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노년여성 작가와 ‘존엄한 글쓰기’〈책방에서 밑줄 긋기〉 이순자 유고 산문집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연재 소개] 여성들의 말과 글이 세상에 더 많이 퍼지고 새겨져야 한다고 믿으며, 서점에서 퍼뜨리고 싶은 여자들의 책을 고른다. ‘살롱드마고’의 신간 책장에서 마음에 새겨지는 책을 한 권씩 밑줄 그으며 꼭꼭 씹어 독자들과 맛있게 나누고자 한다.
‘실버 취준생 분투기’를 쓴 故 이순자 작가
나를 어제처럼 살게 하지 마시고 어제와 함께 살게 하소서 (…) 내게서 떠나는 것들이 조용히 문지방을 넘게 하시고 다가오는 것들을 가만히 받아 안게 하소서 (…) - 이순자 유고 시집 『꿈이 다시 나를 찾아와 불러줄 때까지』 수록작 ‘신년의 기도’에서
‘거리두기’가 잘 되지 않는 글들이 있다. 날것의 삶이 담긴 이야기 속에 한 존재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이 느껴질 때 독자에게도 강렬한 에너지가 전이되기 때문이다. 1년 전 SNS를 중심으로 수없이 공유되며 화제가 된 이순자 작가의 ‘실버 취준생 분투기’(2021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부문 수상작)도 그런 글이었다.
황혼이혼 후 60대에 취업전선에 뛰어든 저자는 만학도로 성취한 학력과 자격증을 이력서에서 모두 지우고 나서야 사회가 기대하는 ‘노년여성 취준생’의 지위에 맞출 수 있었다. 그는 온갖 고된 일자리와 부조리한 직업 현장을 거치며 ‘실패’를 반복한다. 가난한 노년여성에 대한 멸시와 차별, 성폭력의 위협은 어떤 노동에서도 덤처럼 따라왔다. 그러나 저자는 좌절과 상처의 경험을 치열하게 기록해 ‘피해’의 서사에서 한발 더 나아가 품위와 위트를 겸비한 고발장을 세상에 내놓았다.
한 편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르포이자 담담하면서도 울림 있는 에세이였던 그 작품은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시야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작가가 몸으로 겪어낸 삶이 정직한 글로 투영될 때 가지는 힘은 언제나 우리를 압도한다. 하지만 그가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는 후일담은 글에서 작가 스스로 “내 삶이 아니러니”라며 자급을 접고 보호받는 위치가 되어서야 자신의 꿈에 다가갈 수 있었다는 마지막 문단처럼 인생의 아이러니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기초수급자가 되어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글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기초생활이 해결되었으니, 이제 쓰기만 하면 된다. 사방 벽 길이가 다른 원룸에서 다리미판 위에 노트북을 펼쳐놓고 글을 쓴다. 하나, 둘 작품을 완성하는 기쁨은 나를 설레게 한다. 이제 시작이다. 정진하리라, 죽는 날까지. 이른 결심을 축하받고 싶다.”(198쪽)
그래서 몇 달 전, 고 이순자 작가의 산문집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와 시집 『꿈이 다시 나를 찾아와 불러줄 때까지』가 동시에 출간되었다는 소식이 더욱 반가웠다. “이제 엄마의 인생을 시작해봐!”라는 딸의 응원을 듣자마자 50대 중반에 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 전공 공부를 시작한 그는 문학 동아리 활동을 하며 시, 소설, 수필, 동화 등 장르를 망라한 작품 수백 편을 남겼다.
이 세상에 없어도 있는 사람
책을 펼치기 전 이미 예상은 했지만, 저자의 따님이 쓴 서문에서부터 읽는 내내 나는 목구멍에 걸린 뜨거운 무언가를 몇 번이고 애써 삼켰다. 책에 밑줄을 긋기 아까워 붙이기 시작한 포스트잇은 어느새 동나버려, 나는 그냥 이순자 작가가 들려주는 말을 가만히 듣기로 했다. 생전에 그가 만난 동네 할머니, 돌봐준 환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니 나 죽을 때까지 여그 살어라, 살어라, 살어라, 알았제?” ‘살어라’를 반복하는 할머니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할머니 볼에 뽀뽀 폭죽을 터트렸다. (중략) “오래오래 같이 살구파 그러지. 진정으로 말해봐. 정 주고 가지 말구. 진정으로. 여그서 같이 살어라, 살어라, 살어라. 가려면 지금 아주 가삐리등가.”(18쪽)
청각장애인이던 작가는 가족과 의사들조차 자신과의 소통에 ‘배려’가 없음을 평생 경험하며 “누구를 이해한다는 일은 이다지도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자신은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지 않는다. 정상중심 사회의 ‘경계인’이자 작가로서 그의 시선은 세상 구석으로 뻗어나가 이주노동자, 학대받는 아동, 산재 피해자, 치매노인에 머문다. 20년 이상 호스피스 등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온 그에게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책에 실린 단편소설 마지막에 타인을 조건 없이 돌보며 사는 것에서 사랑을 배운다고 썼다.
책을 보며 글쓰기 수업 도반들의 얼굴이 자주 떠올랐다. 작년에 책(‘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을 내고 나서 예기치 않게 글쓰기 수업 요청이 꾸준히 들어왔다. 작은 지역에서 여는 글쓰기 수업 참여자들은 나이가 중년 이상인 여성이 대부분이었는데, 이순자 작가처럼 자식들을 어느 정도 키우고 나서 뒤늦게 공부나 사회활동을 새로 시작한 분이 많았다. 그분들은 가끔 집에서 찐 감자나 옥수수, 수제과일청 음료 같은 것을 수업 간식으로 준비해와 나눠주곤 했다.
간식은 늘 꿀맛이었으나 나는 미각이 주는 즐거움 뒤에 숨은 이분들의 노동이 떠올라 마음이 백퍼센트 편하지만은 않았다. 평생 살림노동에 익숙해 별 일 아니라고, 집에서 먹는 김에 좀 더 한 것뿐이라고 하시지만 가만히 있어도 푹푹 쪄 밥하기도 징그러운 계절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맛나게 먹는 모습을 보는 그분들의 표정에는 흐뭇함이 가득했다. 감자, 옥수수, 과일청이 부글부글 담긴 찜통의 열기와 기꺼이 맞바꿀 수 있는, 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사랑. 상대의 행복이 곧 내 행복이 되는 마음. 나는 그것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고, 돌려주고 싶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고통은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트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끈끈하게 묶어주는 역할도 한다는 것을. (중략) 이렇듯 사람은 고통을 통해 자신의 부리를 깊이 내리고 성장하게 된다.”(25쪽)
“가만있어도 누군가 살며시 기대온다면 반은 성공한 삶이요, 멀리 있으나 생각만 해도 누군가가 힘을 얻는 이라면 그는 이 세상에 없어도 있는 사람이다. 나는 아직도 누군가의 든든한 벽이고 싶다.”(143쪽)
이제는 침묵하지 않을 뿐이다
글쓰기 수업 첫 시간 “왜 글을 쓰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면, 많은 여성들이 한목소리로 “(이제)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라 말한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해도 될까’와 ‘어디까지 말할 수 있나’의 검열과 줄다리기 속에서 여성들은 계속 갈등한다. 그래서인지 처음 글쓰기를 앞두고 드는 감정으로 ‘두려움’을 고르는 이가 많았다.
글쓰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하는 일은 글을 ‘잘’ 쓰게 만드는 게 아니라 ‘안전한 말하기’의 장을 펼쳐놓는 것임을 깨달았다. 용기는 그 뒤에 따라온다. 한 사람의 용기는 즉각적으로 무리에 퍼지며, ‘말해도 된다’는 신뢰가 쌓이는 순간 우리의 울타리는 더 넓어지고 단단해졌다. 이순자 작가 역시 ‘말하기’에 대한 갈증과 글쓰기로 얻은 주체적인 힘에 대해 풀어놓았다.
“이 삶의 답답한 경계를 허물 수 없어 오늘도 글을 쓴다. 글은 나의 탈출구다. 나의 슬픔, 나의 한탄, 나의 목마름, 나의 안타까움. 하지 못한 많은 말을 글로 토해내며 글로나마 나를 위로한다.”(39쪽)
“어느 날부터 나는 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언니, 오빠들의 말에 토를 달기 시작했다. 옳지 않아도 가족들 앞에서는 그저 가만히 있던 내가 사사건건 시시비비를 가렸다. 예순이 넘으면 순해져야 하는데, 나는 그 반대였다. 글쓰기를 하며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것일까? 아니다, 이 변화를 제대로 따져보기로 한다. 나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대하는 무례한 사람들의 태도에 이제는 침묵하지 않을 뿐이다.”(28쪽)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며 나와 도반들은 ‘말하기’의 힘뿐 아니라 ‘듣기’라는 행위에 새로운 마음가짐을 배우게 되었다. ‘존중어린 경청’은 글쓰기 수업을 시작하며 내건 약속 중 하나이기도 했는데, 수업을 거듭할수록 경청의 태도는 더욱 진지하고 세심해졌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내용의 전달을 넘어, 나의 경계를 풀고 타인이라는 존재를 온전히 수용하며 곁에 서는 일임을 경험하고 있다. 함께 말하고 듣고 쓰면서 우리는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이순자 작가가 글로써 호출한 세상의 약자 한 명 한 명에게 그러했듯.
나에서 출발해 우리가 된 글쓰기 여행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만의 목소리를 찾기 시작한 여성들은 다음에 펼쳐질 모험과 여정을 덜 두려워할 것이다. 글을 쓰는 세상의 모든 여성들이 뚜벅뚜벅 걸어갈 여행길을 응원한다.”(‘살롱드마고’ 글쓰기 프로그램 자료집 〈해방기록집〉 인사말 인용)
“나의 문학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아온 수많은 경험은 젊음으로 살 수 없는 밑천이 되리라. (중략) 비록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지 못할지라도 그것은 분명 펄떡이는 내 삶이요, 행복이다. 그러니 나의 글은, 영원히 헤쳐나가야 할 내 인생 바다에 띄우는 마지막 돛단배가 되리라.”(87~88쪽)
[필자 소개] 달리. 전북 남원에 있는 지역서점이자 페미니즘 문화공간 ‘살롱드마고’의 공동운영자이며 에세이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2021)의 작가이다. ‘고요한 해방, 나의 목소리를 찾는 글쓰기 여행’, ‘삶의 빈 칸을 채우는 글쓰기’ 등 여성들과의 글쓰기 활동을 기획,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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