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면

[극장 앞에서 만나] 도리스 되리 감독의 〈파니 핑크〉

신승은 | 기사입력 2023/01/07 [09:38]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면

[극장 앞에서 만나] 도리스 되리 감독의 〈파니 핑크〉

신승은 | 입력 : 2023/01/07 [09:38]

본가를 나와 산 지 5년이 되었다. 혈육이라는 이름 아래 가족은 나와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없었다. 더군다나 곪을 대로 곪아버린 상처는 치유 불가능의 상태였다. 나는 오래전부터 집을 나와 혼자 생활하고 싶었으나 가족의 반대가 심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를 보내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나는 2017년 야반도주를 택했다. 바로 전날 원룸을 계약하고 우당탕탕 나와 버렸다. 모든 것이 자유롭고 편했다.

 

지금은 나까지 네 명의 친구가 한 건물에 살고 있다. 처음 나와서 살던, 매우 춥던 그 원룸을 떠나 친구가 살고 있는 투룸에 들어오게 되었고, 바로 아래층에 빈 집이 나와 또 다른 친구 두 명이 들어왔다. 하루 이틀 얼굴을 안 보면 ‘오랜만이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밖에서 묻어온 상처를 공유하고 같은 지향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진짜 가족이 생겼다.

 

▲ 도리스 되리 감독의 영화 〈파니 핑크〉(1994) 중 파니가 혼자 식탁에 앉아있는 모습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도리스 되리 감독 영화 〈파니 핑크〉(1994)의 주인공 파니 핑크는 30세가 된 싱글 여성이다. 그는 독일에 살고 있는 백인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관심이 많아 죽음과 관한 워크숍을 듣는다. 공항 검색대에서 일하며 같이 일하는 남직원에게 매일 성희롱을 듣는 고충을 겪고 있다. 그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

 

그런 그에게 같은 건물에 사는 점성술사 오르페오가 나타난다. 오르페오는 여러모로 파니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우선 흑인 남성이고 동성애자며, 직장이 있는 파니에 비해 수입이 턱없이 적어 다섯 달째 월세를 내지 못하고 있다. 낮에는 점성술을 보고 밤에는 게이 바에서 드랙퀸으로 립싱크 공연을 한다. 아나운서인 남성 연인이 있지만 돈 얘기를 꺼내면 질색한다.

 

그런 둘이 가까워진다. 언뜻 보면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둘에게는 가장 큰 공통점이 있다. 불안함, 그리고 외로움이다. 파니는 친구와 가족, 직장이 있지만 어느 관계 하나 파니를 진정으로 생각해주지 않는다. 오르페오는 연인이 있지만 불안하고, 친구와 가족이 없다. 파니에게 오르페오는 명함을 내밀고 자신의 집에서 점을 봐주게 된다. 좋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다가올 것이라고, 운명의 숫자는 ‘23’이라는 확언을 한다. 그리고 파니는 차 번호가 2323인 아파트 관리인과 마주치게 된다. 파니는 그를 운명의 남자라고 생각한다.

 

처음 오르페오의 집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파니의 장면이 있다. 카메라는 파니의 오른쪽 옆모습을 프레임 왼쪽에 두고 포커스가 맞지 않는 원경에서 오르페오가 담배를 피우며 집안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잡는다. 카메라는 그 상태로 조금씩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좌측으로 팬(pan, 카메라가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행위) 한다. 점점 파니의 정면이 보이고 오르페오는 보이지 않게 된다. 이야기에 점점 빠져드는 듯한 무빙을 통해 관객들은 파니의 감정에 몰입할 수 있다.

 

〈파니 핑크〉의 원제는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Keiner Liebt Mich)다.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파니는 끝내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을까?

 

▲영화 〈파니 핑크〉(1994) 중 파니와 오르페오

 

나를 이렇게 팔 수는 없어요

 

영화의 시작은 결혼정보회사에서 찍은 파니의 영상으로 출발한다. 작은 화면비로 보이는 영상 속에서 파니는 자신을 소개한다. 카메라는 파니의 손, 눈, 귀 등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파니의 해골 귀걸이에서 그가 항상 죽음을 고려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소개를 하던 파니가 돌연 중단하고 외친다.

 

“나를 이렇게 팔 수는 없어요.”

 

파니는 결혼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회의 압박에 점점 결혼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사고가 흘러간다.

 

파니는 새로운 아파트 관리인과의 만남이 구원이 되리라고 믿는다. 흔한 로맨스 영화였다면 그렇게 흘러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대안 가족에 관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파니는 오르페오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몸이 아픈 오르페오를 돌봄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과 연대하는 법을 알게 된다.

 

교차편집 된 운명, 뒤늦게 맞은 초점

 

영화에서는 교차편집이 여러 차례 활용된다. 아나운서인 연인을 보며 립싱크를 하는 오르페오의 모습과 낡은 아파트의 모습을 교차해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다른 장소에서 흐르는 두 시간을 교차해 보여주면서 오르페오와 연인과의 관계가 불안정함을 암시하고 오르페오의 고독을 보여준다.

 

또 축제가 진행 중인 독일 거리의 모습과 결국 임대료를 못 내 쫓겨나 파니의 아파트에서 여생을 보내는 오르페오의 모습을 교차해 보여주기도 한다. 시끄러운 축제 현장은 빠른 컷으로 표현하며, 차분하게 흘러가는 오르페오의 여생은 서서히 움직이는 카메라로 보여준다. 느리고 차분하게 준비하고 있지만 빠르게 다가오는 죽음을 시각화한다.

 

파니는 오르페오가 원하는 죽음의 형태를 최대한 구현해준다. 먼 행성에서 온 존재들이 비행기를 타고 와 데려갈 것이라는 말에 공항에서 비행기 소리를 녹음하고, 비싼 옷을 입고 싶다는 말에 파니 집에 벗어놓고 간 아파트 관리인의 아르마니 양복을 돌려주지 않는다. 오르페오는 그들에게 금을 선물로 주고 싶다고 말한다. 파니는 대출을 받아 금을 산다. 그리고 죽음 워크숍에서 열심히 준비했던 자신의 관에 오르페오를 눕힌다. 양복을 입히고 비행기 소리를 틀고 금을 오르페오 가슴팍에 얹는다. 그리고 오르페오가 그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문밖으로 나간다. 시끄러운 비행기 소리로 인해 아파트 주민들은 난리가 났다. 하지만 파니는 문을 지키며 끝까지 사수한다. 그리고 마침내 들어간 방 안에는 오르페오가 파니에게 선물로 주려 했던 반지만이 남아있다.

 

▲ 도리스 되리 감독의 영화 〈파니 핑크〉(1994) 중 파니와 오르페오의 모습

 

오르페오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파니가 믿어주느냐 믿지 않느냐가 중요하다. 파니는 믿었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그리고 그 돌봄의 시간을 통해 파니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깨우치게 되었다. 진정한 가족을 찾았으며 연대의 힘을 얻었다. 파니는 달라졌다. 전부 쫓겨나게 된 소식을 알게 된 주민들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다. 오르페오를 만나기 전의 파니였다면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파니는 주민들에게 자신의 방에서 커피를 마실 것을 제안한다. 다함께 파니의 집에 모인 주민들은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춤을 춘다. 그리고 한 남자가 덥다며 재킷을 벗는다. 그의 민소매 상의가 드러난다. 뒤에는 크게 오르페오가 말했던 운명의 숫자 ‘23’이 적혀있다.

 

사실 그 남자는 전부터 파니 주변에 존재했다. 죽음 워크숍에 같이 참가하는 수강생으로, 주민으로 함께했다. 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법도 타인을 사랑하는 법도 모르던 파니의 시야에는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와 파니가 함께 등장하는 워크숍 씬이 있다. 원경에 그 남자가, 앞 쪽에 파니가 보이는데 그 남자가 파니에게 종이비행기를 접어 데이트 신청을 할 때까지도 포커스는 꿋꿋이 파니만을 비춘다. 파니가 오르페오와의 시간을 통해 사랑과 연대를 배우고 난 후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찾아온 셈이다.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인 결혼정보회사 영상이 끝나고 나면 주제가가 흘러나온다. 〈몽상가들〉, 〈타인의 취향〉, 〈인셉션〉 등 다른 영화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던 에디뜨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이 나온다. 가사는 내가 지금 당신을 만났기에 지난 일을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노라 말한다. 이 음악은 마지막 장면에도 쓰인다. 파니에 집에서 주민들이 같이 모였을 때 틀게 된 음악이 그것이다.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파니는 환히 웃으며 집 밖으로 관을 내다 버린다.

 

단순히 “23”의 그 남자를 만났기 때문에 파니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감독의 의도는 크레디트 영상을 통해 더 명확히 드러난다.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스태프로 추측되는 사람들이 영화의 주 무대인 아파트 복도에 모두 모여 주제가를 부르는 영상이 함께 나온다. 영화는 혼자 볼 수는 있어도 혼자 만들 수는 없다. 다양한 분야의 스태프가 모여 자신들의 역할을 함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는 예술이다. 삶 또한 그러하다. 그간의 파니의 삶이 혼자였다면, 오르페오를 만난 이후 파니의 삶은 ‘함께’가 되었다. 대안 가족을 통해 파니는 진정한 사랑과 삶의 의미를 찾았고, 오르페오가 떠난 이후에도 그 의미들을 파니 안에서 변함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파니는 이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영화는 함께일 때 삶이 완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안하며 끝이 난다. 성애적 관계, 원 가족의 관계가 아니라 친구, 대안 가족을 통해서도 충분히 실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 삶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나마 가까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서로를 돌보고 이를 통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독립을 하기 전, 연말이면 원 가족들과 가족식사를 하는 연례행사가 있었다. 말없이 진행되는 식사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독립을 하고 가족이라는 개념이 확장된 이후의 지금, 나는 내가 새로 만난 가족들과 연말을 보냈다.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일 년의 고초와 새해의 다짐을 나눴다. 물리적으로 함께 있지 못해도 함께인 사람들을 생각한다. 파니와 오르페오처럼 삶과 죽음으로 각자가 존재하는 공간이 달라질지라도 영원히 함께일 것이다.

 

아픈 오르페오가 자신을 돌보던 파니에게 해주었던 말이 있다. “지금만 생각하라”고. 파니는 과거의 고독과, 미래의 불안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가며 ‘지금’을 놓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파니는 ‘지금’을 살아간다. 오르페오의 말을 빌려 연초의 덕담을 나누고 싶다. ‘지금’을 살아가자고.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 기린그림 2023/01/08 [16:53] 수정 | 삭제
  • 재밌게 읽었어요. 에디뜨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은 진리!
  • ㅇㅇ 2023/01/07 [12:37] 수정 | 삭제
  • 오.. 파니 핑크 영화가 이런 내용이었군요! 난 왜 공항검색대에서 바이브레이터 나온 거밖에 기억이 안 나는거지.. ㅠㅠ 이 영화 엄청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서 얘기 나눈 적도 있는데.. 같은 영화를 보고 다른 부분에 꽂힌다는 걸 알게 되었죠. 오르페오가 신화의 오르페우스를 상징한다는 얘기도 있는데, 판타지와 리얼을 오가는 영화가 매력적이었던 것 같아요. 다시 보고 싶다.
  • 블러 2023/01/07 [12:27] 수정 | 삭제
  • 파니 핑크를 전에 본 적이 있는데 유쾌하고 코믹한 터치감이 좋았던 영화에요. 독일에서 평도 엄청 좋았던 것 같고요. 고독과 죽음을 넘나드는데도 유머가 있는 영화라서 다시 보고 싶었어요. 이 글을 보니까 왜 파니 핑크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하는지 알겠네요.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