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 사회가 돌봄에 얼마나 취약한지 여실히 드러내었고, 서로 돌보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돌봄 사회를 위하여,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돌봄 현장을 조명하고, 다양한 돌봄의 경험과 아이디어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젠더/혈연의 블랙홀에 빠진 노년/돌봄의 곤경
영석과 나는 열흘 차이로 태어났지만, 할머니는 영석의 태몽만 꿨다. 꿈에서 앞마당에 나갔는데 나무에서 알이 굵은 대추가 우수수 떨어져 치마폭을 벌려 대추를 한가득 받았다고, 그게 영석의 태몽이라고 했다. 내 태몽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아니면 대추가 여러 알이니 그중에 하나는 나일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할머니를 붙들고 떼를 쓰듯 물어본 적이 있다. 할머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추는 아들이다. 이건 석이가 나중에 큰 인물 된다는 꿈이야.” 할머니는 늘 그렇게 좋은 건 죄다 영석의 앞에 갖다 붙였다.
영석과 사촌 관계인 여성 화자 ‘나’가 떠올리는 말이다. 할머니가 이처럼 특별히 귀하게 여긴 손자 영석은 늘 자신감이 넘쳤다. 사람들이 저를 좋아하는 줄 잘 알았다. 그런 영석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할머니가 그리도 좋아하는 대추를 따기 위해 예전 살던 집 담장을 넘는다. 볕이 유난히 따뜻한 자리에 심은 대추나무에서는 달큰한 대추가 그야말로 주렁주렁 열리곤 했지만, 영석의 아비가 집을 지키지 못해 남의 손에 넘긴 것이다. 긁히고 넘어지면서 시멘트 담을 넘어 대추나무에 오른 영석의 효심에 감동한 ‘나’는 “할머니 이 대추 드시면 자리 털고 일어나실지도 몰라. 이게 보통 대추냐, 네 정성 때문이라도 할머니 오래 사시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진 영석이 망설임 없이 말한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대추를 기분 좋게, 맛있게 드시고, 그리고 ······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 올가을이 지나기 전에 꼭.”
김유담의 소설집 『돌보는 마음』에 실린 첫 번째 글 「대추」의 한 대목이다. 화자와 함께 효심의 목격자가 되는 듯했던 나는 이 반전에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대략 다들 짐작하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던 사실을 수식어 다 빼고 날것으로 들이민 것 같다고나 할까.
「대추」는 ‘가족과 돌봄, 그리고 젠더’라는 주제를 삶의 구체적 면면에서 포착하려는 이 책의 입구를 담당하고 있다. 입구로서 이 글은 현재 한국에서 돌봄‘위기’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그야말로 핵심적으로 드러낸다. 돌봄은 너무나 오랫동안 ‘피를 나눈’ 친족 내의 일, 특히 여성들의 일이었다. 철두철미 젠더화되어 있는 활동이었다는 의미다. 남성은 태몽에서부터, 즉 태어나기 전부터 귀하게 대접받고, 그 대접이 가능하도록 우선은 가족 내에서, 다음엔 사회 내에서 여성들이 온갖 종류의 돌봄/노동을 수행해야 했다. 「대추」에서 노골적으로 ‘폭로’하고 있듯이, ‘여성 돌봄 계보’가 지켜 온 남성 존재들은 친족의 돌봄에 관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매우 냉정한 실리주의를 추진한다. 최근에 몇몇 남성 돌봄자의 글이 나오면서 주목받고 있지만, 그 사실 자체가 젠더화된 돌봄 현실을 확인시킨다.
정의로운 돌봄 순환이 되지 않는 사회
2025년이면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는 한국사회에서 이 젠더/혈연 블랙홀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직면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병들어 남의 손에 몸을 맡기는 그런 추레함으로 늙는 일 따위는 절대 용납하지 않으리라. 이게 현재 초고령사회를 코앞에 둔 한국 사회에서 나이듦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평균 태도다. 주체적 개인의 확고한 선택처럼 보이는 이런 태도는 그러나 돌보고 돌봄받는 일의 선순환이 불가능한 현실에 대한 불안한 반응일 확률이 높다. 자신의 등 뒤에서 거침없이 내뱉어지는 ‘올가을이 지나기 전에 꼭 죽었으면 좋겠어’라는 말에 대처할 방도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리라.
사실, 대처 방도는 개인 차원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집단적 당사자 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의존하는 노년 정체성을 부인하는 시류 속에서, 당사자성을 갖는 집단 구성이 형성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돌봄과 관련해 노년이 처한 곤경은 신체적 조건에 있다기보다는 바로 이러한 모순된/부인된 정체성 인식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노년의 곤경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수명은 길어지고, 서로 다른 생애 단계나 연령대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시공간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노년에 관한 덜 매개된 직접적인 접촉이나 이해, 관심이 얇아지는 사회 전반적인 상황에서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노년 돌봄은 아무리 ‘가족’이 해도 힘겨울 수밖에 없다. 돌봄이 필요한 노년도 돌봄을 책임져야 하는 가족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돌봄이 나를 호출했다’라거나, ‘어느날 갑자기 나는 보호자가 되었다’는 말은 이러한 당혹을 가리킨다. 그리고 갑자기 보호자로 호출된 사람의 젠더는 가용 자원의 범위와 함께 맞닥뜨린 당혹과 지속되는 곤경의 내용을 결정한다.
정의로운 돌봄 순환과 포괄적 돌봄 정책이 여전히 너무나 먼 이상에 불과한 현재, 특히 노년 돌봄은 노년 당사자에게나 돌봄자에게나 매우 어려운 물리적, 윤리적 과제다. 우선 아동 양육과 달리 노년 돌봄에서는 끝을 상상하거나 소망하기 어렵다. 그 끝은 의존자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적 의미가 있는 삶과, 단순한 생명일 뿐인 삶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있다고 간주하는 사회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후자 쪽에 가까워지는 노년을 돌보는 건 갈등을 심화시킨다. 개인 차원에서나 사회 전반에 걸쳐서나 돌봄 역량의 전반적 감소가 감지되는 현재로선 그러한 경계 짓기 자체가 이데올로기 아니냐고 토론할 여지도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좋은 돌봄을 받으며 잘 늙을 수 있을까. 이제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에서 2021년 요양보호사들을 심층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좋은 돌봄의 내용과 가능성을 탐색해보자.
요양보호사들이 들려준 ‘돌봄노동’ 이야기
질병과 노쇠로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할 때 복지체계가 제공하는 돌봄은 방문간호와 데이케어가 있고, 이게 어려워지면 요양병원-재활병원으로, 그것도 어려워지면 요양시설로 의존하는 몸의 이동이 이루어진다. 혼자 사는지, 가족과 함께 사는지에 따라, 그리고 가족이 돌봄서비스 체계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얼마큼 확보하고 있는지에 따라 의존의 양상이 달라진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의 대상이 되기 위해 등급을 받는 것조차, 정보를 갖춘 관련자들의 협업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다.
요양원, 즉 요양시설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노년이 ‘마지막’으로 가는 곳,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여겨진다. 그러기에 거의 대부분 당사자 본인이 아니라 보호자-돌봄자가 결정하게 된다. 삶이 지속되는 장소, 즉 ‘집’이 아니라, 삶은 멈추고 생명만이 유지될 뿐인 ‘마지막’ 거처로 상정하고 입소를 결정하는 경우, 실제로 요양시설은 삶이 가능한 집이 될 확률이 낮아진다.
요양시설에 있는 노년들은 인지장애의 정도와 무관하게 늘, 거의 예외 없이,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고, 이 소망에 응답하기 어려운 보호자는 ‘죄책감’에 분열되는 마음으로 산다. 집에서 가족의 돌봄을 받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살아온 삶의 의미를 완성한다고 믿는 문화적 관습이 여전한 한국 사회에서 보호자인 가족은 극한 상황을 견디면서라도 어떻게든 집에서 돌보려고 한다. ‘아직 요양시설에 보낼 정도로 상태가 그렇게 나쁜 건 아니다’라는 판단은, 요양시설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더 돌보겠다는 선택을 의미한다. 그래서 요양시설은 ‘모시는’ 장소가 아니라 ‘보내거나 맡기는’ 장소가 되어버린다.
“요양원은 아직도 인식이. 보살핌을 받으러 오는 게 아니라 ‘식구들이 여기다가 갖다 버린다.’ 솔직히 여기 오시는 분, 면회 오시는 분도 있긴 있어요. 근데 안오시는 분이 더 많아요.” –요양보호사 A (구립 요양시설 근무)
그러나, 우리 옥희살롱 연구활동가들이 만난 요양보호사들이 들려주는 ‘돌봄노동’의 내용은 이러한 획일적인 관점에 다양한 균열을 내고 있었다. 이들은 가족이 아니라 돌봄 종사자이기 때문에, 가족과는 다른 입장에서 노년을 만난다.
인지 장애증이 있는 노년을 돌보는 가족은 돌봄의 힘겨움과 고립 때문만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도 고통을 겪는다. 직업인으로서 요양보호사들이 만나게 되는 노년은 이런저런 증상 때문에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환자다.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갖는 취약성에 더해 한결 더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이다. 이들은 증상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대응하며 가능한 한 ‘좋은 돌봄’으로 그 취약성에 응답하려 노력한다.
현재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제공하는 수가가 터무니없이 낮아서 돌봄 자체가 ‘시설화’될 지경이지만, 그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이들은 좋은 돌봄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는 돌봄을 해내고 있다. 이들을 만나면서 든 생각은, 방문요양이나 데이케어로도 돌봄 필요가 채워져서 익숙한 집에 계속 머물 수 있으면 좋고, 요양시설로 이동해야 한다면 그곳을 ‘집’으로 만들면 된다는 것이었다.
‘집’은 실제이기도 하고 관념/환상이기도 하다. 요양시설에 입소해 사는 노년들은 막상 명절 때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가도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코로나 재난 시 예방적 코호트로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 있던 요양시설이 많았지만, 요양보호사들이 낮과 밤을 함께 했기에 노년들은 그 상황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곳을 생명 유지만을 위한 ‘단순 요양’이 아니라, 삶이 있는 집으로 만들어주는 친밀한 요양보호사들 덕분이다.
‘딸처럼 며느리처럼’이 아니라 ‘전문적으로’
제조업 공장의 생산 컨베이어벨트처럼 돌봄이 시계추에 따라 ‘생산’되어야 하는 곳에서, 그들은 매뉴얼을 넘어, 느낌과 온기와 교감을 힘껏 지켜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노동을 ‘우리 일이 그런 게 아니잖아요’라는 말로 정의한다. 그런 게 아니기 때문에 그 일은 ‘그럼에도, 차마, 생겨버리는 책임‘ 등으로 전개된다. ‘마음의 복잡한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노년 돌봄의 최전선을 지킨다고 할 수 있는 요양보호사들을 심층 인터뷰하면서 매번 받았던 마음의 충격/감동은 바로 이들의 ‘복잡한 마음의 드라마’와 관련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도 좋은 돌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억제대를 사용하지 않으면 어르신들이 위험하고, 사용하면 노인 학대가 되는 상황에서 무엇도 선택할 수 없는 돌봄 노동자들이 다치고 지쳐서 일을 그만두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요양보호사 협회장인 정찬미의 말이다. 이 불가능한 상태가 돌봄현장의 기본값이다. 그래서 ‘좋은 돌봄’을 어떻게든 가능케 하려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마음을 비워야 마음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때론 ‘여시’가 되기도 하고, 때론 배우가 되어 ‘연기’를 하기도 하며, 때론 같이 홀라당 벗고 목욕을 하며, 그들은 노년들의 ‘삶’을 지킨다.
“뭐 ‘인권보호, 인권보호’ 하잖아요. 근데… 우리들은 뭐냐고요. 어디다가 하소연할 만한 데가 없어요. 막 꼬집고 머리 잡아당기고 막 욕도 심~한 욕설을 하고, 막… 그거를 수용을 해야 일을 해야겠더라고요. (…) 그걸 담고 하면 좋은 마음이 안나와요. 그건 잊어버리고. “아이고, 저는 욕하셔도 좋아요.” (웃음) (동료 요양보호사들에게는) “그러지 마~ 사람인지라 뭐 화를 안 낼 수야 없지만, 그러지 마.” 마음을 비우고 일을 해야 해, 마음을 비우고…” –요양보호사 B (요양원 근무)
“저는 맨날 아침만 조회시간에 쌤들한테, “우리는 여기를 들어올 때는 마음을 집에다 내놓고 와라, (웃음) 그러고 집에 가서 다시 우리는 딱 (마음을) 집어넣는다. 이렇게 해야...” 왜냐하면 지금은 정말, 예전에도 그랬지만, 어르신들을 조금만 하면 ‘인권침해’다 뭐다 해서 야단하시잖아요. ‘방임이다’ 막 이렇게 하시니까. 어쨌든 큰소리 나지 않게. 어르신들 즐겁게 하면서 딱~ 저는 이제 좀 여시를 떨죠.” -요양보호사 C (요양원 근무)
사회서비스원 소속으로 방문요양을 하고 있는 요양보호사 D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노년들이 가장 원하는 돌봄이 무엇인지 또렷이 알려준다.
“제가 생각했던 1순위부터 5순위까지 고마움 순서가 있잖아요. 그게 완~전히 빗나갔어요. 그런데 그 어르신들이 대체로 고마워한 게, 냄새 나잖아요. 몸에. 집에 냄새 나잖아요. 그런데 더럽다고 다 어디를 가도 일정 거리를 두는데, 선생님이 내 몸을 만져줬을 때. “내가 이래 말해도 될랑가 모르겠다. 선상님이 나 젖탱이 만지고, 어디 갈 때 머리 빗겨주고, 선생님 루즈로 같이 발라주고, 내 더럽다 안하고 내 몸을 만져줄 때”. 이게 제~~일 고마운 거래요. 다른 이용자도 대부분 첫째 고마운 게, “나를 선생님이랑 똑같은 사람으로 대해줄 때. (…) 왜 선상님라고 나한테 냄새가 안나고 안 더럽겠어.” 이 얘기를 모든 공통점이 이거였어요.“ -요양보호사 D (사회서비스원 근무, 방문요양)
필요한 것은 ‘딸처럼 며느리처럼’이 아니라 ‘전문적으로’다. 전문적으로, 그것도 ‘우리 일이 그런 게 아니잖아요’의 바로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돌봄자의 계획과 요령과 숙달된 기술, ‘마음을 비움으로써 마음을 쓰는’ 돌봄이다. 이런 돌봄은 가족이나 혈연의 고리를 벗어날 때, 다시 말해 혈연의 독박돌봄을 벗어날 때 오히려 가능하다. 혈연 가족의 경우 마음을 비우는 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봄이 혹은 돌봄관계가 너무나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돌봄이 시민들의 필수 역량이 된다면
그러나 우리 옥희살롱 연구진들은 우리가 확인할 수 있었던 이 좋은 돌봄 사례들이 ‘작은 영웅들’의 서사로 소비되고, 결과적으로 돌봄노동 현장의 구조 개선을 지연시킬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돌봄실천이나 노동이 ‘어떤 성격’의 활동인가를 요양보호사들의 경험을 통해 배우고 싶었으며, 이것을 어떻게 하면 모든 시민들의 ‘필수 지식과 경험’으로 만들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하자고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싶었다.
돌봄이 모든 시민들의 필수 역량이 된다면, 궁극적으로 커뮤니티 케어와 재택사가 가능해져서 요양시설이 필요 없어질 것이다. 혹은 요양시설 자체가 노년 당사자가 선택하는 ‘집’이 될 것이다.
친지와 돌봄 전문가가 적절하게 돌봄을 나누고 실천하는 사회, 그 실천을 돌보고 지켜주는 사회로 전환하지 않으면 노년/돌봄의 곤경은 더욱 심화할 것이다. 누구나 나이 들고 누구나 돌봄이 필요하다. 시민 하나하나가 이 ‘보편성’에 자기만의 구체적 감각과 실천, 경험을 채워넣기를, 그렇게 자기만의 돌봄 이야기를 짓자고 제안한다.
[필자 소개]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연구활동가. 저서로 『흰 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의 페미니즘』(2021) 『노년은 아름다워』(2017)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공저, 202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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