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개] 여성들의 말과 글이 세상에 더 많이 퍼지고 새겨져야 한다고 믿으며, 서점에서 퍼뜨리고 싶은 여자들의 책을 고른다. ‘살롱드마고’의 신간 책장에서 마음에 새겨지는 책을 한 권씩 밑줄 그으며 꼭꼭 씹어 독자들과 맛있게 나누고자 한다.
한때 애정했던 그 놈이…
“네가 뭔데, 내 기분을 나쁘게 해. 이제 내 오빠도 아닌데, 너는. 네가 그렇게 잘생겼으면 다야?”(129쪽)
중학교 때 친구들은 나를 ‘○○부인’이라 놀렸다. 나는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의 음악을 들으며 영단어 대신 노래 가사를 달달 외웠고, 그의 신곡을 홍보하려고 일부러 학교 장기자랑에 나가 그의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그가 나오는 모든 기사를 스크랩하였고, 내 노트와 사진은 그의 사진으로 도배되었다.
학교에서 유일한 ‘○○부인’이라고 -나는 경쟁자가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놀린 친구들에게도 각자 자기만의 ‘최애’가 있었다. 우리는 교실에서 틈만 나면 그 ‘오빠들’ 중 누가 더 잘생겼는지, 음악성이 뛰어난지 팬 대 팬으로 심각하게 토론하다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누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보러 간다고 하면 ‘오빠대결’은 중단하고 예쁜 피켓을 함께 만들어주며 친구의 사랑을 아낌없이 응원했다.
사실 내가 부인을 자처했던 ‘○○오빠’에게 ‘여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는 그 무렵에도 소문으로 돌았다. 당시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런데 ‘덕질’을 그만둔 지 한참 지나 성매매피해자지원상담소에서 활동할 때, 내담자로부터 뜻밖에 그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성매매업소에서 소위 ‘진상’으로 유명해서 피하는 손님 중 하나라는 것이었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순간 부끄러움이 몰려와 낯이 뜨거워지면서, 한 귀로 흘렸던 그 소문이 떠올랐다. 어쩌면 당시의 나는 그 소문이 사실일 거라고 어느 정도 믿으면서도 부정해온 것 아닐까 스스로가 의심스러웠다. 그 후부터는 한때 내가 그를 좋아했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몇 년 전, 그는 성폭력 혐의로 고발당했다. 이제 인기도 없고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제발 조용히 살기를 바랐는데…. 내 인생 가장 순수했던 시기가 그와 함께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느낌이었다. (네가 뭔데!)
복잡한 감정을 정면 돌파하는 팬들의 시간
“괴상한 감정이다.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했던 시절을 추억하는 것만으로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하나? 사랑했던 상대를 원망해야 하는 우리가,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워해야 하는 우리가 참 안쓰럽다.”(18쪽)
“내 속에 있던 슬픔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추억을 뺏기고 정체성을 상실한다, 다시는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행복을 찾을 수 없다, 이건 정말 슬픈 일이었다. 주제 넘는 생각이지만, 나는 은빈을 비롯한 친구들을 위로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나도 그들에게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로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236쪽)
“다은: 특히 여성 혐오 범죄는 여성들이 더 소리를 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누군가를 계속 감싸고 넘어가면 여성을 떠나서 인간의 역사가 몇 년을 퇴보하는 일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조금 더 예민해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115쪽)
가수 J의 열렬한 팬이던 오세연 감독이 자신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는 영화 〈성덕〉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남 일 같지 않아 솔깃했고 무척 기발한 기획이라고 생각했다. 개봉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아쉽게도 내가 사는 지역의 극장에서는 볼 수 없었다. 얼마 후 영화 내용과 제작 과정이 담긴 책 『성덕일기』가 나와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오세연 감독은 한복을 입고 팬미팅에 참석해 J에게도 각인되었을 뿐 아니라, 독특한 팬으로 방송에 출연했을 만큼 ‘성공한 덕후’였다. 그러나 몇 년 전 ‘버닝썬 사건’과 J를 중심으로 한 남성 연예인들의 불법촬영, 집단 성폭행 사건이 공론화되며 그는 큰 충격에 빠지고 만다. 10대 시절의 꿈과 쌓아온 정체성이 온통 ‘오빠’로 채워졌던 그에게는 슬픔과 혼돈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음악방송이 아니라 성폭력 사건 재판이 열리는 법원 앞에서 나눠주는 방청권을 보며 허탈함을 느끼고, 팬들의 맹목적인 사랑을 이해하고자 박근혜 추종자들의 집회까지 찾아가 보는 오세연 감독의 연출은 ‘웃픔’의 연속이다. 같은 사건에 연루된 S의 팬이었다고 고백한 조연출과 함께 소중한 굿즈를 모아 장례식을 치러도, ‘탈덕’의 후유증까지 치유되지는 않는다. 오 감독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정면 돌파’해 들여다보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리고 범죄자가 되어버린 ‘구오빠’를 둔 다른 팬들을 인터뷰하며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어주고, ‘망한 덕질’ 이후의 여정을 재기발랄하게 도모한다.
“처음에는 그저 재미있고 화나고 같이 욕하면서 서로를 위로했더랬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생각나고, 더 마음 아프고, 상실감을 느끼고, 동시에 죄책감을 느낀다. 이 감정의 복잡한 층위가 보여야 한다. (중략) 그렇지만 이게 2차 가해처럼 보이지 않으려면, 그 사람에 대한 연민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 사람을 좋아했던 사람들에 대한 마음들이 되어야 한다. 이건 아주 조심하고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다.”(54쪽)
“승현: 근데 나는 네가 이 영화를 만드는 거랑 같은 맥락으로, 여기에 출연한 계기가 그런 거야. 정면 돌파하는 거지. 나 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을 거 아니야. 너 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을 거고. 위로가 됐으면 좋겠고,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다 함께 정면 돌파하자, 이런 건 아니지만 그 시간을 두고 후회는 안 했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어쨌든 그때는 행복했으니까.”(130쪽)
인터뷰이 중 아이돌 팬이 아닌 이들도 있었는데, 언론사 기자 ‘효실’과 오세연 감독의 어머니 ‘성혜’다. 효실은 2016년 J의 불법촬영 고소 사건을 처음 보도했다가 사건이 무마되면서 팬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은 기자였다. 오 감독은 당시 다른 팬들처럼 사건을 믿지 않고 그를 비난하는 내용으로 쓴 일기장을 직접 읽어주며 사과한다.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누군가를 늦게라도 살피고, 진솔하고 용기 있게 사과하는 모습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이 장면을 보며, 2016년 해당 사건의 피해자가 작년에야 처음 존재를 드러내고 “성범죄 기사 댓글창은 살인방조”라며 국민청원을 통해 2차 가해 방지를 위한 입법 청원을 했던 일이 떠올랐다. 가해자보다 그 주변에서 피해를 입은 이들이 오히려 사건을 경험하며 스스로 성장하고, 이렇게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제 몫을 다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동적이면서도 씁쓸하다. 가해자들도 반성하고 성장하기를, 우리는 기대할 수 있을까.
그래도 우리의 사랑은 실패하지 않았다
한편, 성혜는 알고 보니 딸의 ‘덕질 선배’였다. 점잖고 시크해 보이는 배우 M의 매력에 빠져 팬클럽에도 가입했던 성혜는 그가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고 자살한 것에 충격과 배신감을 느낀다. “사람 보는 눈도 유전되는 걸까?”라는 딸의 물음에 성혜는 아니라고 답하는데, 감독의 질문은 반대 방향으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왜 ‘여덕’은 마음 편히 ‘오빠’를 사랑할 수 없는가 라고 말이다. “우리가 뭐 기후위기에 대한 노래를 불러달라는 것도 아니고, 기아 문제에 대해서 가사를 써달라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좋아했던 팬들한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만 했으면.”(재원의 인터뷰에서)
나 역시 이제는 이름을 거론할 수 없는 ‘오빠’를 사랑했던 ‘망덕(망한 덕후)’이지만, 그렇다고 ‘사랑하기’를 멈추거나 포기하지는 않았다. 오세연 감독이나 인터뷰이들 역시 ‘덕질’에 회의를 완전히 거두지는 못하면서도 또 ‘다음 사랑’을 향해 기꺼이 나아가며, 사랑을 통한 성장을 기대한다. 기자 효실의 말처럼 “세상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고 느껴야 세상이 안전하고 더 밝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여성 팬들을 ‘빠순이’로 폄하한다면, 그는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응원해줄 수 있는 마음을 품”어 본 적이 없어서이리라.
“민경: 어렸을 때는 무조건 좋아하는 연예인이 나를 알아봐주는 게 성덕이었어. 알지? 지금은 그게 아니라 연예인을 통해서 내 삶이 성장할 수 있다면 진짜 성공한 덕질인 것 같거든. 그리고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도 진심으로 그 사람의 삶을 응원해줄 수 있다면 되게 건강한 덕질이라고 생각한다. 덕질을 한다는 거 자체가 한 사람의 삶에 들어가서 그걸 내 삶으로 돌리는 일이잖아.”(174쪽)
“그 사람 없이도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나의 세계다. 누군가를 또 좋아하게 되면 또다시 그 사람의 세계를 조금씩 떼어올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계속 무언가를 좋아하며 살고 싶은 것이리라. 그렇게 만들어진 나의 세계는 계속 팽창할 테니까.”(286쪽)
[필자 소개] 달리. 전북 남원에 있는 지역서점이자 페미니즘 문화공간 ‘살롱드마고’의 공동운영자이며 에세이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2021)의 작가이다. ‘고요한 해방, 나의 목소리를 찾는 글쓰기 여행’, ‘삶의 빈 칸을 채우는 글쓰기’ 등 여성들과의 글쓰기 활동을 기획,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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