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가 단둘이 술 마시면 뻔한 거 아니냐’ 통념과의 싸움피해자 편에 서는 법[法] 성범죄자의 무고 역고소에 대한 대법원의 경종※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첨예한 논쟁이 된 성폭력과 미투 사건들을 맡아 해결해 온 이은의 변호사의 기록, ‘피해자 편에 서는 법[法]’을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신입 환영회 자리라고 유인 후…
‘피고인 A’는 KBS 파견직원이었다. A의 업무는 촬영기자들이 쓴 경비를 처리하는 일이었다. IMF 이후 한국의 직장에는 직급, 입사년도 등에 기반한 서열을 뛰어넘는 경계선 하나가 생겼다. 직장 내 신분제도라 할 만한 정규직과 비정규직. A는 비정규직, 신입, 여자였다.
출근 첫날, A는 관리자로부터 ‘촬영기자들과 잘 지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협업하는 관계니 당연한 말이지만, 조금만 더 생각하면 갸웃해지는 말이다. 영수증 처리를 받아야 하는 사람과 영수증 처리를 해주는 사람 중 누가 아쉬울까. 업무 관계로만 본다면 업무 지원을 받는 쪽이 잘 지내고 싶어 해야 할 테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위치라면 얘기가 다르다. A는 상급자의 말을 새겨들었다.
전임자와 함께 방송국 내부를 이동하던 중. 촬영기자 B를 만나게 되었다. B는 전임자와 A에게 송별회 겸 환영회를 하자고 말했다. 주말에도 B는 A에게 SNS를 통해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월요일에 출근해서도 이런 이야기가 이어졌다. B는 40대 유부남이었다. A는 B가 말하는 ‘환영회’가 당연히 여러 촬영기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이날 A는 퇴근 후 남자친구와 약속이 있었지만, 막 입사한 회사에서 잘 지내야 하는 촬영기자들이 환영회를 열어준다는데 이를 계속 거절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결국 남자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B를 따라 합정동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B가 안내한 와인바에 가서야, 다른 참석자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황스러웠고, 내키지 않았지만, 상대방의 호의를 함부로 오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술자리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B는 A를 만나기 전에 이미 술을 좀 마신 상태였는데, 와인을 한 병 시켜 거의 혼자 다 마신 후 또 시켰다. 두 번째 와인은 거의 먹지 않고 자리를 파했지만, B도 꽤 취한 듯했다. B가 비틀거렸고, A는 B가 넘어질까 봐 팔을 잡아주었다. 그런데 B는 바로 찻길로 나가 차를 타지 않고, A의 팔목을 붙잡고 걷기 시작했다. B는 편의점에서 하드 등을 사서는 A에게 먹고 가자고 했고, 이후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려 했다고 한다.
당황한 A는 혼자 빠른 걸음으로 걸어 택시에 탔는데, 뒤쫒아 온 B가 그 택시에 따라 탔고, A는 택시에서 내렸다. 그러다 A가 결국 혼자 택시를 타고 떠나자, B는 걱정된다는 애매한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인근에서 A를 기다리다가 이를 전해 들은 남자친구가 B에게 전화를 해서 화를 냈고, A는 바로 상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B는 다음날 출근해서 A에게 사과했지만, 그 사과에 담긴 내용은 모호했다. A는 경찰에 ‘B가 편의점에서 나와 하드 등을 먹는 도중 기습적으로 강제추행 하였다는 취지로 고소했다.
피해자가 아닌 ‘피의자’로 만난 A
위의 이야기는, A와 B가 편의점에서 하드 등을 사서 나온 직후에 일어났다는 강제추행 주장 부분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객관적 증거들로 확인되는 사실이다. A와 B가 와인바를 나온 이후 동선 다수가 CCTV 카메라에 의해 촬영되었는데, 하필 강제추행이 일어났다는 장소에는 CCTV가 없었다.
2017년 8월 내가 A를 처음 알게 되었던 때에는 안타깝게도 ‘피해자’ 신분이 아니었다. 나는 모 여성단체에 법률지원 상담을 갔다가 우연히 ‘피의자’ A의 사정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A로부터 상담 문의를 받았다.
성폭력 피해자가 무고(허위로 신고하거나 고소하는 것) 혐의로 고소를 당하면, 무고죄 피의자가 된다. 기소가 되면 무고죄 피고인이 된다. 같은 사람이 피해자인 동시에 피의자나 피고인이 되기도 한다. 만약 법원에서 피해자에게 무고가 인정되면, 가해자 처벌은 고사하고 성폭력 상처에 억울한 형사처벌이 뒤따르게 된다.
그래서 변호사로서 피해자를 지원할 때, 무고 시비에 연루되지 않도록 미리 방어하는 일에 신경을 쓴다. 어떤 사건이 무고에 휘말려 피의 단계를 지나 기소가 되었다는 것은, 방어가 되지 않은 사건임을 의미하거나, 정말 무고를 했다는 의미가 된다. 변호사와 의뢰인은 일면식도 없는 관계가 대부분인데, 상대방이 전하는 피해나 억울함을 믿고 그 옆에 서는 일은 피해자를 만날 때보다 피고인을 만날 때 부담과 긴장이 훨씬 클 수밖에 없다.
무고죄 ‘피고인’이 된 A
A가 겪고 있는 무고죄 다툼, 더 정확히는 성폭력 다툼은, A와 마주 앉아 기록을 살펴보며 이야기를 들으며 정리되고 선명해졌다. 불과 몇 년 전이지만, 우리 법원의 강제추행이나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강제추행 인정의 벽은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하지만 높고 깐깐한 기준으로 보더라도 A가 잠깐 인사만 나눈 B와, 나이도 훨씬 많고 결혼도 한 B와, 환영회를 하자며 거듭 술자리를 제안했던 B와, 그날 급격히 이성적으로 가까워져서 스킨쉽을 나누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또 성폭행이 아니라 입을 맞추려 했다는 정도의 추행을 거짓으로 지어내서 회사에 보고하고 형사고소까지 했다고 보기도 무리가 있었다.
오히려 B가 우월한 지위와 경험을 이용해 A에게 추근거렸던 것이 사실이고, 이제 갓 파견직으로 입사한 A가 거듭된 B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거나 술에 취한 B를 그냥 두고 혼자 가버리지 못했을 것임을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B가 따라 탄 택시에서 A가 허겁지겁 내려 다른 택시를 타고 간 정황이나, B가 보낸 문자 등을 보면 그 직전에 A를 당황시킨 사건이 있었을 것임이 충분히 짐작됐다. A의 피해 주장은 상당히 일리 있어 보였는데, 수사기관에서 추행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무고죄로 기소까지 된 것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당시 A는 이미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해 준비기일을 거쳐 국민참여재판일을 불과 며칠 앞에 둔 상황이었다. 이런 타이밍에 내가 사건을 맡아 끼어든다는 것은 무리였다. 지금까지 준비를 해온 변호사들이 맡는 것이 최선이었다. 재판 전날 A에게 응원 연락을 보내고, 재판일 저녁에 잘 끝났는지 물었는데, 자정이 가까울 무렵 전화가 왔다. A는 아직 판결이 나지 않았다며 그날 재판부가 자신에게 물었다는 질문 몇 가지를 전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두어 시간 후 배심원들이 만장일치 가까운 표결로 ‘유죄’를 결정했다는 연락이 왔다.
‘유죄’ 선고받은 A의 항소심 변호인이 되다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A가 며칠 안 되어 사무실로 다시 찾아왔고, 나는 피고인 A의 항소심 변호인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재판은 3심제 원칙이지만, 1심 판결이 2심에서 번복되는 일이 거의 없다. 2심이 대법원에서 뒤집어지는 일은 극히 드물다. 더욱이 1심이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다. A의 항소심은 그런 상황이었다.
의뢰인에게 이런 상황을 주지시키려니 마음이 무거웠는데, 정작 가장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이 사건이 유죄라는 사실 자체였다. A는 B로부터 추행을 당했다고 고소했었다. 그런데 그 고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A가 주장한 피해사실이 없었다고 확인됐거나, 없었다고 볼만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A가 피해로 주장한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었고, 그 일이 있었다고 해도 형사법상 강제추행이 성립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어쩌면 A가 말한 일이 있었고 그 일이 강제추행으로 평가될 수도 있겠지만, 이를 확신하기 어려워 인정이 안 된 것이었다.
즉 단정하기 어려운 사실을 거꾸로 단정해 무고죄로 기소하고, 유죄가 판결된 것이었다. 그러니 A에게 우리가 서 있는 상황의 어려움을 말하는 게, 실은 억울한 사람에게 법이 이렇다고 말하는 형국이었다.
항소심 과정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험난했다. 재판부는 A에 대한 확증편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심에 증인으로 나왔던 B에 대한 증인신청을 거부한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A와 비슷한 입장에서 B로부터 비슷한 피해를 입은 다른 직원이나 A로부터 최초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보고를 받았던 상사에 대한 증인신청이 그 자리에서 거절됐다. 피고인신문을 위해 한 기일만 속행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그마저도 거절당했다. 재판장은 대놓고 말로 하지 않았을 뿐, 볼 것도 없다는 시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B가 제출한 고소장이나 여타 서면들에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A의 가족관계를 비롯하여 과거 A가 겪었던 법적 다툼과 같은 각종 신상정보들이 가득했다. 이 중에는 A조차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는 것들도 있었다. 모두 A를 낙인찍는 성격의 자료들이었다. 그런 낙인이 A가 마지못해 앉아있어야 했던 B와의 술자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B를 따라 걸었던 귀가길에 엉겨붙으며, 흡사 A가 없는 추행을 꾸며냈거나 추행을 유도했다는 확신으로 편향됐다.
그대로 재판을 끝낼 수 없어 피고인신문지도 없이 30분 넘게 피고인신문을 했다. 내가 피고인신문을 먼저 마친 후, 검사가 A에게 물었다. 직전에 있었던 피고인신문과 같은 내용들이 수사과정이나 1심에서 진술되었냐고. A는 ‘수사관들이나 변호사가 묻는 질문에 대답했고, 결국엔 비슷한 내용들이겠지만 순서나 상세함에선 차이가 있고, 일부는 묻지 않아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는 취지로 답했다. 그러자 검사가 ‘그때 진술이 다 되었으면 어떨까 아쉽다’는 말로 반대신문을 마무리했다. 죄가 있다고 추궁해야 할 검사가 오히려 A의 입장을 납득하는 듯한 말을 하니 얼떨떨했는데, 그렇다고 검사가 기소를 취하한 것은 아니었다.
재판부는 피고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3주 후, A는 다시 유죄를 선고받았다. 날도 춥고 마음도 추운 2018년 1월의 끝자락이었다.
대법원이 확인한 ‘성범죄에 대한 무고 판단 기준’
2018년은 미투 이슈가 한창이었고, 전에 만난 시사주간지 기자가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다. A 생각이 났다. A는 누군가 써주기만 한다면 자신의 얼굴도 이름도 공개하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다고 했었다. 무고로 유죄가 나온 상태인데 과연 기사를 써줄까 싶었지만, 조심스럽게 기자에게 말을 전했고, 그렇게 A와 시사주간지 만남이 주선되었다.
저널이 발행되고 며칠 후, 기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상고심을 함께 하고 싶다는 변호사들이 몇 분 연락을 주었다며, 내 의견을 물었다. 남자, 50-60대, 전관 출신이 있는지 확인했다. 나와 다른 조건, 상반된 이력, 나와 다른 시선으로, 나와 같은 판단을 하고 재판부를 설득할 사람이 필요했다. 마침 그런 이가 있었다. A와 함께 상고심에서 힘을 합해주기로 한 변호사님을 만나러 갔다.
튼실한 아군이 생겼지만, 상고심의 여정은 길었다. 상고이유서를 제출한 후에도 나도, 다른 변호사님도 각자 상고이유보충서를 써서 제출했다. 심리불속행 기간 도과가 되어가던 날들, 매일같이 나의 사건 검색 사이트를 열면서 가슴이 콩닥거렸다. 심리불속행 기간을 지나니 몸도 마음도 바빠졌다. 한두 달 간격으로 서면을 계속 제출했는데, B도 불안했나 보다. B쪽에서 내는 서면들에는 피해자가 무고를 했다는 이야기 외에, 내가 쓸데없는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라며 나에 대한 비난과 공격이 얹어졌다.
이런 식의 공격을 받는 게 이번 사건만이 아니라서 하루는 내가 하소연을 했는데, 상고심에 합류한 변호사님이 싱긋 웃으며 “큰일 하려면 맷집이 더 강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되려 더 창의적으로 전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강사분들, 여성단체 활동가분들에게 참석을 요청해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A가 고소했던 강제추행 사건에서의 B의 진술조서 등에 대한 기록열람신청서를 제출했다.
2018년이 다 가도록 대법원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2019년이 되어서는 강의를 하러 간 곳이 젠더 이슈와 관련된 활동을 하는 곳이면, A의 사건을 소개하고 재판부에 탄원서를 내주십사 읍소했다. 추행을 당했다고 여길만한 일이 있었을 법한 전후 사정이 존재하고, 그에 대한 증거들이 존재하는데도, ‘남녀가 단둘이 술 마시고 챙겨주면 뻔한 거 아니냐’라는 오래된 선입견으로 인해, 피해를 말하는 것이 법원에서 범죄가 되는 일에 제동이 걸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추운 겨울에 시작된 상고심은, 한해를 지나 더운 여름날 끝이 났다. 대법원 판결이 나던 날, 가슴이 뛰어서 직접 가지도 못했다. 직원과 인턴변호사와 피고인 A가 선고를 들으러 갔다. 대법원은 A가 추행 피해라고 여길만한 일이 없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그 날의 일련의 사정들을 인정하였다. ‘설령 다소간에 확대 과장된 표현이 있더라도 피해자가 피해라고 여길만한 기초 사실이 존재한다면 함부로 무고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성범죄에 대한 무고 판단의 기준을 다시 한번 분명히 했다! A를 긴 시간 괴롭혀온 누명이 벗겨졌고, 고맙게도 많은 매체에서 대법원의 이 사건 파기환송에 관심을 갖고 보도했다.
오늘 우리가 조금 덜 불안하게 살고 있는 것은 이렇게 누군가 긴 시간 고통 받은 끝에 얻어낸 값진 명제들이 법원의 높은 지붕을 받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렇게 모두가 누명을 벗고 극적으로 사필귀정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어제까지 우리가 발견해내거나 인정해주지 못한 피해들, 또 사람들의 눈물이 모여 법원에서도 아주 미세하게 진일보한 기준이 세워지고 있는 중이다.
[필자 소개] 이은의. 2014년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후, 서울 서초동 법원검찰청 코앞에 ‘이은의 법률사무소’를 열고 지금까지 여러 성폭력, 성차별 사건들을 다뤄왔다. 특별한 정의와 굉장한 진보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당연한 일들이 당연하게 처리되는 세상을, 합리적인 사고와 담론이 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어느새 9년째 말하고 글 쓰며 싸우는 최전방에서 세상을 계속 배워가는 중이다. 저서로 『삼성을 살다』, 『예민해도 괜찮아』, 『불편할 준비』, 『상냥한 폭력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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