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섭식장애를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바라보고, 젠더 관점을 담아 다각도로 접근하는 기획 ‘섭식장애와 여성의 몸’ 기사를 연재합니다.
이대로 죽을 순 없어
그 날의 나는 머리에 500원짜리 동전만 한 구멍이 나 있었고(원형탈모), 크라운을 씌워 둔 치아는 더 썩어서 ‘임플란트를 해야 하니 말아야 하니’ 치과에서 거하게 잔소리를 들은 엉망진창의 20대 후반이었다. 그 날 오전, 10년 넘게 진료를 봐 주신 치과 의사 선생님이 “여기는 네 나이에 썩을 수가 없는데, 대체 왜 이런 거야?” 라고 물었지만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차마 “제가 10년 넘게 먹는 족족 토해서 그래요.” 라고 말할 수 없었다.
먹고 토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질릴 대로 질렸고,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은 매번 더 지독한 절망으로 타락했다. 이대로 죽으면 “쟤는 결국 먹고 토하다가 죽었네”라는 말을 들을 게 뻔했다. 언제 죽더라도 그건 아니라고, 섭식장애라는 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을 만큼 노력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그렇게 언젠가를 대비한 유언이자 변명의 목적이었던 내 고백은 2017년 6월 21일, 구독자가 100명도 되지 않는 내 유튜브 채널에 올라갔다.
사실 ‘몇 명이나 보겠어?’ 라고 생각했다. 본다고 해도, 댓글에 욕만 달려서 그 욕을 견디다 못해 도망치듯 영상을 내릴 게 뻔했달까? 하지만, 모든 건 나의 예상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2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 영상을 봤고 400개에 가까운 댓글이 달렸다. 심지어 악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감사합니다. 다행입니다. 만나고 싶어요. 저도 여기 있어요.
사람들은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따뜻한 글들로 안아주었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평생을 먹고 ‘토하는 정신병자, 괴물’이라는 소리를 들어왔고 누구보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내 인생은 절대 나아질 수 없을 거라고, 내가 죽을 곳은 변기 앞일 거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이 영상을 통해 나는 수 천명의 친구를 만났다. 무조건적으로 응원해주는 내 편들이 생겼다.
6년 전의 나는 알고 있었을까?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도 이해 받지 못했던 삶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통해 위로 받고 응원 받아 대학원에 진학하고 그 이야기로 석사 논문을 쓰게 될 줄 상상이라도 했을까?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 속 유일한 희망이었던 유튜브
6년의 긴 대학생활을 끝내고 나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을 시작했다. 나쁘지 않았다. 오랫동안 꿈꿨던 일본 생활이었고, 가족들과 거리를 두며 지낼 수 있었고, 좁디 좁은 고시원이 아닌 혼자 살기 충분한 ‘내 공간’이 생겼으니까, 그러나 나는 1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퇴사했다. 너무나 버티고 싶었지만, 그러다가는 외국에서 시체로 발견될 지도 모를 만큼 우울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섭식장애가 가장 심했던 때와 비슷하게 혹은 더 심하게 폭식과 구토를 반복하고 있었다. 교대 근무로 수면 패턴도 엉망이라 7개월 내내 부정 출혈에 시달렸다. 라지 사이즈 피자 한판, 오븐 스파게티, 콜라 1.5L, 치킨 윙봉 5조각,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입 속에 욱여 넣고 어김없이 변기 앞으로 향했던 여느 밤, 유튜브에서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에게 미안했고 진심으로 모든 걸 그만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정말 그만 반복하고 싶었다.
도망치듯 퇴사를 하고 남자친구가 있는 호주로 건너갔다. 남의 집에 얹혀 살면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토했다. 이젠 토해도 살이 빠지긴커녕, 몸이 부었다. 온몸에 독소가 퍼진 것 같았다. 살 쪄도 괜찮아~라고 생각했지만 폭식과 구토는 멈출 수 없었다.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자 위로였던 섭식장애는 이미 내가 되었고, 나는 그 외에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두 달 정도 호주에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바로 약물 치료를 시작했다. 나의 병명은 섭식장애 그리고 조울증이었다. 안타깝게도 섭식장애에 관해선 병원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이미 충분히 말랐는데 왜 그러지?” 라는 의사의 말에 “섭식장애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자살 사고만 어떻게 좀 해주세요” 라고 답했다. 도대체 섭식장애는 어디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거지? 지방에는 섭식장애 전문병원이 없었다. 이 병에 있어서 만큼은, 항상 고립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은 유튜브 뿐이었다. 일본에서도 호주에서도 한국에서도 유튜브를 통해 내 이야기를 공유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곳의 사람들과 함께 했다. 그들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었고, 낫기를 바랐다. 빨리 낫지 못한다고 나무라지 않았고 재발을 거듭해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함께 하자고, 살아보자고 했다.
우리는 식단일기를 공유하는 모임을 통해 주기적으로 통화했고, 독서모임을 계기로 직접 만나기도 했다. 사람들은 간간히 메일로 안부를 물었고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우리가 서로를 살렸다고 생각한다. 음, 그들이 나를 살린 건 확실하다. 먹고 토하는 괴물의 삶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내가 괴물이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내가 그들과 함께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먹고 토하는 이야기로 논문을 쓸 거야
“진솔 씨는 고객상담이 아니라 심리상담이 하고 싶은 거 아니에요?”
취업 준비하는 척이라도 하려고 종종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봤다. ‘건강한 다이어트 습관’이라는 슬로건에 끌려 지원한 회사에서 들었던 말이 이따금씩 마음을 두드렸다.
얼굴을 공개하고 섭식장애 이야기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얻었다. 영상을 본 사람들은 꾸준히 내게 상담이나 조언을 요청했고, 그때마다 나는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경험만으론 부족해. 뭔가 더 확실하게 도움이 되고 싶어.’ 상담가가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학위에 욕심이 있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하는 말이,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가 조금 더 도움이 되었으면 싶어서, 지켜 봐주는 사람들과 뭐라도 하고 싶어서 석사 과정에 지원했다.
“저는 섭식장애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싶습니다.”
논문의 논 자도 모르던 나는 ‘무지와 연대의 용기’로 대학원에 합격했다.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기 전부터 내 유튜브 채널 구독자들은 ‘섭식장애 연구’에 진심이었다. 자신이 없어지고 도망치고 싶어질 때마다 “솔님은 할 수 있어요. 솔님이니까 할 수 있어요. 절대 혼자가 아니에요.” 라며 내 손을 잡아주었다. 석사 과정에 있는 대학원생들이 연구 주제와 방법 때문에 방황하는 시기에, 나는 누구보다 단단했고 확실했다. 내 이야기는 유튜브를 통해 할만큼 했으니, 이젠 나를 살려준, 나와 함께 해 준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전할 차례였다.
병원(약물)치료와 상담치료를 모두 경험한 사람일 것, 3년 이상의 유병 기간, 섭식장애와 관련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공개할 수 있는 사람일 것 등 까다로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분들이 연구 참여자로 지원해주었다. 아쉽게도 5분의 이야기만 싣게 되었지만, 그 경험은 우리의 연대가 그저 불행의 전시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 여름방학 내내 부산에서 인천, 서울, 부천 등을 오가며 하루가 멀다 하고 밤을 새는 날의 연속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들과 마주하는 매 순간, 살아있다고 느꼈다.
숨어있다고만 생각했던 이들은 나를 집으로 초대하고, 자신의 일기나 치료 기록들을 공개하며, 연구자인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주었다.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이해 받을 수 없을 거라 여기며 묻어뒀던 일들을, 삶을 우리는 공유했고 연대했고 다시 살아냈다. “고마워요, 덕분에 저에 대해서 그리고 이 병에 대해서 오롯이 생각할 수 있었어요.” 과거의 트라우마가 몰아치는 밤에는 축어록(인터뷰 녹음 파일을 타이핑한 기록)을 읽으며 견뎠다.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고 섭식장애를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여기 이렇게 존재하는데, 사회는 여전히 우리를 의지박약, 다이어트에 미친, 외모지상주의에 갇힌 사람들이라 칭하며 이 병을 단순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 바쁘다. 자극적인 면만 강조하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가족도 친구도 심지어는 의사나 상담사와 같은 전문가들까지.
입을 잃고 설 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을 위하여
“엄마, 나는 그냥 살을 빼고 싶어서 먹고 토하게 된 게 아니야.”
가정폭력과 과거 트라우마의 잔해인 나의 섭식장애는 가족들에게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여겨진 적이 없었다. (묻지도 않았고 항상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받았다.) 연구 참여자들은 물론 유튜브를 통해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험이 그러했다. 말할 수 있는 입을 잃었고 설 자리를 뺏긴 채, 병과 함께하는 내내 자신만을 탓하며 버텼다. 버텼다고 할 수 있을까? 연구 참여자분의 말을 빌리자면 그건 ‘산 송장’과도 같은 삶이었는데, 그렇게 이 병은 종종 우리를 죽음으로 내몰기도 했다.
‘본 연구는 섭식장애를 향한 편견에 대한 처절한 외침이자 간절한 호소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된 우리의 연구는 더 이상 숨지 않고 빼앗기지 않고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당당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선포와 같았다. 혼자가 아니었기에 가능했고, 5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살아준 이들과 함께 했기에 끝까지 해낼 수 있었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하고,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누구보다 우리 자신이 타인, 사회의 틀이 아닌 온전한 시선으로 섭식장애와 이 병과 함께하는 자신을 바라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병은 병일뿐, 절대 내가 될 수 없으니까. 삶을 빼앗기지 않기로 약속하자. 내 오랜 친구들에게 항상 전하는 인사로 글을 마친다. ‘항상 거기 계셔주시고 함께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필자 소개] 이진솔. 「‘섭식장애 환자들의 삶에 관한 내러티브 탐구: 게워내고 토해내는 삶」(2022)이라는 논문을 썼습니다. 유튜브와 블로그를 통해 섭식장애와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혼잣말 장인이며, 현재는 대학교 상담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https://brunch.co.kr/@ehqhdtksrlf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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