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섭식장애를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바라보고, 젠더 관점을 담아 다각도로 접근하는 기획 ‘섭식장애와 여성의 몸’ 기사를 연재합니다.
식탁 앞에서 써 내려간 다짐
흰색 남방에 딱 붙는 요가 바지를 입은 작은 체구의 여성이 나를 향해 뛰어온다. 헐떡이는 숨으로 채영씨 늦어서 미안해요, 라고 말한다.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 GV(관객과의 대화)에서 얼굴을 봤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그녀의 털털한 모습에 감독님이라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최소한의 인사만 나눈 채 식탁 앞에 마주앉았다.
약간의 낯을 가리며 내 앞에 놓인 음식을 봤다. 생 참치와 현미밥, 채소가 큰 볼에 담겨 있다. 감독님은 운동이 끝나 배가 많이 고프다며 음식에 집중했다. 땀에 젖었다 마른 감독님의 머리칼과 한 입 가득 음식을 넣고 우물거리는 얼굴을 보니 긴장이 풀린다. 오래도록 알고 지낸 사이 같다. 내가 오늘 음식을 남기던 다 먹던, 그녀는 신경 쓰지 않을 것 같다. 내 수저에 올려진 음식이 풀인지 밥인지도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왠지 어떤 말을 하든 다 괜찮을 거란 확신이 든다.
숨겨둔 비밀을 꺼내듯 슬쩍 말을 한다. “저는 사실 내 몸을 사랑하라는 말을 싫어해요.” 감독님이 눈을 반짝인다. “내 몸이 못나 보이는데 그걸 억지로 사랑해야 하나 싶어요. 미워하는 채로 지내면 안 되는 건가요? 꼭 나를 사랑해야 하나요? 너무 오글거리는 말 같아요. 그냥 가끔은 밉고 가끔은 좋은 나를 데리고 산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더 마음 편해요.” “정말 동의해요, 채영씨.”
“언젠가 아는 선생님이 제 병을 두고 고혈압이나 당뇨처럼 조절하며 사는 병으로 여기라고 말 한 적이 있는데, 그땐 진짜 미웠거든요?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고나 하는 말인가 싶어서. 근데 지금은 그 말에 동의해요. 병이 있는 나도 나의 일부로 인정하고, 병 말고도 나한테 좋은 모습이 있으니까. 미워하면서도 좋아하고, 그러다 또 미워하고, 그렇다고 저를 포기한 건 아니에요.” “채영씨, 제가 섭식장애 다큐 작업하면서 뭔가 답답한 게 있었거든요? 그게 뭔지 지금 알 것 같아요!”
그렇게 우리의 촬영은 시작되었다.
“사실 제 딸이 십 년 넘게 섭식장애를 앓고 있는데요…”
전화로 엄마의 제안을 받고 조금 당황스러웠다. 엄마가 나의 병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촬영을 수락한 이유는 온전히 김보람 감독님의 전작에 대한 신뢰와 작은 호기심에서 비롯했다. <피의 연대기>는 내 몸에서 벌어지는 ‘월경’에 대해 관심을 갖게 했고, 덕분에 월경통과 월경 전 증후군 등을 조금 용서할 수 있었다. 그런 영화를 만든 여자는 누구일까, 궁금했다. 인생에 그런 사람을 친구로 삼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욕심 또한 약간 갖고 있었다.
두 번째 촬영에서 감독님은 어머님까지 찍을 수 있는지 물어왔다. 엄마는 질색하며 이런 저런 핑계를 댔다. 학생들이 보면 어떡하냐는 둥, 엄마는 스크린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둥. 엄마의 핑계에 화가 난 나는 차갑게 질문했다. “이 병을 나 혼자 겪었나?”
그 순간 엄마는 입을 닫더니 밖으로 나갔다. 이후 감독님의 긴 설득 끝에 엄마는 인터뷰 참여를 결정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난 엄마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온 몸의 진이 빠진 표정. 엄마는 대역죄인의 얼굴을 하고서 나를 꽉 안았다. 엉덩이를 두드리며 젖은 목소리로 뱉은 말. “예전엔 여기에 그렇게 뼈가 만져졌는데… 지금은 이렇게 두드릴 수도 있고…”
나와 엄마가 다큐의 주인공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는 감독님의 제안을 받았을 당시 나의 답은 ‘하고 싶어요’가 아니라 ‘자신 없지만 해 볼게요’였다. 사실 딱 하나 자신 있었다. 십 년 넘는 시간 동안 섭식장애와 동거동락하며 한 톨의 의미라도 남기려 애썼다는 것. 이번 기회에 어쩌면 그 의미를 한 줄의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마음을 움직였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기록자와 피기록자 사이의 깊은 관계를 통해 완성된 영화이다. 감독님이 영화를 만드는 기간 동안 늘 하던 말씀이 있다. ‘영화를 찍다가 우리(감독-채영-상옥)의 관계가 망가져선 안 된다. 그러니 서로에게 솔직하자.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관객은 채영씨와 채영씨 어머니이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 진솔함을 향해 한 발짝씩 다가갔다. 고통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 타인의 고통을 만나려는 마음, 문제를 회피하지 않으려는 마음, 문제를 겪는 이 곁에 있으려는 마음, 함께 살아내고자 하는 마음 등. 여러 마음이 모여 영화를 완성시켰다. 관객들이 영화를 통해 그 속에 담긴 사람들, 영화 뒤에 서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만날 수 있길 바라며.
섭식장애와 함께한 15년은 내게 아픈 시간이기도 했지만 배움의 시간이기도 했다. 섭식장애를 통해 정상적인 삶에 대해 질문하게 되었고, 이 사회에서 비정상이라 낙인 찍히는 것들에 관심 갖게 됐다. ‘여성’, ‘성인’, ‘정상적 신체’, ‘보통의 삶’ 밖에 머무르며 만난 세계는 넓고도 다채로웠다. 비로소 내가 속한 세계를 만난 것 같았다.
난 섭식장애를 앓는 이들 안에 존재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꿀 수 있거나 화 낼 수 있는 대상이 ‘나’뿐이었던 이들이 가진 열정과 분노가 ‘나’를 바꿨듯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한국철학자 함석헌 선생님의 말을 빌리자면 ‘앎은 앓음’이다. 거꾸로 말하면 ‘앓음은 앎’이 될 수 있다. 내가 앓았던 시간은 앎으로 향하는 과정이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가 섭식장애 환자로써 대중 앞에 선 이유는 섭식장애라는 질병을 ‘사회화’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섭식장애는 여러 여성 연예인들을 통해 잠깐의 이슈가 된 적은 있지만, 사회적 문제로 깊이 논의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다이어트의 부작용으로 오는 병, 외모지상주의가 낳은 폐해와 같은 단편적인 해석이 섭식장애에 관한 가장 대중적인 시선인 것 같다.
일반인의 바디프로필을 SNS에서 쉽게 볼 수 있고, 다이어트약 광고방송 다음에 먹방 프로그램이 나오는 사회. 연예인 컴백 시기마다 그들의 체중감량에 관심이 집중되는 사회. 마른 몸을 찬양하는 목소리와 ‘뚱뚱한 몸도 아름답다!’를 외치는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오는 사회. 몸(체중과 몸매)과 음식에 관한 많은 정보가 쉴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한국 사회에서 섭식장애는 묘하게 소외되어 있다.
섭식장애 증상은 현대사회를 닮아있다. 끊임없이 계산하거나 움직이고, 생산적인 목표를 세우고 좌절하기를 반복한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스스로를 ‘쓸모 없는 인간’으로 평가하며 그런 자신을 지독히 혐오하는 모습. 거울에 비치는 자기 모습에 대한 부정 또는 왜곡. 필요가치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불안에서 파생되는 여러 노력들(운동, 공부, 자기개발 등). 지난 시간을 떠올려 보면 섭식장애 증상이 심해지는 것과 한국사회가 원하는 인재상-부지런하고 근면성실하며 원칙적인 인간-이 되려는 노력은 늘 동반되었다.
한편, 섭식장애는 정상성을 거부하는 강력한 반동행위이기도 하다. 섭식장애 환자는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 ‘식사’가 사회생활의 일부인 문화 속에서 남과 같이 먹기를 거부한다. 절제가 미덕이라는 말을 무시하듯 많은 양의 음식을 보란 듯이 먹어낸다. 부/모/사회가 시도하는 ‘올바른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먹고, 살 것을 선언한다. 그동안 받아 온 사랑의 형태를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사랑의 방식을 요구한다.
거식과 폭식 행위는 신체건강을 약화시킴으로써 필연적으로 타인에게 의지하는 몸이 되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한 인간이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하는 목숨을 건 ‘투쟁 행위’로 해석할 수도 있다. 나의 경우 엄마와 나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엄마가 아닌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먹는 방식이 엄마를 향한 분리선언의 시작이었다. 엄마의 정성을 거부하고 사랑에 물음을 던졌다. 없는 척 묻어둔 결핍을 파헤쳐 드러내고 이를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해달라’는 나의 한결같은 요구는 거식과 폭식, 구토, 마른 몸, 살찐 몸 등의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어 왔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에 출연한 것은 나의 아픔 안에 갇혀 있기를 멈추고 타인의, 당신의 아픔과 만나려는 시도이다. 영화를 통해 세상에 나옴으로써 섭식장애라는 비밀 안에 숨어 있는 내가 조금 덜 외로워질 수 있었다. 관객과의 만남은 이런 나의 삶도 가치가 있음을 배우는 현장이기도 했다.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나의 아픔이 타인의 앞에 섰을 때, 나의 아픔을 벗어나 타인의 아픔과 마주했을 때 난 ‘우리’라는 의미를 되새기게 됐다. ‘우리’가 되었을 때 개인의 아픔은 모두의 것이 되고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건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 ‘잘 아프는 것’이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려는 노력보다 중요한 것은, 정상의 범주에서 밀려나 사회의 벼랑 끝에 선 사람의 손을 잡는 것이다. 나 또한 여러 번의 벼랑을 만났다. 죽음의 문턱을 내려오기도 했다. 위기의 순간마다 있어줬던 친구, 기회, 만남들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그 덕에 돌봄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그동안 나를 지켜준 돌봄 관계를 향해 보내는 감사 인사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삶이 계속된다는 건 고통의 연장’이라던 나의 확신이 조금 움직였다. 삶이 연장된다는 것은 기회의 생성이 아닐까. 조금 더 삶을 받아들여보려 한다. 영화를 통해 말하기를 시작하고 싶다. 섭식장애가 상징하고 있는 것에 대해. 모녀 관계에 대해. 애착관계, 결핍과 치유에 대해서. 더 나아가 이 사회를 살며 아프고 슬픈 우리에게 부재한 것들에 대해 같이 말하고 듣고 싶다. 바라는 그 날을 기다리며 다짐한다. 아픈 나를 싫어하고 고통을 두려워하기보단 차라리 아픔을 선택해보자고. 아픔을 통해 사유하고, 아픔으로 만남을 열며 더 많은 아픔과 함께하기 위해 더 열심히 앓아보자고..!
[필자 소개] 박채영(메이). 두 마리의 고양이, 한 명의 동거인과의 일상을 1순위에 놓으려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추운 날과 무례한 말투를 싫어하고 도심 걷는 것과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합니다.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에 출연했습니다. 식탁에 앉아 쓰거나 읽는 것에 익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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