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 반지하 거주자들 “내가 LH 사장이 되겠다”공공임대주택 예산 삭감한 윤석열 정부에 항의하며 출사표 던져“국민주거생활의 향상과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을 도모”(법률 제9706호 한국토지주택공사법)하기 위해 설립한 LH(한국토지주택공사)의 수장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지난 8월 문재인 정부에서 취임한 공공기관장이었던 LH 사장이 사임한 후, 신임 사장 공모에 출사표를 던진 이들이 20일 오전 11시, LH 수도권도심정비특별본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언론에서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교수, 국회의원 등이 아니라 쪽방 주민, 고시원 거주자, 반지하 청년 세입자, 공공임대주택 대기자 등 4명이다.
소위 ‘전문가’들이라 불리는 부동산 시장주의자, 토건개발 시장주의자가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 LH 사장이 되겠다며 나선 것이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반지하, 쪽방촌, 고시원, 비닐하우스 등의 ‘불량주거’에서 살아가고 있는 당사자로서, “국민주거생활의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LH 사장이 해야 하는 일을 분명히 짚었다.
공공임대주택 예산 삭감, 분노한 민심을 대변하는 목소리
이 지원자들이 이렇게 나서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주요 이유는 윤석열 정부가 공공임대주택 예산을 삭감한 것에 대한 분노다. 지난 여름 반지하에서 폭우를 피하지 못해 사망한, 재난불평등 참사는 ‘불량주거’ 문제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매번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주거취약층 당사자들을 비롯하여 주거권 운동단체들은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확대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8월 30일 발표된 윤석열 정부의 2023년 예산안에 따르면 공공임대주택 예산안은 15조 1천억원으로, 올해의 20조 7천억원에서 약 30%나 삭감되었다.
“윤석열 정부는 이전 문재인 정부보다 적은 수인 매년 10만호의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공약한 바 있는데, 내년도 예산안은 그나마 줄어든 공공임대주택 공급 공약마저도 파기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에 다름 없다.”
‘폭우참사로 희생된 주거취약계층, 발달장애인, 빈곤층, 노동자 추모공동행동’은 내년도 예산안에 크게 반발하며 “공공임대주택 예산 삭감안을 철회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예산이 줄어든 것뿐만 아니라 “청년원가주택과 같은 분양주택 공급과 분양주택융자 관련 예산을 3조 가량 증액”한 점은 “저소득층을 위한 주거복지 예산을 줄이는 대신, 아파트 구매가 가능한 계층에게 지원을 집중하겠다”는 방침이며, “주거취약계층의 현실을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주거취약 계층을 대변하는 이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현재 LH 사장으로 거론되는 이들은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던 부동산 시장주의자, 쪽방촌 공공주택 사업 등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며 규제완화를 통한 민간개발로 주택공급을 주장하는 토건개발 공급 만능론자, 박근혜 정부에서 ‘빚내서 집사라’ 정책을 추진했던 자”들이라는 지적이다.
20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원호 빈곤사회연대 집행위원장은 “이런 자들은 부적격 후보자라 생각한다”고 밝히며, “땅 장사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폭염과 한파 등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불평등 시대에 죽지 않을 안전한 집, 쫓겨날 걱정 없는 집, 안정적인 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참가자들은 이를 위해선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더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공임대주택 더 많이 짓는 LH 사장이 되겠다!
얼마 전까지 서울 용산역 텐츠촌에 있었다는 박재혼 씨는 “20년 가까이 텐트에서 생활”을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올해 3월, 용산역 구름다리 공사가 시작되면서 텐트 철거를 요구 받았다. 다행히 주변인과 활동가들의 조언으로, 주거취약계층 주거지원사업을 통해 임대주택 입주 신청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구청에선 박재혼 씨가 주거취약계층 주거지원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며 고시원에 들어가라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던 중 텐트촌에 화재가 발생했고, 박 씨는 짐을 모두 잃게 됐다. 그제서야 구청은 주거취약계층이라며 임대주택 안내를 했다고 한다.
박재혼 씨는 일단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공공임대주택 신청을 했지만, 신청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입주대기자 630번대라는 답신을 받았다. 그는 “주위에선 언제 (임대주택에) 들어갈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고 한다”, “내가 입주할 때까지 살아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항의했다.
기자회견에서 박 씨는 “정책 대상자의 말부터 듣고, 현실과 맞지 않는 잘못된 부분을 고쳐야 할 때”라며,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LH 사장의 역할이고, 그렇기 때문에 사장 공모에 지원한다”고 밝혔다. 그는 공공임대주택을 신청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는 건 물론 “오랫동안 살 수 있으며, 지금 생활하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살 수 있는 임대주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 신림동 반지하에 살고 있는 청년 세입자 박도형 민달팽이유니온 운영위원은 “지금 LH 청약 홈페이지 접속해 보면, 서울의 1인 가구 청년이 신청할 수 있는 LH 임대주택은 딱 하나 나온다”고 했다. 그 임대주택은 “현재 생활반경과 멀리 떨어진 곳이며, 4평 공간”이라고 덧붙이며 “이마저도 지금 가진 돈으론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어쨌든 시세보다 싸지 않느냐는 무책임한 말을 하고, 공공임대에 투입될 자원인 종부세를 감세하는 국가를 규탄”하면서, 박도형 운영위원은 “부동산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헛소리와, 개발과 민영화가 답이라는 거짓말을 일삼는 자를 LH 사장으로 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고시원에서 살고 있는 50대 중증 지적장애인 나경동 씨 또한 공공임대주택 확대를 LH 사장 지원 사유로 밝혔다. 지금 생활하는 고시원에서 진드기와 바퀴벌레에 물려 병원을 오가며 고생하고 있다는 나경동 씨는 작년 8월 LH에서 제안한 임대주택을 가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집은 관리비만 8~9만원 대인 도시형생활주택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기초생활수급자의 50만원 조금 넘는 생계비에서 8~9만원의 관리비를 내는 건 큰 부담이고, 이런 상황이라면 나 씨는 계속 진드기와 바퀴벌레가 나오는 고시원에 머물 수밖에 없다.
나경동 씨는 “나처럼 고시원 같은 열악한 곳에 살면서 임대주택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오래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임태주택에 들어갈 수 있게, 임대주택을 많이 짓기 위해 LH 사장이 되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쪽방촌 공공주택 사업 확대하라
지지부진한 쪽방촌 공공주택사업 정비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지원 사유를 밝힌 이도 있다. 서울 동자동 쪽방 공공주택사업 추진 주민모임의 백광헌 부위원장은 “2021년 국토교통부와 LH가 동자동 쪽방을 공공주택사업으로 정비하여 쪽방 주민들이 임대주택에 들어갈 수 있게 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이후 “진전되는 사항이 없다”고 꼬집었다..
백광헌 부위원장은 심지어 “서울시와 국토교통부가 공공주택사업을 반대하는 건물주들의 의견을 수렴한다는 보도가 언론 등에 넘쳐나고 있다”고 밝혔다. 주민모임을 만들어 기자회견, 서명, 집회 등의 활동을 지속하며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좀처럼 진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답답함을 토로한 그는 “다시 한번 희망을 갖고, 공공주택사업이 진행되도록 하기 위해 LH 사장 공모에 지원한다”고 했다.
“부족한 게 많겠지만,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더 전진하여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며 지원할 것을 다짐한다”고 지원 소회를 밝힌 백 부위원장은 “쪽방촌 공공주택 사업을 전국으로 확대해, 쪽방 주민들의 주거권이 보장되고, 안전하고 안정된 집에서 살 수 있는 그 날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주민들을 거리로 내모는 민간개발자가 아닌, 공기업의 건립 취지에 맞는 주거복지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 김소연 전국철거민연합 조직위원, “집을 투자의 수단으로 여기는 자가 아니라,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권리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는 이가 LH 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이정민 집걱정없는세상연대 간사 등이 지원자들의 선언을 지지했다.
이 기사 좋아요 7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