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결혼 가정이나 이주민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한 청(소)년들, 아동 청소년 시기에 중도 입국한 청년 등 다양한 이주 배경을 가진 청년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좀처럼 가시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청년 담론 안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이주 배경 청년 당사자들의 시선과 목소리를 직접 들어봅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편집자 주]
우리 동네 많은 이주여성 중에 전업주부는 없다
우리 마을엔 결혼이주여성들이 꽤 계신다. 엄마를 포함해 다양한 국적의 여성들이 국제결혼회사, 혹은 통일교 등의 주선 하에 농촌 남성들과 결혼하였다. 어느 순간 이 작은 마을에 나라별 악센트가 섞인 서툰 한국어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결혼’은 이주여성들이 티브이에서 본 장면이나 결혼을 권유한 주변 사람들의 말과는 상당히 다르다. 생각과 다른 삶에 어느 순간엔 탈출을 결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주여성은 결혼을 무르기 쉽지 않다. 이주여성의 탈출을 막을 수만 있다면, 남편과 시댁은 어떤 일이든 서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여권과 통장 숨기기는 공공연한 수법이다. 또한, 이주여성이 타지에서 겪게 될 법적 공방의 어려움, 머무를 곳과 경제력이 없다는 것도 이들의 발목을 묶는 이유가 된다.
한국에서 이룬 ‘가정’과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버티기도 한다. 이주여성들은 한국에 도착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바로 아이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원하든 원치 않든, 굶기지 않고 앞으로의 삶을 책임져야 할 ‘식구’가 생기는 것이다. ‘가장의 일’은 비단 남자만의 일이 아닌지 오래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면, 이주여성들은 돈을 벌러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아이가 커갈수록 돈은 더 많이 필요하다. 내가 아는 한, 우리 동네에서 사는 이주여성 중에 전업주부는 없다.
이혼했더라도 상황은 편치 않다. 언어도 문화도 낯선 타지에서 오로지 이주여성의 경제력으로 자신과 아이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작은 시골 마을에선 번듯한 일자리도, 넉넉한 월급도 갖기 힘들다. 특히나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주여성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다. 살기 위해선 무엇이든 해야 한다.
농부가 아닌, 농부의 아내라고 불리는 여성들
이곳 이주여성들은 농업, 식품 공장, 빨래 공장, 식당(서빙, 설거지), 초중교 방과 후 영어학습 보조, 학교도서관 사서, 서비스업 등 다양한 노동을 한다. 우리 엄마는 아빠와 함께 농사를 지으신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시기에 맞는 농사를 짓느라 여유 느낄 새도 없이 땅에 앉고 물에 들어가 풀을 가꾼다.
봄이 오면 겨울 동안 방치된 밭을 재정비한다. 땅을 고르고 돌멩이를 주워 한곳으로 모은다. 작년에 지은 농작물의 잔해와 잡초도 뽑고 거름도 다시 뿌리며 다시금 경작지로 만든다. 기름진 땅을 만들면 그 위에 비닐을 씌우고 간격에 맞추어 구멍 뚫은 후 감자, 마늘, 양파 등의 씨를 뿌린다. 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논에 심을 모를 모판에 키우고 시간마다 물을 준다. 논에는 물을 댄다. 이른 봄 작물을 수확하면 그다음엔 깨와 콩을 심는다.
땅을 고르는 건 트랙터로 하면 된다. 아빠가 트랙터를 모는 동안 땅 위로 나온 돌멩이를 빼는 작업은 주변 사람들, 특히 엄마가 담당한다. 돌을 줍기 위해 일일이 허리 숙이고, 하나하나 잡은 다음 모아서 치워야 한다. 아빠가 기술을 배워 할 수 있는 운전인 소위 ‘큰일’을 하는 동안 엄마는 자잘하고 몸을 많이 움직이는 일을 맡는다.
여름이면 모내기를 시작하고 늦봄에 키운 모를 옮기고 물 댄 논에 심는다. 여기서도 역시 아빠는 이앙기를 운전하면 되지만, 엄마는 긴 장화를 신고 들어가 미처 기계가 심지 못한 곳에 모를 손수 심는다. 밭에선 봄에 심은 작물이 자라나기 시작하는데, 엄마는 매일매일 밭을 돌며 잡초를 뽑고 잎을 다듬는다. 농사 의자에 앉아 조금씩 옮겨가며 덥지 않은 아침과 오후에 일하다 보면 하루는 금방 간다.
가을은 대대적인 수확 시기다. 벼를 베고 탈곡하며 포장한다. 밭에 심은 고추도 손수 따며 다듬고 말리고 빻고 포장한다. 가을을 기억하면 엄마는 항상 마루에 앉아 당신 몸보다 몇 배가 되는 고추 담긴 포대에 둘러싸인 채 고추를 다듬었다. 간혹 과일 같은 시설작물이나 대농을 떠올리며 농민이 꽤 큰 돈을 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우리 집은 밭작물을 주로 하며 규모도 눈에 띄게 크지 않아 손이 가는 만큼 넉넉히 벌진 못한다.
엄마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농사지을 때 힘들지만 기분이 좋아. 농작물들이 잘 익어 결실을 보면 정말 예쁘고 뿌듯해. 밭 변두리에 키우고 싶었던 작물을 작게 심기도 하는데, 소소하게 키우는 재미도 있고 너희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보면 정말 행복해.”
아빠가 담배 피우며 쉬는 동안에도 엄마는 쉬지 않고 작업을 이어나간다. 언젠가 같이 쉬지 않는 이유를 물으니, 그래야 더 빨리 끝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실상 우리 집의 농사에 더 많은 힘과 정성을 들이면서도, 총체적인 지휘(일정 정하거나 농사 방법을 조정하는 등)나 남들에게 농부로서 인정받는 것은 엄마가 아니다. 엄마는 ‘농부인 남편의 조력자’ 위치에 머무르는 것이다.
빨래 공장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난 중년 여성들
나에겐 동갑인 동네 친구가 있다. 이 친구의 가족 역시 ‘다문화 가정’인데, 친구의 어머니가 일하고 있는 빨래 공장에서 우린 단기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빨래 공장에선 주로 지역 병원 환자복, 병원용 천, 양로원 복 등을 대량으로 빨고 건조하는 일을 한다. 엄청난 양의 빨랫감을 다루는 일을 하는 만큼 먼지를 마시지 않도록 마스크를 끼고, 손이 거칠어지지 않도록 장갑을 껴 만반의 준비를 했다.
공장 안으로 들어가니 공장의 끝과 끝에 닿은 커다란 기계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소음과 열기, 그리고 그 주변에서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노동자들이 우릴 맞이했다. 빨래 공장 노동자의 대부분은 중년 여성이었다. 그들은 건조기에서 나온 뜨거운 옷들을 끌어안고 와 넓은 평상 위에 올려놓았다. 한 분이 처음 일을 하는 우리에게 빨래 개는 법을 알려주셨고, 나와 친구는 키만큼 쌓인 빨래들을 집으며 최대한 반듯하게 개어 쌓아 올렸다. 맞은편 평상에선 다른 노동자분들께서 우리의 두 배만큼 빠른 속도로, 그러면서도 더욱 반듯하게 빨래를 개고 계셨다. 50장, 100장 단위로 빨래를 세며 나누는 모습은 내 눈엔 엄청난 기술이었다.
빨래는 서서 개야 한다. 의자에 앉아도 평상 높이와 맞지 않아 결국은 서서 해야 한다. 빨래를 개는 동안 뒤에서는 크고 많은 세탁기, 건조기, 스팀 머신이 소음들을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그 소음 속에서 소통하기 위해 소리를 친다. 이어폰을 꽂아 음악을 틀어도 소음을 막을 순 없었다. 갓 20살이 된 우리는 지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일하고 나면 발바닥, 다리, 허리, 어깨가 아팠다.
노동자분들은 우리를 살갑게 대해주셨다. 어린 친구들이 고생하는 게 안쓰러운지 ‘일 많이 힘들지 않냐’며 물어보고 간식을 쥐여주시며 ‘잠깐 구석에 가서 쉬어라’ 말씀도 해주셨다. 우리가 구석에 쪼그려 앉아 물과 간식을 먹으며 쉬는 동안에도 노동자분들은 계속 빨래를 개켰다. 이분들은 점심시간을 제외하더라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일하는데 말이다.
단기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 급여를 받았다. 당시 최저 시급을 기준으로 2주간 5시간 일해서 50만 원 정도를 받았다. 친구와 내가 받은 급여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의 어머니는 한 달 단위로 급여를 받는데 계산하면 최저 시급이 되지 않음을 알았다. 그리고 일감이 없거나 인원을 축소해야 할 땐 공장을 멈추거나 갑자기 인원을 줄이는 일도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그곳에서 같이 일했던 노동자분들이 생각났다. 고강도 노동에 비해 그리 넉넉지 못한 금액을 받는데, 그마저도 갑자기 끊길 수 있는 상황에 있었다.
가끔 친구의 어머니를 만나면 빨래 공장 이야기를 듣는다. 요즘엔 빨래를 개는 기계도 새로 들어와서 빨래를 펴 넣기만 하면 되니 더 편하다고 하신다. 다만 한여름에는 엄청 덥다고 한다. 내가 아르바이트했던 한겨울에도 공장 안은 따뜻했으니, 여름엔 얼마나 더울지 예상이 간다.
이주여성이기에 겪는 이중고
타지에 있기에 더욱 힘든 노동이다. 자신의 노동에 비해 조명을 덜 받을 수도, 돈을 덜 받을 수도 있다. 노동하면서도 그들의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한국어)를 사용해야 하고, 언제 어디서 차별적인 언행을 겪을지 모르는 긴장감을 느끼고 산다.
이주 초반엔 지역 사회복지관 등에서 한국어 교육을 받지만, 일해야 하거나 사는 곳과 거리가 멀어 어쩔 수 없이 발길이 끊기는 경우도 많다. 교육을 꾸준히 받지 못하고, 만나는 사람도, 대화의 주제도 한정적이기에 이들의 한국어는 일정 수준에서 더이상 늘지 않는다. 어설픈 어순과 문법, 낯선 억양은 한국인과의 소통을 어렵게 한다. 엄마의 말을 듣고 자란 나는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듣지만, 이주여성들과 자주 말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들의 말을 알아듣기 어렵다. 이주여성이 자기 말을 이해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키울수록 상대에겐 멀어진다.
쓰기, 읽기는 말하기보다 더 어렵기에 훨씬 느리다. 간단한 쇼핑을 할 때도 상점 주인과 소통에 버벅거림이 생길 수 있는데, 하물며 일터에서 공적 업무를 말하거나 혹은 계약서를 쓸 때, 이주여성 측에서 무언가를 요구하고 싶은 경우라면 어떠하겠는가. 사장이 노동자의 요구를 ‘못 알아듣겠어.’라며 모르쇠 하거나 계약할 때 임금, 노동 조건, 맡은 직무를 설명할 때 오해가 생기거나, 사장 측에서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
내가 아직 유치원생이던 때 있었던 일이다. 엄마가 엘리베이터를 타자 같이 탄 노년 남성이 대뜸 ‘일하러 왔어?’라며 말을 걸었다고 한다. 한국어 공부를 하기 위해 들른 사회복지관 건물 안이었음에도 말이다. 아저씨의 언행에서 이주여성을 돈을 벌기 위해 고강도 노동을 하러 온 절박한 존재로 취급해, 존중하지 않고 반말하며 위협적인 태도가 배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담으로 엄마는 그 무례한 아저씨에게 “예, 일하러 왔어요. 내 힘으로 일하고 돈 벌러 왔어요!” 하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그들의 자식들이 엄마가 이주여성이기 때문에, 혹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않는 노동을 하기에 수치심을 느끼기도 한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은 자라면서 자신과 가정이 사회적 비주류임을 깨닫는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면 혹시 상대방이 동정 혹은 혐오를 할까, 경계하고 무서워하기도 한다. ‘다문화’나 ‘가난’이라는 단어가 비하의 의미로 들리기도 한다. 사춘기 등 예민한 시기가 되면 ‘차별받는 자신’을 만든 이주여성 어머니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릴 수도 있다. 왜 한국어를 잘 못 하냐, 꼭 그런 일(사회적으로 치켜세워지지 않는)을 해야 하냐며 어머니와 심하게 다투거나, 말을 걸지 않기도 한다.
한국의 농촌 마을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
내가 아는 이주여성들은 거의 다 가게, 식당, 학교, 공장 등 다양한 곳에서 일하고 있다. 손님들의 손톱을 다듬으며, 마트 캐셔를 하며, 농사를 지으며, 공장에서 빨래를 갠다. 아이의 학비를 벌고, 음식과 옷을 사고,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노동을 이어나간다.
‘어느 나라 사람들은 게으르다’, ‘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은 인터넷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혐오 표현이지만, 적어도 이 동네에선 통하지 않는다. 이주여성의 노동력 없이는 이 시골 마을이 돌아가지 않는다. 한국의 젊은 노동력 없이도 시골 마을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이주노동자들의 착취에 가까운 노동이 있기 때문이다.
엄마와 같은 이주여성들이 가정과 자식들을 키우며 피땀 흘려 일하고, 그렇게 뿌리내린 곳이 바로 이 나라, 한국이다. 이들은 이 땅에서 살기로 결심하였고,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응당 이주여성 또한 사회를 이루는 일원으로, 이들의 노동이 사회를 지탱하는 역할로 인정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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