미니스트들이 함께했다. 기획팀에서는 ‘웹소설’, ‘로맨스 판타지’ 컨셉에 대한 제안이 나왔다. 대선 이후 끓어오른 화를 웹소설을 보며 달랬다던 여성들이 생각났다. 영화, 드라마 등보다는 소규모 창작자(그룹)가 주를 이루는 웹소설 계는 새로운 여성들의 이야기를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가 활발하니, 우리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행사 제목을 ‘어느 날 갑자기 한여전의 후원자가 되어버렸다’로 짓고, 디자인까지 웹소설 풍으로 정했다. 행사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판타지에만 그치지 않도록, 더 ‘진심인’ 설정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래서 결국 활동가들이 함께 모여 세계관과 웹소설의 프롤로그까지 썼다. ‘킹 마초맨’에 대항하는 페미니즘 게릴라 부대원인 주인공 ‘후원자’가 성평등이 실현된 세상, ‘한여전 월드’로 차원 이동한다는 게 주요 설정이었다. 사무실에서 갑자기 웹소설 기획 회의를 하고 있자니 우리의 직업이 활동가가 맞는지 잠시 헷갈렸지만, 쓰고 나니 독자들에게 실소 정도는 전할 수 있을 것 같아 안도했다.
컨셉에 빠져들자 디테일이 더해졌다. 6월 11일인 창립 기념일에 맞춘 61,100원짜리 후원 티켓, 활동가들이 직접 조향한 것도 모자라 이름까지 ‘여성해방의 향’, ‘가부장제 철폐의 향’으로 붙인 디퓨저. 심지어 그 디퓨저를 웹소설에 등장시켜, 전시 공간에서는 웹소설을 읽으며 향을 맡아볼 수 있도록 4D(!)로 구성했다. 기왕 광대가 될 거면 최고의 광대가 되자고는 했는데... 과연 누가 오기나 할지, 얼마나 유쾌하게 즐겨주실지 노심초사하며 두 달여를 준비했다.
그리하여 6월 10일부터 12일까지, 3일간 열린 한국여성의전화 후원 행사에는 수백 명이 함께해주셨다. 우연히 카페에 들렀다가 예전에 한국여성의전화에서 피해 지원을 받았다며 응원의 메시지를 전해주신 분, 평소에는 후원 행사에 선뜻 오기 어려웠지만 이번에는 친구와 함께 왔다는 회원, 홍보물을 보고 ‘이건 놓칠 수 없다’며 처음 한국여성의전화의 오프라인 행사를 찾은 분들까지 다양한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카페에서 행사를 하다 보니 가깝게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예상치 못한 장점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재밌다는 소감을 남겨주셔서 참 기뻤다.
앞으로도 재미있게, 유쾌하게
폭력 피해자를 지원하고 여성 인권을 위해 달려온 한국여성의전화는 늘 치열하게 싸워왔지만, 때로는 백래시를 비틀어 웃고 넘길 해방의 자리를 만들려 해왔다. 막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서로에게 응원과 힘을 나누는 것도 중요하니까.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바꾸는 것도 필요하지만, 지치지 않고 또 다른 상상을 펼쳐낼 수도 있어야 하니까.
2018년 코미디 영화를 모아 상영하고 한국 페미니스트 버전의 스탠딩 코미디를 선보였던 12회 여성인권영화제. 2019년 반포한강공원의 풀밭에 앉아 거침없는 토크를 나누고, 공연과 부스를 즐겼던 ‘페스티벌 킥’에 이은 올해의 후원 행사까지 모두 그 일환이다.
돌아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단 하루에 불과할지라도 완전히 다른 공기와 규범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자리를 채운 사람의 대다수가 페미니스트여서, 그래서 위축되지 않은 채 마음껏 웃고 떠드는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지 말이다. 그래서 때로는 어떠한 촘촘한 이론보다도 그 순간의 기억이 운동을 이어 나가는 동력이 됨을 느낀다. 더 많은 여성들이 더 오래오래, 힘 있게 나아갈 수 있도록 앞으로도 이런 자리를 꾸려낼 생각이다.
[필자 소개] 정. 올해 39주년을 맞은 한국여성의전화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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