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10번 출구부터 인하대 캠퍼스까지[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대학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간다는 것※ 페미니즘에 대한 왜곡과 공격이 심각한 백래시 시대,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로 다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백래시 시대, 페미니즘 다시 쓰기” 스무 편이 연재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나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한 젊은 여자가 죽었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페미니즘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죽음은 내가 이전까지 만족하며 살아온 세계를 구석구석 무너뜨리고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다. 내가 살아온 스무 해 동안 아주 많은 여자가 죽었지만 그 죽음은 유독 이상했다. 누군가는 조현병이 문제라 진단했고 누군가는 ‘묻지마 살인’이라 이름 붙인 그 죽음에 대해, 나와 비슷하면서 전혀 다른 사람들이 같이 울었다. 나는 그때 내가 왜 우는지 잘 모르는 채로 불안에 떨었다.
페미니스트에게 가장 어려운 것: 페미니스트-되기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내가 ‘여자애들’과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여자애들’은 예민하고 친구 관계에 집착하며 까탈스럽고 복잡했다. 나는 단순하고 의리 있는 ‘남자애들’과 더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남자애들’이 같은 반 여자애들에게 순위를 매긴다는 소문을 들은 때에도 내가 상위권에 있다면 아무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친한 남자애가 ‘너는 다른 여자애들이랑은 다른 것 같아’라고 말했을 때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습관처럼 ‘남자애들’이 얼마나 쿨하고 멋진지, 그에 반해 ‘여자애들’은 얼마나 귀찮고 별 것 아닌 데에 목숨을 거는지 말했다.
그러다 스무 살에 처음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접하고서, 나의 십대 시절이 너무 부끄러워서 숨고 싶었다. 내가 여자인데도 여자를 욕하는 차별주의자였다고 생각했다. 친한 언니가 함께 ‘그 죽음은 여성혐오였다’고 고발하는 글을 쓰자고 제안했을 때, 나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여성혐오라는 말도, 페미니즘이라는 말도 들어본 적 없었다. 나는 그 죽음에 분노한 만큼 나 자신에게 분노했다. 마구잡이로 뻗어나가는 분노가 나의 동력이 되었다.
결국 언니와 함께 그 죽음에 대해 글을 써서 학교 게시판에 붙였다. 당시에 선배들의 권유로 가입했던 동아리 단톡방에는 금세 내가 쓴 자보 사진이 올라왔다. 남자 선배들은 칭찬인지 조롱인지 모를 말들로 내 글을 평가했다. 나는 화를 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다 자판을 두드렸다. “ㅋㅋㅋㅋ잘 읽어봐주세요.” 나는 여전히 그때 내가 그들에게 조롱하지 말라고, 장난치지 말라고 정색하고 화를 냈어야 했는지 잘 모른다.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는 데에는 이후로도 꽤 시간이 걸렸다. 나는 종종 친한 언니들에게 그런 말은 차별적이라며 제재를 받기도 했고, 페미니즘이 평등이라면 왜 남자만 군대에 가느냐는 동기의 말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세상에는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다. 페미니즘은 그런 나를 비웃으며 ‘따라올 수 있겠어?’하고 묻는 것 같았다. 더 똑똑하고 논리적으로 반-페미들의 말을 찍어누르고 싶었고, 말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가 피씨(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해서 주변 사람들을 놀래키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페미니즘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해도, 여성운동 워크숍이나 행사에 다녀와도, 나는 여전히 실수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말을 뱉고 선 넘은 장난을 치기도 했다. 여전히 페미니즘에 따라붙는 오래되고 악의적인 질문에 대해 멋지게 대답하지 못했고, 가끔은 내 논리 안에서 길을 잃었다. 온갖 데로 향하던 분노는 어디를 향해야 옳은지 판단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했다.
페미니스트에게 가장 어려운 것_찐최종: 페미니스트로 살기
대학은 생각보다 ‘지성의 전당’스럽지 않았다. 정의는 무엇인지, 삶 뒤엔 무엇이 있는지 토론하기보다 술자리에서 남자 동기의 클럽 후기를 듣는 게 더 익숙했다. 열정 가득한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질문이라도 던지면 학생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를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튕겨낸 것은 그곳을 떠도는 아주 오래되고 강력한 기운이었다. 교수라는 사람이 동성애를 욕하는 장면에도, 성폭력 피해 신고를 받은 인권센터가 피해 학생에게 ‘사과받고 끝내라’고 강요하는 장면에도, 과 종강파티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에 학생회가 침묵하는 장면에도 그 기운이 가득했다. 여기에 대체 무슨 지성이 있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학교에는 타 교수의 성폭력 가해를 고발하고 미투 운동에 동참한 교수님이 있었다. 그런데 학생대표자가 모여 회의하는 자리에서, 대표자들은 피해 교수님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인터뷰를 한 기사에 학교 재직 기간이 서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는 것을 근거로 댔다. 나와 친구들은 분노하여 학생자치기구가 얼마나 차별적인지 고발했고, 페미니즘 자치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우리는 사라진 지 오래된 총여학생회를 다시 세워, 학교 안을 떠도는 오래되고 강력한 기운과 맞서 싸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 싸움에서 우리는 상처받고 소진되었으며, 지친 이들은 다음에 보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욕먹어도 되는 외부인이자, 암흑의 페미 세력이 되었다.
나는 종종 그 죽음을 떠올렸다. 나와 나이대가 비슷한 여성들에게 어떤 계기이자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그 죽음은 우리의 동력이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여자가 죽는 세상에서, 너무 많은 여자가 성폭력에 노출되는 대학에서, 나는 망연해졌다. 더이상 누군가의 죽음을 활동의 동력으로 삼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쥐뿔만큼이라도 바뀌는 세상을 동력으로 삼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도, 나도 그리 빠르게 바뀌지는 못했다. 나는 새로운 동력을 찾지 못했고, 세상은 여성의 죽음을 멈추지 못했다.
무력감의 시기를 넘어
우리는 총여학생회를 만드는 데에 실패했고, 심지어 내가 알던 몇몇 학교에서는 멀쩡하게 일하던 총여학생회가 ‘남성 역차별’이라는 여론에 밀려 사라졌다. 그러나 모순적으로, 이 비극을 계기로 나는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힘을 합쳐 ‘유니브페미’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외부인’ 페미 세력의 공동체였다. 바뀌지 않는 대학에 분노하고,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연구하고 또 싸웠다.
대학 밖에서 대학을 얘기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대학은 재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에게 너무 많은 제약을 걸었다. 재학 중인 학교에서도 페미라는 이유로 외부인 취급을 당했는데, 폐쇄적인 대학은 매번 우리의 활동을 방해했다. 대학 캠퍼스라는 물리적인 공간이 차단당하자 어려움은 더욱 커졌다. 열심히 싸운 몇 년 동안 나는 스트레스를 받고, 다치며, 크게 아팠다. 페미니즘 리부트 물결과 ‘백래시’를 지나, 이제는 아무런 변화도 계기도 없는 무력감의 시기가 온 것 같았다. 응답 없는 대학 공동체가, 사라져가는 페미니즘 모임이, 정권을 잡는 차별주의자 정치인들이 그러한 믿음의 근거였다.
긴 휴가를 보내던 어느 날, 한 대학 캠퍼스 내에서 여성이 추락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간살인 혐의로 구속된 가해자는 그 여성의 동기생이었다. 화가 나고 절망적이었지만, 무엇보다 나를 괴롭게 한 것은 이제는 이런 일이 일어나도 2016년의 그때처럼 젠더폭력과 여성살해에 대해 함께 분노하고 소리칠 사람들이 없을 거라는 체념이었다. ‘어쩌면 좋지?’ 하는 생각 바로 뒤에 ‘내가 뭘 할 수 있겠어’라는 자조가 따라왔다. 나는 백래시, 대학 공동체의 붕괴, 신자유주의와 혐오정치 같은 것들을 변명으로 삼았다. 기자들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애써 이 고통스러운 사건에 집중하지 않으려고 하던 나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은 삐뚤빼뚤 손으로 쓴 두 장의 자보 사진이었다. ‘익명의 인하대생 A’가 작성한 그 글에는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의 분노와 서러움과 어떤 의지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어 또 다른 자보가 붙고, 또 다른 학교에서 자보가 붙었다. 감사하게도, 유니브페미에도 자보를 통해 연대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우리는 어떤 글을 쓸 지 한참 의논했다. 이제는 기자의 전화가 울려도 도망가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언제든지 페미를 할 거야
나는 스무 살 이후 계속해서 좋은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다. 한때는 나의 부족한 모습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언젠가는 나의 경험과 삶이 논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더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똑똑하게 갈 길을 제시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물론 그러한 고민과 노력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잠시 지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에 내가 알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 있다! 내가 페미니스트로 살았던 방법은 언제나 친구들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함께 고민하고 슬퍼하고 헤매고 싸울 친구들이 있다는 것, 꼭 곁에 있는 친구가 아니더라도 어딘가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는 페미니스트가 있다는 것. 그 사실은 놀랍게도 지치고 힘든 페미니스트를 벌떡 일어나게 만든다. 무얼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는 순간에도 여기저기 포진한 페미니스트들의 말과 행동과 이야기는 연료가 된다.
나는 어쩌면 모르는 이의 죽음을 내가 너무 정치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닌지, 혹시나 그 죽음이 나의 동력이 되면서 훼손되지는 않았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나의 페미니즘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 죽음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처음 가르쳐 준 언니, 같이 세미나를 하자며 눈을 빛내던 친구, 총여학생회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한 동료가 나의 동력이었다. 우리는 혼자서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되기보다는 들쭉날쭉하고 불완전하지만 뭉쳐있는 페미니스트들이 되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을 고민하기로 했다.
대학은 정말 단 한 순간도 평등하지 않았다. 더이상 성차별이 없다는 말, 학내 성폭력은 옛날 일이라는 말, 그렇기 때문에 페미니즘 자치기구가 없어져야 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 대학의 불평등을 고발하고 있다. 어떻게 구조적 성차별이 없고 성폭력이 끝났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대학에서 평등을 외쳐야 하고, 변화를 만들어가야만 한다.
백래시가 몰아치는 대학에서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할까. 무엇보다도, 나와 비슷하면서도 너무 다른 페미니스트 친구들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영웅담에서도 홀로 외롭게 악당을 처치한 영웅은 없다. 우리는 동료이자 팀이자 세력이 될 사람들이 필요하다. 아마 당신도 ‘우리’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당신을 페미니스트로 살게 할 동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 수가 많든 적든, 혹은 언젠가 흩어진다고 해도,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연대할 것이다. 연대할 수 있다면, 우리는 페미니스트로 계속 살아갈 것이다.
[필자 소개] 윤김진서: 운동(exercise) 전파가 취미인 페미니스트 활동가. 주변 활동가들이 모두 1인 1운동을 하게 되는 그날까지 멈출 생각이 없다. 지금은 유니브페미 운영위원장이자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실 비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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