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 사회가 돌봄에 얼마나 취약한지 여실히 드러내었고, 서로 돌보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돌봄 사회를 위하여,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돌봄 현장을 조명하고, 다양한 돌봄의 경험과 아이디어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조심스럽고 미안한 마음을 담아) 저기, 일어났어? 컨디션은 괜찮아? 네. 방금 약 먹으려고 일어났어요. 괜찮아요. 다행이네. 나, 부탁 좀 하려고, 엄마 병원 10시까지 가야 하는데, 택시가 안 잡히네. 네, 지금 옷만 입고 바로 나갈게요. 우리 동 앞으로 와요. (목소리 톤이 올라가며) 오케이! 땡큐!
지난 6월 15일 엄마는 회전근개 파열로 인하여 오른쪽 어깨와 관절염이 심한 손목을 동시에 수술했다. 2주 입원하고, 한방병원으로 옮긴 후 외래진료를 받으러 가던 참이었다. 남편과 자식, 차가 없는 나는 엄마의 보호자가 되었다.
나는 중년의 비혼여성, 임대아파트에서 비혼여성공동체 ‘비혼들의비행’(이하 ‘비비’)을 주축으로 20여 명의 비혼여성과 함께 1인 가구 네트워크 생활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집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여성생활문화공간비비협동조합’(이하 ‘공간비비’)으로 시시각각 출근하고 있다. (관련 기사: 노년에도 ‘나답게’…비혼여성 공동체의 화두는 상호돌봄 https://ildaro.com/8867) 오늘 출근은 좀 늦을 것 같다.
1. 여덟 번째 집
내 나이 열아홉에 전주에 상경했다. 때맞춰 갈아줘야 하는 연탄부터, 겨울만 되면 고장 나는 기름보일러를 거쳐, 결재만 하면 되는 도시가스까지, 그것도 부엌일까 싶은, 벽 없는 곳 덩그런 찬장 하나 석유풍로 하나에서, 싱크대가 있고 가스레인지를 놓을 수 있는 입식 주방까지, 주인 눈치 보며 배를 쥐어 잡고 다닌, 주인집 마당에 있는 공용 변소에서, 집안에 붙어있는 개인 변기, 심지어 샤워기까지 달린 욕실까지, 더할 나위 없는 집, 22평 임대아파트가 30년 나의 주거 독립 현주소다.
무엇보다 원한 것은 세탁기를 놓을 수 있고, 거기서 바로 빨래를 널 수 있는 베란다였다. 오늘은 이 프레임으로 충만하다. 수선화가 일찌감치 봄을 알리고 있고, 장미허브는 빛에 따라 잎 색을 달리하며, 청보랏빛 꽃무늬 천이 바람에 흩날리고, 잠깐 독서를 위해 캠핑 의자가 있는 곳, 여덟 번째 집 1인 가구의 일상이다. 덤으로 베란다 밖으로 비비 구성원들이 사는 동이 지척에 보인다. 안심이다.
2006년 마을이 먼저 아파트로 독립했다. 가지 않은 길에 선구하는 자가 있는 것은 동력을 준다. 당시 무주택이면 신청이 가능했던 17평 임대아파트, 혼자 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좋은 것은 널리 알렸다. 입주 공고가 날 때마다 재빠르게 공유했다. 보증금 자금이 부족할 때는 비비 회비에서 충당했다. 입주 날짜가 정해지면 청소 용역단처럼 출동해서 함께 입주 청소를 했다. 3년 안에 네 명이 같은 아파트에 입주했다.
두 동만 있어서, 잘 나지 않던 22평 공고가 났다. 직장 근처로 2년에 한 번씩 이삿짐을 쌌던 나는 일단 신청했다. 난생처음 당첨이란 것이 되었다. 나는 2010년 2월 4일 입춘날에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3월 12일 길었던 나인투식스 직장을 퇴사했다. 그해 6월 15일 비비는 더 많은 비혼여성을 만나고자 ‘여성생활문화공간비비’를 개소했다. ‘마을’, ‘주얼’과 함께 각자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고 상근을 결정했다.
그곳에서 비혼 담론을 위한 ‘비혼객잔’을 열었다. 3차 주제를 ‘독립만세’로 정했다. 독립을 한 계기는 다양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너무 싫어서 ‘재금’을 나오기도 했고, 노트북을 샀는데 그 노트북 하나를 놓을 공간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디로 독립할 것인가? 비혼여성 1인 가구에게 집을 선택하는 1순위 기준은 무엇일까? 공간비비에 찾아온 비혼여성들에게 아파트 홍보대사처럼 비비의 주거 독립 실천과정을 소상히 알렸다. 여기로 오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결혼하지 않고, 독립하는 여자들이 아파트에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2. 119보다 빨라
띵, 14층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나는 몸을 재빠르게 왼쪽으로 살짝 돌려 잰걸음으로 열 폭을 걸었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열 폭을 걸어서 더 재빠르게 번호키를 누른다. 너무 빨리, 집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에 번호키를 잘못 누르기도 한다. 말하자면 내가 이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익명의 누군가가 아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지극히 내향적인 사람이다.
긴 자취생활 끝에 당도한 곳, 아파트에 사는 것은 처음이었다. 동 호수를 받고, 입주하기 전에 내가 살게 될 집을 가보았다. 일렬횡대 복도식, 한 층에 6세대가 살고, 엘리베이터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3세대, 오른쪽으로 3세대가 사는 구조였다. 엘리베이터에서 가장 가까운 오른쪽 첫 집, 그러니까 한쪽은 엘리베이터가 있는 통로와 면해있고, 한쪽은 옆집과 면해있었다. 12년째 살고 있지만, 옆집에 사는 세대원을 정확하게는 모른다. 엄마와 딸 관계로 추정하는 두 여자를 간헐적으로 보았다.
‘마을’은 우리 집에 오면서 남성이 옆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목격하지 않았다. 그 남자가 그 남자였나. 그 남자가 그 집으로 들어갔나. 나는 복도에서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집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집에서 나올 때도 밖에 인기척이 있으면 조금 기다렸다가 나온다. 본의 아니게 엘리베이터 앞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가벼운 묵례를 할 뿐, 안면을 트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가장 적합한 호수 위치다.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알아야 편하다는, 그래서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인사를 하고 어디 사는지 파악해 둔다는 친구도 있고, 호기심에 몇 층에 누가 사는지 궁금하다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다만 ‘아파트주민모임 단톡방’에 들어와 있는 비혼여성 1인 가구 스물세 명의 동 호수를 휴대폰 메모장에 잘 적어놓았다.
주말 오후, TV를 보고 있었다. 30분만 더 보다가 ‘주얼’과 천변 산책하러 나갈 참이었다. 띵동! 벨이 울린다. 누구지? 친구들은 보통 방문을 미리 알리고, 초인종보다는 문을 똑똑 두드린다. 인터폰을 들고 화면을 보는데, 누군지 모르겠다. 유니폼을 입은 것 같지는 않고, 마스크를 쓰고 모자도 눌러썼다. 잘 안 보인다.
누구세요? 나! (나가 누구지?) 나는 다시 묻는다. 누구세요? 나! (그니까 나가 누구란 말인가?)
더 작아진 목소리로, 누가 들을까 싶어 누구? 언니? 그려! (그래도 뭔가 미심쩍다.) 현관문 앞에서 다시 묻는다. 언니예요? 이름까지 불러가며 ‘나’를 확인한다. 그려! 약간 격앙된 목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자마자, 왜, 휴대폰을 안 봐? 네가 한 시간 동안 카톡도 안 보고, 전화도 안 받는다고, 주얼이 나보고 가보라고 했어. 산책을 취소하려던 주얼은 바로 올 수는 없고, 내가 연락이 안 되어서 걱정한 상황이었다. 내 휴대폰은 거실에서 혼자 무음 상태로 뒹굴고 있었다.
다음날, 봄봄님! 오늘 천변 걸어요? 어, 우리는 7시에 걷기로 했어. 건너 동 사는 ‘주민’이 물어온다. 오다가다 만나는 주민들에게 주얼과 내가 천변을 걷는다는 일정을 익히 알렸다. 나가는 길, 방금 만든 김치전 반죽을 담는다. 어제 우리집에 출동한 ‘마을’에게 카톡을 보낸다. 언니, 우편함에 김치전 반죽 넣었음. 일요일엔 부침개죠. 우리는 천변 나감. 땡큐! 즐천변!
오늘은 셋이서 걷는다. 가끔 걷기에 동참하는 주민들이 있다. 배는 좀 나아졌나? 안부를 묻는다. 며칠 전, 한밤에 갑자기 심각한 복통이 일어나서 마을과 주얼이 그 주민의 차를 끌고 응급실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네. 많이 좋아졌어요. 다행이네. 우리는 무슨 일이 생기면 119보다 빨리 출동한다. 이 정도면 안전하지 않은가!
3. 로맨틱한 격리 생활
우정의 밥차가 도착하고 있네요. 마을: 604동 〇〇〇〇호. 주얼: 605동 〇〇〇〇호. 봄봄: 606동 〇〇〇〇호. 우리는 못 나가요. 알아.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려고 했음.
2022년 4월 5일 화요일, ‘마을’은 코로나19 양성 결과를 받았다. 이틀 뒤 ‘반짝별’의 6차 항암을 마치고 마지막 결과를 보러 가기로 일정을 잡아놓은 상태였다. 무사히 지나간다 했는데, 나까지 걸려야 끝난다는 말이 있어, 누군가의 전언이 들리면서 올 것이 왔다는 기시감이 들었다. 별이한테 연락해야겠네요, 그래야지. 반짝별은 모처럼 새벽 기차를 타고 간다고, 이참에 언니도 쉬라며 ‘비비 단톡방’에 씩씩한 카톡을 올렸다.
밀접접촉자인 주얼과 나는 신속항원검사를 하러 내과로 향했다. 거기서 월요일 공간비비에 들른 주민을 만났다. 명상센터에 들어간다고, 주얼에게 펫시터를 부탁했었다. 주민은 센터에 들어가기 위해 음성 결과 확인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는 반갑고, 놀라며, 마을의 확진 상황을 전했다. 주민은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별일 없을 거예요.
내 차례다. 증상이 어때요? 확진자 밀접 접촉해서요. 증상은 없어요. 증상도 없는데, 왔어요? 허허, 의사는 헛웃음을 내며 그래요, 걱정되니까 해봅시다. 애들은 밥 따로 주고, 집에서도 각자 생활하면 됩니다. 나는 1인 가구입니다, 라고 말하면 되는데, 나도 모르게, 저희가 내일 수업 나가야 해서요, 힘주어 말했다. 순간 독거인보다는 강사의 위치를 부각하는 것으로 내 신상정보를 일축했다. 의사는 바로, 사모님, 이쪽으로 오세요. 나는 사모님이 되어 코 깊숙이 들어오는 따끔함을 견디며 눈을 질끈 감았다. 셋은 음성 결과를 받았다. 나는 수요일 엄마 병원 동행 일정을 취소하고, 목요일 소설읽기 모임을 한 주 뒤로 미뤘다.
금요일 아침, 주얼은 목 통증을 느끼고 내과로 향했다. 양성이네요. 너도 빨리 가 봐. 나는 여전히 증상이 없는데, 뭔가 불안했다. 우리는 식구처럼 같이 밥을 먹지 않았나.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양성입니다. 셋 다 자가격리에 들어가고, ‘푸른산’은 김밥을 직접 싸서 완주에서 전주로 출발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띵동, 봄! 김밥 놓고 간다! 복도에 우렁찬 소리가 들린다. 건강한 김밥 두 줄, 오렌지 하나, 참외 하나. 엄마 챙기기도 바쁠 텐데. 푸른산은 와병의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무사히 완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서로 기쁨과 배부름을 나눴다. 역시 요리사의 김밥이야. 한 줄이었으면 어쩔뻔했나. 직장인 ‘천영’에게 일요일에 비비 모임 불가, 우리 셋 다 자가격리, 나는 지난주에 걸림, 서로 전보를 쳤다.
일요일, ‘공간비비 조합원 단톡방’에 생일자 축하 인사를 올렸다. 상근자들의 격리생활이 전해졌다. 미각은 어떠냐고, 우리는 끼니마다 단톡방에 뭐 먹을 건가 토의함. 답답하지 않냐고, 우리는 집콕 스타일. 많이 아프지 않냐고, 우리는 덕분에 휴가 중. 그날 저녁 샘, 딸기를 문 앞에 놨어요. 땡큐! 소리도 없이 왔다 갔네. 딸기가 없어! 어디다 놨어? 샘, 603동 아니에요? 난 606동임. 샘, 다시 갖다 놓음. 땡큐! 다음날도 같은 동에 사는 공간비비 회원이 어디서 들었는지 딸기 사다 드릴까요? 다른 언니들 동 호수 알려주세요. (아, 딸기. 그것도 1인 1박스.) 딸기 다 먹었어? 남았지만 저는 다 먹을 수 있어요. 오케이. 딸기 땡큐!
과일을 부러 찾지 않는 마을과 엥겔지수 높은 주얼과 부지런히 딸기를 먹으며, 딸기를 이렇게 포식하다니 이 무슨 호강인가 싶을 때, 시골에서 보낸 고구마 한 상자가 도착했다. 엄마는 모르는데. 그러고 보니 딸기 배달꾼들은 공간비비 소모임 중에서 비혼 3040 커뮤니티 ‘삼한사온’과 ‘비혼여성부모돌봄자조모임’ 참여자들이었다. 아, 우리가 이렇게 연결되어 있었구나.
이레를 어떻게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 있으려나 싶었다. 날마다 어디선가 나타난 배달꾼들이 놓고 가는 것을 받으러 현관문을 열 때, 훅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흠칫 놀란다. 삼시 세끼 약을 먹는 일은 삼시 세끼 밥을 차리는 일과 같았다. 1인 가구라서 자가격리가 집에서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일, 방 하나에 갇히는 형국은 아니니 그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베란다 독서를 잠깐 하다가, 저 멀리 아파트 단지 내 난분분하게 흩날리는 벚꽃을 카메라 줌으로 가져온다. 찰칵, 찰칵, 찰칵. 봄 다 가네. 덕분에 로맨틱한 격리 생활도 아쉽게 끝나간다. 새벽녘 적요를 깨는 고달픈 기침 소리, 저건 분명 코로난데.
에고, 이렇게 친구까정 폐를 끼쳐서 어쩐대요. 아니에요. 저도 언니들 도움 많이 받아요.
엄마는 ‘반짝별’의 차를 타며 멋쩍어하고, 나는 그저 웃는다. 진료를 마치고 택시를 잡고 ‘주얼’에게 카톡을 보낸다. 나, 삼계탕 2인분 좀 울집으로 시켜주삼. 오후 2시, 엄마는 한방병원으로 돌아가고, 나는 공간비비로 늦은 출근을 했다. 가자마자 주얼에게 내 휴대폰에 배달의민족 앱 까는 것을 배운다. 조금 있다가 1년에 한두 번 공간에 들르는 ‘주민’이 프린트 용건을 들고 나타났다. 오래간만의 안부를 나눴다. 보일러 교체는 했어요? 우리 동은 끝났는데. 이번에 보일러실 청소하면서 옆집이랑 처음 인사했잖아요. 아하. 다음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같이 가요. 뭐 좋아하세요? 얼큰하고 기름 둥둥 뜬 거. (그건 감자탕인데.) 한참 주변의 맛집 정보를 공유했다. 아차차, 얼마 전 개업한 짬뽕집 먹으러 가기로 한 주민이 있었지. 아차차, 다음 주 월요일에 점심 먹으러 오기로 한 방문객이 있었지.
오늘 저녁은 주민이 들고 온 컵라면과 찐 달걀을 먹으며, 벽에 붙여놓은 ‘신데렐라 event’를 본다. size 235. 이 신발의 주인이 되어주세요! 아직 신데렐라가 나타나지 않았군. 내일은 인근 아파트로 이사한 주민 집들이에 가기로 했다. 엄마표 김치를 조금 싸야겠다. 반짝별은 병원 잘 갔다 왔나 모르겠네요. 서울 비 많이 오는데. 익산까지 차 가지고 가서 SRT 타고 간다고 했어. 컨디션이 아직은 괜찮아서 혼자 가보겠다고 했어. 그래요.
우리가 서로에게 세상 가벼운 부탁을 청하고 우리가 서로에게 세상 가벼운 땡큐를 날리고 오늘은 도움을 줬다가 내일은 도움을 받았다가 그리 살면 되지 않을까.
[필자 소개] 봄봄: 반려로 ‘소설’을, 공생자로 ‘비비’를 선택한 나머지, 지극히 개인적인 사람이 다분히 공동체적 삶을 살며 일상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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