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 필 무렵, 사랑일까 폭력일까

페미니스트 국어 선생들이 말하는 ‘요즘 학교 어떤가요’⑥

평지 | 기사입력 2022/12/09 [19:54]

메밀꽃 필 무렵, 사랑일까 폭력일까

페미니스트 국어 선생들이 말하는 ‘요즘 학교 어떤가요’⑥

평지 | 입력 : 2022/12/09 [19:54]

[기획의 말] 페미니스트로 살고자 하는 국어 교사들이 모여 교실과 학교에서 성평등한 국어 교육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평등 국어교사 모임’을 만들어 고민을 나누고 대안을 만들어 온 국어 교사들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문학은 타인을 이해하며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사랑은 문학 작품에서 다루는 대표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어떤 문학 작품에서 사랑이라고 그리는 관계가 독자에게는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작품을 만나면 읽기를 중단하면 그만이지만, 교사로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교사인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르치지 않으면 되지 않냐 생각할지 모르겠다. 어떤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다. 교과서에 해당 작품이 실려있다 하더라도, 교사가 교육적인 목표를 가지고 재구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사 갈래의 특징을 이해한다’는 것을 목표로 제시된 소설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해당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다른 소설로 수업을 구상할 수 있다. 한 명의 교사가 전 학년의 수업을 맡아 동일한 기준으로 전 학생을 평가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교사 입장에서 이런 자율성은 더욱 보장된다.

 

그러나 국어 수업의 경우, 보통 서너 명의 교사가 같은 소설로 수업을 하고 동일한 시험을 봐서 성적을 내야 한다. 공정성이 중요한 요소이므로, 어떤 소설을 수업 시간에 다루고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 동료 교사와 협의해야 한다. 동료 교사가 이 작품의 내용을 사랑이라고 보지 않는 나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거나, 수능에 나올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한다면, 나만 이 작품을 빼고 가르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평등한 관점에서 불편한 작품을 수업 시간에 다루어야만 하는 상황이 생긴다. 나에게 있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그런 소설이다.

 

▲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은 하얀 달빛 아래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밭의 묘사가 백미로 꼽힌다. 교사용 지도서 중 일부.

 

성 서방네 처녀에게도 아름다운 하룻밤이었을까?

 

주인공 허 생원은 가족 없이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장터를 돌며 살아가는 장돌뱅이다. 그는 하얀 달이 뜬 날이면 성 서방네 처녀와 하룻밤을 보낸 일을 아름답게 추억한다. 그런 허 생원이 동이라는 장돌뱅이가 성 서방네 처녀와 자기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일지 모른다고 추측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메밀꽃 필 무렵』은 하얀 달빛 아래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밭의 묘사가 백미로 꼽히며 문학적으로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러나 나는 성 서방네 처녀에게 감정 이입하여 소설을 읽다 보니, 이 소설이 불편하다. 특히 성 서방네 처녀와 하룻밤을 보낸 그 날을 기억하는 허 생원의 방식이 불편하다. 해당 부분을 살펴보자.

 

“날 기다린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달리 기다리는 놈팽이가 있은 것두 아니었네. 처녀는 울고 있단 말야. 짐작은 대고 있었으나 성 서방네는 한창 어려워서 들고 날 판인 때였지. 한집안 일이니 딸에겐들 걱정이 없을 리 있겠나. 좋은 데만 있으면 시집도 보내련만 시집은 죽어도 싫다지……. 그러나 처녀란 울 때같이 정을 끄는 때가 있을까. 처음에는 놀라기도 한 눈치였으나 걱정 있을 때는 누그러지기도 쉬운 듯해서 이럭저럭 이야기가 되었네……. 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었어.” -천재교육, 고등학교 국어Ⅰ(2009 개정), 박영목 외, pp.71-72)

 

그 날 이후 성 서방네 처녀의 삶을 추측할 수 있는, 그녀의 아들로 추정되는 동이가 이야기하는 자신과 엄마의 삶을 조금 더 살펴보자.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정말예요. 제천 촌에서 달도 차지 않은 아이를 낳고 어머니는 집을 쫓겨났죠. 우스운 이야기나, 그러기 때문에 지금까지 아버지 얼굴도 본 적 없고 있는 고장도 모르고 지내 와요.”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의부를 얻어 가서 술장수를 시작했죠. 술이 고주래서 의부라고 전망나니예요. 철들어서부터 맞기 시작한 것이 하룬들 편한 날 있었을까? 어머니는 말리다가 채이고 맞고 칼부림을 당하고 하니 집 꼴이 무어겠소. 열여덟 살 때 집을 뛰어나와서부터 이 짓이죠.” (같은 책 p.73)

 

하얀 달이 뜨고 메밀꽃이 필 때마다 허 생원은 두 사람이 관계를 맺은 그 날을 떠올리며 추억하고 그리워한다. 과연 성 서방네 처녀도 그럴까? 그녀에게 그 날은 인생을 뒤흔든 사건으로 어쩌면 폭력적인 기억은 아니었을까. 나는 이 소설을 수업할 때 누군가는 사랑이라고 그리지만 누군가는 고통이라는,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는 이 괴리를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누구의 시점인가

 

소설을 읽고 줄거리를 정리하도록 하면, 학생들은 대개 ‘주인공 허 생원이 메밀꽃 핀 날 성 서방네 처녀와 하룻밤을 보낸 기억을 잊지 못하고 아름답게 추억한다’, ‘아들일지도 모르는 동이를 만나 설레고 있다’와 같은 반응이 나온다. 나는 성 서방네 처녀에게도 그날 밤은 아름다운 추억일지 묻는다. 학생들이 그렇다, 아니다 대답을 하면, 소설 안에서 근거를 찾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도록 유도한다.

 

그럼 학생들은 당황한다. 당연히 나왔다고 생각한 성 서방네 처녀의 입장을 소설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학생이 성 서방네 처녀의 감정이라고 어떤 부분을 찾아내면, 다른 학생이 그것은 동이가 생각한 성 서방네 처녀의 감정이라고 바로 잡는다. 그렇게 학생들은 같은 소설을 다시 읽으며,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허 생원의 시각만을 다룬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두 사람의 감정을 균형 있게 다룬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한쪽의 입장이며 감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중요하다. 성 서방네 처녀는 주요 인물이지만, 소설 안에서 유일하게 직접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다른 인물을 통해서만 그려진다는 것을 찾아낸다. 누군가의 입장과 시각이 배제되어 있는 시점의 불균형성을 인지하고, 누구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가를 파악하는 것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이다.

 

다음 활동으로 성 서방네 처녀가 허 생원을 다시 만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측하도록, 소설의 다음 장면을 상상하게 한다. 단, 주어진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성 서방네 처녀의 입장, 그녀의 경험을 근거로 할 것을 조건으로 제시한다. 이렇게 되면 학생들은 허 생원의 시점에서 쓰인 소설을 성 서방네 처녀의 시점에서 다시 읽으며, 같은 상황이 얼마나 다르게 느껴질 수 있는가를 경험한다.

 

성 서방네 처녀는 동네의 인기녀였다는 점에서 얼금뱅이로 외적인 매력을 가지지 못한 인물로 그려지는 허 생원과 다르다는 점, 허 생원과 하룻밤을 보낸 뒤 아이를 가져 집에서 쫓겨났다는 점, 혼자 동이를 키우기 위해 주막에서 일하며 주정뱅이와 결혼하고 그 남편에게 맞으며 살아왔다는 점을 정리한다.

 

학생들이 그리는 성 서방네 처녀가 허 생원을 다시 만나는 장면에서 성 서방네 처녀는 화를 내고 욕을 하기도 하고, 양육비와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도 한다. 적어도 재회의 장면을 이 작품의 원래 분위기, 허 생원의 입장에서처럼 애틋하고 그리운 사랑의 순간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 키우기

 

『메밀꽃 필 무렵』이 사랑 이야기라면 그 사랑은 누구의 사랑인지, 성 서방네 처녀에게도 사랑인지를 질문할 때, 학생들은 훨씬 입체적으로 소설을 읽는다. 내가 느낀 불편함을 학생들도 느끼도록 강요하는 게 아니라, 그 불편함을 느낀 지점을 ‘시점’이라는 소설의 주요한 요소로 풀어가는 것이다. 모든 소설은 서술자가 있고 시점에 따라 특정 인물의 감정과 생각대로 서술되기에, 다른 시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다양한 인물의 시점에서 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상상력을 기를 때,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질 수 있다.

 

수업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나의 감정이 다른 사람과 관계될 때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짐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과 반응이 중요하다는 것을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 스토킹이나 성폭력으로 목숨을 잃는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시대를 살면서, 나의 감정에만 함몰되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가 원하지 않을 때도 강요하는 것이 ‘폭력’임을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소설 속 허 생원의 태도가 사랑인지 폭력인지 결론 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허 생원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성 서방네 처녀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데, 이 소설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음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하물며 그녀가 출산 이후 집에서 쫓겨나 맞아가며 애를 키웠다는데 미안함은 전혀 없이, 있는 줄도 몰랐던 아들에 대한 애틋함만을 느끼는 인물이라니 얼마나 이기적이고 폭력적인가!

 

사랑을 다룬 일방적인 시점의 작품을 감상할 때 비판적인 시선을 지녀야, 상대의 동의가 없는 일방적인 강요는 사랑이 아닌 폭력임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 내가 좋아도 상대가 싫다고 하면 그 거부를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 사랑을 대하는 문학 작품을 통해 학생들이 꼭 길렀으면 하는 내용이다.

 

이 활동 이후 ‘선생님 때문에 동심이 파괴되었다’. ‘뭘 봐도 누구의 입장에서 그렇게 말하는지 생각하면 세상에 아름답기만 한 게 없다’라는 피드백이 있었다. 다른 이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만을 강요하는 것이 ‘동심’이라면 파괴되는 것이 맞지 않은가! 그런 동심이라면, 파괴되었을 때 상대의 감정을 존중하고 나의 감정을 존중받으며 관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연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위 글은 성평등 국어교사모임에서 함께 이야기 나누고 작성한 내용입니다. 이메일 주소 femi_literacy_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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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린 달 2022/12/30 [22:49] 수정 | 삭제
  • 이런게 교육이지요. 한수 배워갑니다.
  • 구르미 2022/12/15 [22:16] 수정 | 삭제
  • 성폭력이라 봅니다.
  • 펜플 2022/12/14 [17:04] 수정 | 삭제
  • 문학작품속에는 저런 보이지 않는 성폭력을 드러내지 않고 미화하는 작품들이 많지요..시대에 맞게 작품도 읽혀지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 HY K 2022/12/12 [20:47] 수정 | 삭제
  • 입체적인 수업 방식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문학 작품으로 수업을 하면서 당시 시대상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해봐도 좋을 것 같아요.
  • 도우마 2022/12/12 [19:56] 수정 | 삭제
  • 마지막에 이야기하는 취지는 합당하지만 하나의 '소설'로 판단하는 것은 멈추고 공과사를 구분하여야 할듯 고전 작품이 아니라 실제 사회 적용가능할 수 있도록 실제 맞닥들일 수 있는 현실의 일(그럴 것이다 말고)에 대해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이 드네요.
  • ㅇㅇ 2022/12/11 [15:15] 수정 | 삭제
  • 동심이 파괴되었다고 한 학생 전혀 동심이 있어보이지 않네요. 저런 피드백 자체가 넘 올드하고 구태의연한 말인데... ㅎ
  • 도마 2022/12/10 [22:32] 수정 | 삭제
  • 저도 메밀꽃 필 무렵 처음 읽었을 때가 고등학생이었는데 꽤 불편했던 기억이 납니다. 페미니스트 국어선생님들 수업 이야기 너무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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