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인 참사가 벌어졌다. 이태원에 갔던 150여 명의 사람이 안전관리 부재 하에 목숨을 잃었다. 정부는 국가 애도기간을 선포하고 각종 행사와 공연의 취소를 권고했다.
사건 다음 날인 10월 30일, 나도 공연이 있었다. 공연장에 우선 연락을 취했다. 예정대로 공연을 진행하는지 확인을 했다. 공연은 예정대로 진행하되 애프터 파티는 취소하고 안전에 만전을 기한다는 답변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어떻게 공연을 진행해야 할지 막막했다. 노래를 부를 수는 있을까. 참담한 마음으로 한 시간 남짓의 공연을 잘 이끌 수 있을까. 게다가 그 공연은 공연장의 1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어떡하지? 답 없는 물음만이 머리를 맴돌았다. 도저히 그냥 모른 체하고 공연을 진행할 수 없었다. 공연은 시작되었고 나는 관중에게 묵념을 제안했다. 다함께 마음을 모아 묵념을 했다. 그리고 공연을 시작했다.
정부와 사회가 생각하는 것처럼 공연은, 예술은 단순한 유흥거리가 아니다. 공연하면서도 애도할 수 있으며, 슬퍼할 수 있으며, 슬픔을 나눌 수 있고 그 이후의 저항까지 함께할 수 있다.
예술은 애도의 반대말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비슷했다. 각종 공연과 행사가 취소되었고 나는 돈을 벌 수가 없었다. 많은 동료들이 그러했다. 생계를 지속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는 것 또한 슬픔에 반하는 일이라고 생각되어 섣불리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10.29 참사 이후는 조금 달랐다. 동료들이 공연을 계속하겠다는 목소리를 내었고 나 역시 그러리라 다짐을 했다. 공연과 애도는 반대말이 아니다.
예술은 각종 정치적인 이슈와 거리가 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순수예술’이라는 이름을 오용하여 예술을 검열하고 탄압한다. 그리고 마침내 삶에서 분리시킨다. 삶에서 떨어진 예술이 어디 존재하기나 하는가. 누군가가 그랬다. 삶보다 중요한 영화는 없다고. 삶 없이는 예술이 없으며 정치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으니 정치와 예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에른스트 루비치 감독의 코미디 영화 〈사느냐 죽느냐〉(1942) 속 폴란드 극단은 히틀러와 게슈타포를 풍자하는 연극을 올리려 한다. 하지만 히틀러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연극은 내려진다. 대신 〈햄릿〉을 올리게 된다.
햄릿 역을 맡은 배우 조슈아 튜라는 유명한 배우 마리아 튜라와 부부이다. 극이 지속되면서 마리아에게 계속 꽃을 보내는 어린 비행사와 마리아는 은밀히 소통하게 된다. 마리아 튜라는 〈햄릿〉 극 중 햄릿이 ‘사느냐 죽느냐’ 대사를 외치면 자신의 드레스 룸으로 와달라는 메시지를 비행사에게 전한다. 조슈아 튜라가 무대에 등장해 대사를 뱉는다. “사느냐 죽느냐”. 가장 중요한 대사 타이밍에 비행사가 자리를 뜨고 나가기 시작한다. 관객석이 어수선해진다. 조슈아는 자신의 연기가 형편없다고 생각해 충격을 받고, 그 사이 마리아와 비행사는 밀회를 나눈다.
검열로 시작된 〈햄릿〉은 오해를 낳는다. 그리고 끝내 히틀러가 폴란드까지 쳐들어온다. 전쟁에 휩싸인 도시에서 연극은 사라지고 배우들은 설 자리를 잃는다. 하지만 끝내 폴란드를 구하는 것은 배우들이다. 배우들은 풍자극 속 연극을 실제로 옮긴다. 실제로 독일 군복을 입고 위장을 해 스파이를 잡기도 하고 게슈타포 속에 갇힌 위기를 탈출하기도 한다. 각자 자신이 맡았던 역할을 완벽하게 연기해 활약을 한다. 히틀러 분장을 한 조단역 배우가 등장하자 한 게슈타포 측 장군은 자신이 실수한 모습을 ‘진짜’ 히틀러에게 보였다고 생각해 너무 놀란 나머지 자살을 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촘촘한 시나리오와 코미디 아래 진행된다.
영화 속에서 극단은 자신들이 하던 연극을, 예술을 통해 폴란드를 구한다. 예술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얻어낸 결과다. 예술을 단순하고 정치와 분리된 유흥으로 여기는 사회에 한 방을 먹이는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루비치는 코미디를 잃지 않는다.
늑대가 안 나타났다
최근 뮤지션 이랑에 대한 부마항쟁기념식 검열 사건(관련 기사: [단독] 부마항쟁기념식에 "노래 빼라"…행안부발 '검열 그림자', JTBC 2022년 11월 21일자)이 드러나자 뮤지션 이랑이 트위터에 올린 문구다. “늑대가 안 나타났다.”
이랑은 본래 행사에서 ‘늑대가 나타났다’라는 곡을 부를 예정이었으나 행정안전부 측에서 좀 더 밝고 미래지향적인 노래를 원한다며 곡을 부르지 말 것을 권고하였고,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측에 그대로 시행할 시 단체 존립의 문제가 달려 있다는 식의 협박성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이랑의 곡, ‘늑대가 나타났다’는 21세기 혁명가로 다분히 미래지향적이다.
이 사태는 히틀러의 기분이 상할까 봐 풍자극을 내리던 영화 속 폴란드의 풍경과 다를 바가 없는 조치다. 어쩌면 이들은 예술의 힘을 알고 있어서 검열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랑의 곡이 울려 퍼지는 것이 그리도 두려웠을까. 나약한 행정안전부의 결정에, 이랑과 기념식 총 연출을 맡았던 강상우 감독은 법적 대응을 준비 중이다.
예술에 검열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는 누구든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행정안전부는 교묘한 말로 검열을 하지 않았다고 변명을 해대고 있다. 검열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검열 이후에도 그 검열된 극을 통해 폴란드를 히틀러로부터 구해낸 극단들처럼, 이랑과 단체도 늑대가 나타났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에 알릴 것이다. 이들은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여 검열에 급급한 정부로부터 자유를 얻어낼 것이다.
‘연기’라는 기술
루비치의 영화 속에는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존재한다. 그들은 자유로운 사랑을 나누고,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비록 <사느냐 죽느냐> 속 여성 캐릭터는 마리아 튜라 단 한 명뿐이지만 마리아 튜라는 이 영화의 축이다. 스파이인 실레츠키 교수를 잡는 데에 아주 큰 역할을 한다. 영화는 이것이 마리아 튜라가 배우이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종종 배우를, 연기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으로 우습게 여긴다. 촬영, 조명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연기 파트에 대해서만큼은 일반인과 기술자의 선을 모호하게 둔다. 삶이 연기 아니냐며 가볍게 말하곤 한다. 하지만 단순히 누군가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과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진짜 그 배역이 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배우는 때로는 연출도 다 알지 못하는 캐릭터의 감정선을 만들어 연결하기도 하고, 섬세한 움직임으로 복잡한 동선을 해결하기도 한다.
마리아 튜라는 스파이인 실레츠키 교수 앞에서, 게슈타포 장군 앞에서 완벽한 연기를 선보인다. 그의 연기 덕에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구해진다. 연기는 단순한 시늉이 아니다. 진짜 그 인물이 되어 극에는 보이지 않는 모든 순간까지 그 인물의 서사를 이해하는 기술이다. 모든 조단역 배우들과 힘을 합쳐 국가를 구하는 씬은 명장면이다. 항상 중요한 역할을 맡고 싶어 했던 단역 배우 그린버그가 드디어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진짜 히틀러와 나치군이 모인 극장, 게슈타포 경찰들이 사방에 깔려있다. 그리고 게슈타포로 위장한 배우들과 폴란드 측 지하조직으로 위장한 그린버그가 그곳에 침입한다. 그린버그는 게슈타포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다. 그리고 그토록 원하던 강렬한 대사를 내뱉게 된다. “그들이 우리를 찌른다면 피를 흘리지 않겠소? 그들이 우리를 간지럽힌다면 웃지 않겠소? 만약 당신이 우리를 독살한다면 죽지 않겠소? 당신이 우리를 공격한다면 우리는 복수하지 않겠소?”
실제 게슈타포 경찰들과 위장한 배우들이 그를 끌고 가고 극장은 텅 비게 된다. 그리고 그린버그는 위장한 배우들의 품으로 무사히 넘겨진다. 그의 꿈과 전범국가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꿈이 동시에 실현되는 순간이다. 예술적 욕망과 정치적 욕망이 동시에 실현됨으로써 그 둘이 완벽히 분리될 수 없음을 영화적으로 보여준다.
총보다 강한 것
배우가 연기를 한다면 작가는 무엇을 할까. 작가는 전체의 시나리오를 짠다. 어떻게 스파이를 잡을 것인지, 어떻게 스파이가 살해당한 사실을 숨길 것인지, 이미 죽은 스파이로 다시 변장한 배우는 어떤 대사를 내뱉을 것인지 구성을 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정치적 예술을 하는 셈이다. 원래 그들이 하던 예술이 정치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햄릿〉만 반복했더라면 그들은 나라를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삶이라는 연극 안에서 작은 배역은 없듯, 삶을 연기하게 된 이들에게도 작은 배역 역시 없다. 모두 한마음으로 이 조마조마한 극을 마쳐야만 누구도 죽지 않을 수 있다. NG가 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무대처럼 삶 또한 그러하다. 총과 탱크로 무장한 게슈타포의 위협 앞에서 그들은 NG 없는 역사적 연극을 해낸다. 어쩌면 총보다 군대보다 탱크보다 강한 것은 연극, 즉 예술일지도 모른다.
예술은 삶의 찌꺼기가 아니다. 본질이다. 연대 공연이 있고 문화제가 있는 것이 하나의 근거다. 나는 수차례 연대 공연을 하면서 저항이, 연대가 하나의 축제임을 확인했다. 즐겁게 투쟁하며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쫓겨난 가게에서, 떠나간 자를 애도하는 자리에서, 권리를 빼앗긴 장애인들이 모인 곳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했다. 그때 비로소 내 음악이 가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본의 숫자 아래 독립음악은 그 쓸모에 의문을 가지게 될 때가 허다하다. 하지만 연대 공연 연락을 받고 공연을 하고 내려오는 그 순간 나는 내 음악이 쓸모가 있음을 비로소 느꼈다.
예술은 계속 되어야 한다. 슬픈 일에도 기쁜 일에도 투쟁하는 자리에도 함께 해야 한다. 문학으로 저항할 수 있으며 연극으로 투쟁할 수 있다. 음악으로 분노할 수 있으며 영화로 연대할 수 있다. 예술이 가진 힘을 우습게 여기는 자들과, 이를 두려워해 검열하려는 자들은 다른 양극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예술을 정치로부터 분리시키려 한다는 데에서 같다. 1942년 영화 〈사느냐 죽느냐〉를 통해 우리는 이미 알 수 있다. 검열이 얼마나 저열하며 예술의 힘이 얼마나 강한 지 말이다. 8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영화가 가슴에 내리꽂히는 것을 보면서 세태가 많이 달라지지 않음을 느낀다. 하지만 어떤 어둠 속에서도 예술은 계속 빛을 발할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이 향하는 곳은 정치가 향해야 할 곳과 다르지 않다.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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