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개] 여성들의 말과 글이 세상에 더 많이 퍼지고 새겨져야 한다고 믿으며, 서점에서 퍼뜨리고 싶은 여자들의 책을 고른다. ‘살롱드마고’의 신간 책장에서 마음에 새겨지는 책을 한 권씩 밑줄 그으며 꼭꼭 씹어 독자들과 맛있게 나누고자 한다.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자책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가 상처받은 방식에 의해 정해진다.” (47쪽)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 (145쪽)
지리산에 귀촌한 지 어느새 십 년이 다 되어간다. 언젠가 귀촌한 지인들과 “귀농귀촌인의 3대 요소는 명상, 요가, 단식”이라 농담을 나눈 적이 있다. 그만큼 이 지역이나 어떤 귀촌인들 사이에서는 마음에 어지러움 없이 삶에 평온을 유지하는 것이 중시되고 그것이 우월해 보이기까지 한 문화가 일상에 은근하게 깔려 있다.
나 역시 몸과 마음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한때 그 세 가지를 다 해냈다. 물론 실제로 도움이 된 일들이었지만 이런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해야 할 공부와 수련에 끝이 없었다. 지식과 시간, 돈을 비롯한 실질적 자원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개인의 강한 의지’가 중요하다고들 했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녹록치 않고 때론 비루하기까지 하다. 이렇게 ‘나(내면)’에게만 집중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덜어내고 비우는 것이 최선일까? 그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이 ‘의심’은 괜찮은 것일까?
개인의 수행과 노력만으로 삶에 고통이 덜어질 수 있다는 관점의 치유론은 “믿으면 이루어진다”는 종교적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온갖 ‘알아차림’과 ‘마음공부’를 떠돌아도 나는 자주 무너졌고 늘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으며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일상에서 평화롭지 못한 마음과 가난한 관계를 가진 데 자괴감을 느끼고, 그것이 자책이나 열등감으로 이어지곤 했다.
“마음의 평정을 갖고자 하는 우리의 소망은 대체로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어쩌면 다소 바람직하지 않다.” (10쪽)
“우리가 “진짜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서 우리는 실존적 혼란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중략) 이것은 쉽지 않은데, 흔히 “불안”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묘사되는 마음의 동요를 우리는 한 인간의 실패로, 또 합리적으로 보이는 인간의 겉모습 이면에 숨겨진 어떤 치명적인 결함으로 여기도록 학습되었기 때문이다.” (42~43쪽)
“왜 좋은 삶이란 꼭 평화로운 삶이어야 할까? 좋은 삶은 오히려 적절한 수준의 불안을 포함하는 삶이 아닐까? 불안이야말로 (욕망과 더불어) 우리가 삶에서 정체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힘 아닐까?” (45쪽)
철학과 심리학, 여성학을 두루 섭렵한 학자이자 교수 마리 루티의 『가치 있는 삶』은 나에 대한 의심과 질문, ‘실패한 느낌’에 그 너머의 지성과 이치를 제시하며 답을 더듬어가게 해준 책이다. 특히 삶에서 늘 따라다니지만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한 불안과 고통, 그리고 관계의 문제에 대해 새로운 관점과 다른 문법으로 이야기한다. “평화로운 마음과 평정심이라는 가치에 대한 우리의 절대적으로 확고한 믿음이 얼마나 철저히 이데올로기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는지 보여주고 주의를 환기하고 싶다”는 저자의 의도가 나에게는 하나의 ‘알을 깨는’ 말이었다.
페미니스트 상담자를 만난 느낌!
이 책의 원제목 ‘기질의 부름 The Call Of Character’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기질’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여러 철학자들을 소환해 자신의 이론과 연결하는 방식으로 삶의 목적성과 방법에 대해 풀어간다. 머리말의 첫 문장 -“이 책의 특징 중 하나는 비교적 쉬운 말로 다소 복잡한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는 마치 선언처럼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자 목적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가치 있는 삶』은 어느 독자의 평처럼 ‘철학서와 에세이 그 중간쯤’에서 학문적 이론을 친근한 서술로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
루티가 말하는 기질이란 “사회성이 제한하는 한계에 저항하는 것으로, 인간이 지닌 가장 별난 주파수를 표현한다.” 때문에 고유성을 띠지만 완전히 개별적인 것은 아니다. 기질을 품고 있는 ‘자아’는 자신이 속한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확장되고 변화하며 “다양한 정체성의 차원을 유연하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고유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성질이 아니라, 그러한 성질을 타인과 같은 외부의 영향력과 접촉시키는 방식이다.”
이러한 주제에 관심이 연결된 명상이나 마음공부 같은, 자기수련과 치유를 위한 자리에 가보면 대부분 여자들로 가득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같은 성별 쏠림 현상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왜 여자들은(만) 시간과 돈을 투자해 자신을 공부하고자 하는가? 우리의 삶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절박하게 매달리는가? 무엇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인가? 여자들‘만’ 아프게 하는 사회와 조건, 그러니까 위에서 언급한 ‘외부의 영향력’에 대해 말하지 않고 이것이 자기성찰과 개인의 능력으로 해결 가능한가?
권위 있는 ‘힐러’에게 성인지 감수성이 없으면(많은 경우 그렇다.) 불행히도 치유의 자리는 추가 고통의 현장이 된다. 가부장제와 성차별 구조의 거미줄에 걸려 있는 여성에게 “네가 변하면 주변(가족)도 변한다”,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같은 덧없는 주문은 “현모양처가 되어라”는 말을 교묘히 바꿔치기한 것에 불과한 가스라이팅이다. 그것은 부조리한 현실조차 개인의 힘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혹은 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이런 논리라면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탓해선 안되고, 고통은 온전히 홀로 감당할 것으로 고립된다.
『가치 있는 삶』을 읽으며 내가 위로받은 것은 페미니스트 상담자를 만난 듯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특히 내가 사는 ‘지방’에서 페미니스트나 퀴어친화적인 상담자를 실제로 만나기는 정말 어렵다.) 이 책에서는 직접적으로 ‘치유’를 말하지 않지만 체제와 계급이 인간, 특히 여성을 어떻게 소외시키는지 충분히 파악하며 페미니즘적 사유를 바탕으로 분석하기에 어떤 문장들은 나의 마음을 긁어주는 것 같았다.
“이것이 아메리칸드림과 수박 겉핥기 수준의 대중적인 심리학 이론이 조장한, 누구든 원한다면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나친 낙관론에 불과하며 정말 해로운 이유다. 우리에게 부과된 제약을 항상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55쪽)
“그렇게 우리에게 새로운 운명이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특정 시나리오에 끌려다닐 필요가 없고, 다른 선택지를 선택할, 또 더 가치 있는 곳으로 이어지는 다른 길을 강구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운명을 다시 쓸 수 있게 된다.” (134쪽)
“우리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삶의 모습을 억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우리를 몹시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과 비로소 멀어질 수 있다.” (138쪽)
고독은 관계의 단절이 아니다
가까운 관계에서 돌봄의 역할을 부여받기 쉬운 여성들에게 관계는 고통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많은 상담과 치유작업의 현장에서 참여한 여성들은 공통적으로 관계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관계에서 갈등을 겪으면서도 집착할까? 언젠가부터 관계는 사회적 자원(자본)이자 능력으로 취급되고 있다. SNS 팔로워가 인간의 계급을 나누는 새로운 기준이 되었고, ‘인플루언서’로 등극하면 실제 지위와 부가 상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프라인의 삶에서도 ‘인싸력’은 사회생활을 얼마나 잘 하나의 척도가 된다.
SNS 활동은 활발히 하지만 그것을 ‘관계’라 부를 수 있는지 여전히 망설이는 나는, 오프라인에서 사교생활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이것이 나에겐 하나의 ‘기질’이라 부를 수 있을 텐데, 어릴 때부터도 혼자 있는 것을 선호했고 자라서는 직업적으로 사람 상대하는 일을 많이 하면서 사생활을 홀로 보내는 게 편안해졌다. 그런데 최근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고요함이 관계의 단절이나 거리와 큰 연관이 있음을 깨닫고 나는 바로 불안함을 느꼈다. 왜인지 ‘이렇게 혼자여도 괜찮은 걸까? 곁에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내가 이상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루티는 한나 아렌트의 “(인간은)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타인에게 의존한다”는 문장을 책에서 인용하며, “타인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외부 세계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관계의 중요성을 짚으면서도 우리가 관계 자체에 갖고 있는 편견과 두려움에는 냉철한 방패를 제시한다.(여기에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이야기가 인용되어 더욱 반가웠다!) 책에 밑줄을 그으며, 내가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불만과 열등감을 갖게 된 것에는 보이지 않는 배경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루티가 계속 강조한 나의 ‘욕망’에 더 다가가고 싶어졌다.
“우리는 썩 좋지도 않고 뻔하고 진부할지라도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 것보다 항상 낫다고 믿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159쪽)
“고독은 세상의 방해를 막아주는 순간이다.” (163쪽)
“고독은 고독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닫혀 있는 많은 실존적인 가능성을 열어준다. 결과적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무언가 결핍된 것 같은 삶이 실제로는 고유한 풍요로움을 담고 있으며 만족스러울 수 있다. (중략) 고독은 재충전의 시간을 갖도록 해 우리가 고독에서 벗어났을 때 다른 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내줄 수 있게도 한다. 결국 우리가 자신의 자아를 가치 있다고 느끼고 자아에 충실할수록, 의미 있는 관계를 더욱 잘 유지해낼 수 있다.” (164쪽)
“우리는 관계를 떠나지 않고 거듭 새로워지는 관계와 함께 성장하게 된다.” (170쪽)
관습으로부터의 자유, 내 삶의 주도권을 놓지 말자
사실 이 책을 읽으며 몇 년간 글쓰기 워크숍 교재로 꾸준히 사용해온 줄리아 카메론의 책 『아티스트 웨이-나를 위한 12주간의 창조성 워크숍』이 계속 겹쳐졌다. 거기에서도 우리가 느끼는 부정적 감정에 대해 루티와 비슷한 논조나 맥락으로 말한 부분이 있고, ‘동시성’이나 글쓰기에 대한 두 저자의 설명이 한 목소리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루티는 자신의 책에서 기질에 대해, “오랫동안 순응적으로 잘 살아오다가 갑자기 그렇게 사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고 했다. 이는 카메론이 동시성을 통해 창조성을 발견하는 순간을 묘사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또한 루티가 “언어는 결핍을 완화하는 가장 좋은 해독제”라며 트라우마 해소의 방법으로 글쓰기를 제시했는데, 카메론 역시 본인의 책에서 글쓰기를 상처 회복의 좋은 수단으로 강조한 바 있다.(관심이 있다면 두 책 모두 혼자 읽기보다 독서모임 등을 통해 같이 보기를 권한다.)
두 사람 모두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가진 작가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사회적 관습과 의무적 관계가 억압임을 통찰하고, 저항하는 존재들을 지지하며, 그들을 위한 언어를 세상에 던지는 이들의 책이 있어 용기와 자기긍정의 힘을 얻는다. 그 힘을 잇고 퍼뜨리고자, 삶의 고통을 통과하는 여자들과 함께 계속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다.
“고통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더라도, 지금의 현실을 살아가는 주도권을 고통에게 내어주지 않음으로써 고통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65쪽)
“외부의 세력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의존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 삶의 핵심이 되는 질문의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우리가 계속해서 올바른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낼 수 있다면, 우리는 삶을 재건해 낼 도구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며, 내일의 우리는 오늘의 우리와 달라질 것이다.” (50쪽)
[필자 소개] 달리. 전북 남원에 있는 지역서점이자 페미니즘 문화공간 ‘살롱드마고’의 공동운영자이며 에세이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2021)의 작가이다. ‘고요한 해방, 나의 목소리를 찾는 글쓰기 여행’, ‘삶의 빈 칸을 채우는 글쓰기’ 등 여성들과의 글쓰기 활동을 기획,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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