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개] 여성들의 말과 글이 세상에 더 많이 퍼지고 새겨져야 한다고 믿으며, 서점에서 퍼뜨리고 싶은 여자들의 책을 고른다. ‘살롱드마고’의 신간 책장에서 마음에 새겨지는 책을 한 권씩 밑줄 그으며 꼭꼭 씹어 독자들과 맛있게 나누고자 한다.
“나는 나 자신을 정의할 수 없다. 누구든 나를 무엇이라고 규정하길 원치 않는다. 나는 그저 보통의 삶을 영위하는 평범한 사람이고 싶다.” (『털 난 물고기 모어』 16쪽)
캄캄했던 극장에서 스크린을 뚫고 찬란한 무지갯빛이 춤춘다. 그늘을 숨긴 가면 같은 화장, 한껏 올라간 속눈썹과 아슬아슬한 힐, 가느다랗지만 탄탄한 근육, 그리고 몸짓 하나하나에 열광하는 사람들… 그 무대의 중심에 드랙퀸, 끼순이, 트랜스젠더, 모델, 배우, 댄서- 이 모든 말로도 부족하면서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모어’, 모지민이 있다. 나는 다큐멘터리 영화 <모어>(이일하 감독, 2021)를 먼저 보았다가, 그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끌려 그가 쓴 책을 이어 읽었다.
황인찬 시인의 추천사처럼 모어의 글은 내게도 “시이면서 시가 아니고, 일기면서 일기가 아니며, 말이면서 말이 아닌 것”으로 다가왔다. 어설피 글 쓰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옳다”고 여기거나 “이렇게 써야 한다” 믿어온 틀과 방식들을, 그는 때론 깔깔거리고 때론 이죽거리며 과감하고 아름답게 비켜갔다.
“아가야 (…) / 아직도 동성애 하면 AIDS 걸리는 것 아니냐고 / 정말 아무렇지 않게 묻는 못 배운 헤테로들의 / 세 치 혀를 뽑아버리자 (…) / 귀에 피가 나도록 말을 해도 못 알아처먹고 / 끝까지 나를 ‘그것’이라 씨부리며 / 이쪽저쪽 색깔 타령하는 것들의 사지에 / 염병 뚜드럼병 나게 하고 / 멍청한 새대가리를 박살 내버리자 (…) / 아가야 그래도 넌 아름다운 말 하면서 / 매시랍게 살아가야 한다 (…) / 세상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 어디서나 도사리고 있는 폭력을 잘 피해 가야 한다” (글 ‘아가야’에서)
“만약 환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은가요? No 毛魚!” (318쪽)
모어의 책은 맛있는 안주 앞 수다 한 판, 그가 좋아한다는 최승자 시인의 맵싸한 시구, 그의 고향과 어울릴 듯한 구수한 민요, 친한 언니와의 다정한 통화, 눈물 콧물이 동시에 흘러나오는 ‘웃픈’ 시트콤의 각본을 독창적 장르 ‘모어체’로 인생사 희로애락 쫀득하게 버무려 노래하고 춤추는 것 같았다. 어쩌면 세상의 말들은 재미도 없고 털도 없는 물고기들이 만든 것이어서, 그의 존재도 표현도 다르고 낯설게 보이는 걸까.
아무리 독보적이고 아름다울지라도, ‘털 난 물고기’로 산다는 것은 만만치 않다. 아니 지긋지긋하게 아픈 일이다. 책에서 모어는 자신을 구더기에, 삶을 욕창에 자주 비유한다. 누이의 치마를 즐겨 입으며 같이 인형놀이를 할 수 있던 안전한 어린 시절은 잠깐이고, 학교와 함께 시작된 사회생활 속에서 모어는 일상적인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그나마 “여성성이 허용되는 무용에서는 살아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지만,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무용과 남자 선배는 그에게 여성성을 버리라며 뺨을 때린다. 입대하고 나서는 ‘성주체성 장애’ -이보다 주체적인 사람이 어디 있다고, 별 희한한 병명을 붙였는지- 판정을 받고 정신과에서 호르몬 치료를 받아야 했다. 책을 여는 첫 문장이 떠올라 한층 더 마음이 휘저어진다. “아빠, 난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어요. 발레리노가 아니라.”
“어미 배 속에서부터 구더기를 씹어 먹고 세상이 규정한 성에서 조금 다른 색을 가지고 나온 것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무기징역형 불행이었다. 유년기는 치욕으로 얼룩져 있다. (…) 폭력은 내게 죽어야 한다는 마침표를 찍어주었고 나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불완전한 죄인이었다.” (21쪽)
“나는 딸도 아니오 / 아들도 아니오 / 나는 없어요 / 나는 무엇이고 / 나는 왜 살아 있는 걸까요” (38쪽)
‘다른’ 존재를 잔인하게 혐오하는 세상을 아슬아슬 걸어오며 느낀 고립감과 혼란이 묻어 있는 모어의 이야기에 꽁꽁 싸매놓았던 나의 그늘이 서늘하게 포개진다. 거의 평생을 아토피 피부염과 한 몸으로 살아온 나 역시 삶이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막무가내로 주어진 형벌이 아닐까 자주 생각했고, 그렇다면 나의 죄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병의 원인과 치료법이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으니 몸의 고통은 현대의학으로 어쩔 수 없더라도, 마음의 고통은 타인들이 고스란히 쌓아준 것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내 몸, 외모를 향했다. 보이는 모습이 ‘나’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나의 마음이나 생각보다 어떻게 하면 아토피를 완치할 수 있는지(그리고 왜 지금껏 낫지 ‘못’했는지)가 늘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런 이들에게 내 몸에 대한 걱정이나 연민을 원치도 고마워하지도 않는다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실 혐오라고 솔직하게 말해주지 못했다. 나 역시 내 몸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기에 차라리 마음과 입을 함께 닫아버렸다. 오랜 시간 물속에 잠기듯 아무도 모르게 대인기피증을 겪었다.
“개인적 고통에는 외로움이 따르지만, 사회적 존재로서 느끼는 고립감은 외로움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 (…) 내 몸은 온 세상에 노출되어 문젯거리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데, 그 몸과 연결된 나의 삶은 투명인간의 그것으로 취급된다.” (필자의 저서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 44쪽)
특히 한국 사회에서 ‘다른 몸’이란 비정상적이고 미천하고 추하게 여겨진다. 우리는 모두 다르고 다른 것이 당연하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잊어버린 채 하나의 몸을 세워놓고 나머지 모든 몸을 평가한다. 이런 차별적 문화 속에서 혐오는 ‘다른’ 것들을 고립시키고 배척함으로써 정상성이라는 권력을 재생산하고, 모두가 ‘정상’이라는 허울을 욕망하게 만든다.
혐오에 저항하는 다른 몸과 존재들의 이야기에 우리가 귀 기울인다면 모두 함께 자유로워지고, 동시에 각자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모어의 남편 ‘줴냐’가 한 말처럼. “You make the world more beautiful.”(당신은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
가까이서 지켜보아야 했던 소중한 이들의 죽음과 삶을 비틀거리게 한 절망의 순간들 속에서도 모어를 지탱해 준 건, 어쩌면 그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함께 춤춰준 사람들의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보광동 세련된 아이들’이나 ‘헤드윅’ 존 카메론 미첼과 나눈 우정과 연대의 이야기는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보살피는 관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며, 뭉클하고 따스했다. 그래서인지 모어의 글에서는 우울한 색채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끼를 떠는 유머와 쿡쿡 웃음을 자아내는 위트가 곳곳에서 비어져 나와 같이 신나게 수다 떨고 싶게 만든다.
책의 마지막 글에 모어는 “낮은 곳에서 하이힐을 신고 높은 곳에서 토슈즈를 신는다”라고 썼다. 그 문장이 시니컬하거나 자조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감정, 할 수 있는 표현이었다. 모어의 춤을 아직 보지 못했더라도, 아마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당신은 머릿속에서 춤추는 모어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드라마틱한 공연 한 편이 끝나고 나도 모르게 기립박수를 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모어는 MORE고 毛漁다 / 나는 나를 남성이나 여성 /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길 바라지 않는다 / 나는 있고 없고 / 그저 인간이다 / 나는 나로서, 존재로서 / 아름답고 끼스럽게 살아가고 싶다.” (13쪽)
[필자 소개] 달리. 전북 남원에 있는 지역서점이자 페미니즘 문화공간 ‘살롱드마고’의 공동운영자이며 에세이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2021)의 작가이다. ‘고요한 해방, 나의 목소리를 찾는 글쓰기 여행’, ‘삶의 빈 칸을 채우는 글쓰기’ 등 여성들과의 글쓰기 활동을 기획,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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