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진실이 통할 것이다, ‘봄바람’이 분다

다큐멘터리 영화 <봄바람 프로젝트 - 여기, 우리가 있다>

박주연 | 기사입력 2022/09/11 [16:38]

결국은 진실이 통할 것이다, ‘봄바람’이 분다

다큐멘터리 영화 <봄바람 프로젝트 - 여기, 우리가 있다>

박주연 | 입력 : 2022/09/11 [16:38]

올 봄,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다른 세상을 만나는 40일 순례, 봄바람’(봄바람 순례단)이 서울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불평등한 SOFA(주한미군 지위협정) 개정 운동,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반대 운동, 용산 참사 규명 운동,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 등을 함께해 온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신부와 평화바람 활동가들, 그리고 길동무들로 구성된 봄바람 순례단은 40일 동안 38개 지역과 95곳의 투쟁 현장을 찾았다.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 노동자들이 노동의 권리를 외치며 싸우는 곳,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드높이는 곳, 동물들이 자신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투쟁하는 이들이 있는 곳,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지난한 시간을 견뎌내는 사람들과 만났다.

 

이 만남과 현장의 이야기를 카메라가 담았다. 미디어 활동가 21명이 ‘다른 세상을 잇는 현장 미디어 프로젝트 봄바람’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상들이 모여 완성된 영화가 <봄바람 프로젝트 - 여기, 우리가 있다>이다. 영화는 「기후위기의 시대」, 「빼앗긴 노동」, 「있다, 잇다」, 「기억투쟁」, 「평화연습」 다섯 테마로 총 18편의 작품이 담겼다.

 

▲ 옴니버스 다큐멘터리 영화 <봄바람 프로젝트 - 여기, 우리가 있다>(김선구, 김설해, 김성은, 김현석, 김환태, 노은지, 박명훈, 박배일, 박상헌, 박영길, 배혜원, 신효진, 안창규, 양동민, 오이, 윤가현, 이마리오, 이혜주, 장민경, 정원석, 하샛별 감독, 2022) 장면 중, 순례단이 즐겁게 행진하는 모습.

 

지난 3일, 서울 녹색전환연구소에서 열린 “봄바람 상영회”에서 영화를 접한 후, 차오르는 뜨거운 감정과 함께 희망이 느껴졌다. 변화는 더디기만 하고 기후재난과 불평등은 더 심화되는 것을 목격하는 요즘 떠올리기 어려운 단어였던 희망을.

 

투쟁 현장의 이야기를 접하면 마음이 무겁고 힘들어지기 마련인데, 영화를 보면서 절망적이라는 생각보다 희망을 느낄 수 있었던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영화가 제목처럼 ‘여기, 우리가 있다’는 걸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었기 때문일 테다. 그리고 그 ‘우리’는 충분히 희망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영화가 더 많은 곳에서 희망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길 바라는 마음을 간절히 담아, 영화에서 소개된 이야기 중 일부를 간단히 전달하고자 한다. 상세한 이야기는 영화를 통해 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놓치지 마시라. 아니, 그 기회를 적극적으로 만드는 걸 추천한다.

 

기후위기 시대에 석탄화력발전소 짓는 나라

 

영화는 월성원자력발전소가 있는 지역 주민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은 ‘안전’하다고 주장하지만 서울 한강 옆엔 절대 만들어지지 않는 원자력발전소. 그 근방에 살아가는 이들은 암 등의 질병에 걸리고 건강을 위협받고 있다. 하지만 별다른 대책도, 지원도 없이 이주를 시켜달라는 주민들의 요구에도 묵묵부답이다. “대도시나 멀리 사는 사람들은 그냥 전기 스위치 하나 올리면 불이 들어오니까, ‘이게 어디서 오는지,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생각 없이 (전기를) 너무 쉽게 쓰는 거에요.”라는 월성 주민의 말이 정곡을 찌른다.

 

강원도 삼척엔 탄소중립(탄소 배출량을 최대한 감소시키고 흡수량은 증대하여 순 배출량이 0이 된 상태)을 외치는 기후위기 시대라는 말이 무색하게 석탄화력발전소가 만들어 지고 있다. 삼척은 1990년대에도 핵발전소 건립 논의가 있었던 곳으로, 많은 시민들이 투쟁한 결과 백지화된 바 있다. 하지만 2005년엔 핵 폐기장을, 그리고 2010년 또 한번 핵발전소를 만들겠다고 해서 시민들도 다시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지금, 석탄화력발전소가 만들어 지고 있다. 발전소가 가동을 시작하면 막대한 온실가스가 배출될 예정이다.

 

▲ 영화 <봄바람 프로젝트 - 여기, 우리가 있다> 중 “삼척화력발전소-석탄을 넘어서” 장면. 삼척화력발전소 건설 현장.

 

충북 청주시에는 대규모 LNG(액화천연가스) 발전소가 지어지고 있다. LNG는 친환경 발전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자주 껐다 켜야 하는 운영 과정에서 재가동 시마다 불완전연소로 인해 유해물질이 대량 배출되고 미세먼지를 증가시키는 것으로 드러났다.

 

방사성폐기물 처리 문제와 사고 위험, 온실가스 배출, 지하수 오염 등 환경 위기와 지역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발전소와 초고압 송전탑, 화력발전소 등이 계속 만들어지는 건 개발, 경제 발전이라는 이유로 축약된다. 어떤 지역의 소수가 희생하면 다수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투쟁하는 이들은 더 많은 걸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일례로 “이전의 석탄발전소는 공기업이었지만, 새로 만들어지는 LNG 발전소는 전부 다 민간이 참여하는 컨소시엄을 통해 LNG 발전소를 민영화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석탄발전소 대신 자본의 발전소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말이 서늘하게 느껴진다.

 

10년, 아니 20년 넘도록 투쟁하는 이들이 없었다면 ‘친환경적’인 발전소를 만들고 ‘지역 경제’를 위한다는 말 뒤에 가려진 이런 사실들을 알 수 있었을까?

 

공장, 호텔, 비행기, 콜센터에서 일하던 노동자의 빼앗긴 권리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던 정부 출범 이후에도 노동 현장에서의 부정의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거나, 제대로 쉬지 못하거나 수당을 받지 못하는 일도 있고, 순식간에 일자리를 잃기도 한다. 이런 일들을 ‘어쩔 수 없지’ 하고 넘기는 게 아니라 ‘잘못되었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전국 곳곳에 있다. 그들이 일했던 곳은 공장이었고, 호텔이었고, 비행기 안이었고, 콜센터였다. 봄바람 순례단은 이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목소리를 보탠다.

 

투쟁을 하는 이들의 사연은 다르지만 또 비슷하다. 여전히 노조라고 하면, 과격한 이미지와 중장년 남성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지만 그것도 옛말이다. 비정규직 노동, 하청 노동 등이 급증하면서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노동 현장에 주로 유입되는 여성 노동자들이 많아졌다. ‘남성들의 직종’이라 여겨졌던 공간에 들어간 여성들도 있다. 현대건설기계 사내하청업체 서진ENG 소속 용접사 변주현 씨도 그 중 하나다. 그와 동료들은 ‘코로나19 팬데믹’을 핑계로 한 폐업 후 해고 노동자가 되었다. 이들은 현대건설기계 측에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다. (관련 기사: 20대 여성 용접사 “평생 용접하고 싶어서 투쟁합니다” https://ildaro.com/9048)

 

코로나19 팬데믹을 핑계로 잘려나간 건 아시아나케이오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공공운수노조 아시아나케이오지부 김계월 지부장을 비롯한 이들은 부당해고에 맞서 투쟁을 시작했다. 2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대부분 해고 노동자들은 정년을 맞이해버렸지만, 한 명 남은 김계월 지부장이라도 복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관련 기사: 63년생 김계월 파이팅! https://ildaro.com/9063)

 

▲ 영화 <봄바람 프로젝트 - 여기, 우리가 있다> 중 “콜센터 노동자들의 봄날” 장면. 민간위탁을 철회하고 직접 고용할 것을 요구하며 한국장학재단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 중인 노동자들이 서로 부둥켜 안고 울고 있다.

 

봄바람 순례단과 문정현 신부를 보자마자 반가움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한국장학재단 콜센터 노동자들도, 고용불안을 조장하고 중간착취를 용인하는 민간위탁을 철회하고 재단이 직접 고용할 것을 요구하며 투쟁했다. 점거 농성 중이라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이들은 “그래도 우리가 나갔을 때, 세상이 조금은 바뀌어 있지 않을까요?”라고 희망을 내비친다. 눈물을 흘릴지언정 변화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 세상에 희망 따윈 없는 것 같다’고 쉽게 비관했던 나의 태도를 반성하게 만든 장면이었다.

 

“이 아픔이 폭발하면 그야말로 혁명이다”

 

옴니버스 다큐멘터리 영화 <봄바람 프로젝트 - 여기, 우리가 있다>는 완전 새로운 현장을 발굴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민사회 운동에 관심이 있거나, 최근의 사회 변화와 문제들에 대해 눈여겨봐 왔던 사람이라면 ‘아, 저기 OO 투쟁하는 데구나’ 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내가 알았던 것이 단편적인 것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총 18편의 이야기, 각각의 작품은 약 5~8분밖에 되지 않지만, 그 이야기 속엔 핵심이 담겨있다. 신기하게도 그 핵심을 접하고 나면 새로운 걸 알게 된 기분이 든다.

 

영화엔 기후위기와 노동 문제뿐만 아니라 차별금지법 제정, 여성가족부 폐지 반대, 장애인 이동권 보장, 난개발 반대, 세월호와 스텔라데이지호(2017년 남대서양 해역에서 침몰해 22명이 실종됨) 진실 규명 요구,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의료 공백,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반대 등 놓쳐서는 안 되는 사회의 현 이슈들이 꾹꾹 담겨있어 무척 유익한 정보원이기도 하다.

 

그리고 굳이 덧붙이자면, 재미있기도 하다. 다양한 영상제작자들이 참여한 만큼 영상들이 각기 다른 형태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영화의 끝자락, 윤석열 대통령 당선을 알리는 뉴스 자료 화면이 등장한다. 이어 등장한 봄바람 순례단 활동가들은 “이명박, 박근혜 시절도 살았는데 이번에도 살 수 있지 않겠냐”며 웃는다.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를 잘 지켜내고 우리의 말을 가꾸면” 결국 진실은 통할 것이니, 함께 뭉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보자” 제안한다.

 

▲ 영화 <봄바람 프로젝트 - 여기, 우리가 있다> 중 “평화로” 장면. 봄바람 순례단, 평화운동가들이 피켓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 여전히 희망과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긍정적인 활동가여서가 아니라 40일 동안 전국 방방곳곳을 돌아다니며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길 위에서, 산 속에서, 심지어 바다 위에서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 불평등을 해소하고 차별과 착취, 혐오에 맞서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봄바람 순례단 오두희 활동가의 “(앞으로의 일들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걱정할 게 아니라 함께 목소리를 내러 나가면 되니까.

 

영화 속에서 문정현 신부가 했던 말이 있다. 투쟁 현장에서의 힘듦과 아픔을 목격한 그는 “이 아픔이 폭발하면 그야말로 혁명이다”라고 했다. 아픔에 잠식되는 게 아니라 아픔을 폭발시켜 혁명을 이끈다니, 짜릿한 말이 아닌가. 그러니까 일단, ‘봄바람’부터 맞으시라.

 

※영화 <봄바람 프로젝트 - 여기, 우리가 있다>는 다가오는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9월 22일~9월 29일)에서 상영될 예정이며, 공동체 상영회 신청도 받고 있다. 상영회 신청 링크: https://forms.gle/1yCdTMixTX7SesdD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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