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는 나이도 국경도 없다.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말이지만 쉽게 적용되지 않는다. 특히 ‘나이’를 살펴보면 젊은 여성과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연상 남성의 결혼은 쉽게 용인되고 ‘도둑놈’ 소리를 농담으로 주고받지만, 반대의 경우 그렇지 못하다. ‘도둑놈’ 소리 또한 유쾌하지 못하다. 젊은 여성을 훔칠 수 있는 소유물로 비유하기 때문이다. ‘국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임을 내세우며 ‘혼혈/순혈’ 등의 언어로 다문화가정과 그렇지 않은 가정을 갈라놓는다.
에미와 ‘알리’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74) 속에는 나이와 국경을 초월한 사랑이 그려진다. 남편과 사별한 60대 독일인 여성 ‘에미’와 젊은 이민자 모로코인 남성 ‘알리’의 사랑을 담은 로맨스 영화다. 사실 ‘알리’는 모로코에서 사용하던 ‘엘 헤디 벤 살렘 바렉 모하메드 무스타파’라는 긴 이름이 따로 있다. 하지만 여기, 독일에서는 다들 알리라고 부르고 본인도 자신을 알리라고 칭한다. 국경을 넘어오면서 하나의 자아를 지우고 남들이 부르기 편한, 독일인들에게 편한 자아를 선택해야만 했던 셈이다.
내 이름도 비슷한 일을 종종 겪는다. 서양인들은 ‘신승은’ 세 글자 발음이 참 어려운가 보다. 언젠가 알게 된 백인에게 이름을 말했더니 그냥 ‘써니’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자신들에게 편한 대상으로 존재를 치환해버리는 일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수많은 동양인들이 서양에서 비슷한 일을 겪는다.
비가 많이 오던 어느 날, 에미는 아랍음악이 나오는 가게로 들어간다. 60대 여성의 등장에 술집에 있던 젊은이들의 시선이 쏠린다. 아무도 환대를 하지 않는다. 그는 사장에게 ‘이곳에서는 항상 신비한 음악이 나오더군요.’ 하고 말한다. 그 ‘신비한’ 음악은 아랍음악이었다. 에미는 자리에서 콜라를 주문한다. 알리의 친구가 알리에게 늙은이 손이라도 한 번 잡아주라는 말을 던진다. 알리는 에미의 자리로 가 콜라를 대신 계산하고, 함께 춤을 추겠냐고 한다. 둘은 음악에 맞춰 함께 춤을 추며 대화를 나눈다.
알리가 에미를 데려다준다. 에미의 집 복도에서 그 둘은 또 대화를 나눈다. 에미는 비가 많이 오니 쉬었다 갈 것을 제안한다. 둘은 에미의 집으로 올라가고 그것을 목격한 1층 주민은 다른 주민과 함께 비난을 한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무지에서 온 비난은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한국 내에서도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은 공고하기 때문이다. 임금체불, 열악한 환경 등 구조적 차별이 존재한다.
제노포비아, 우리에게도 익숙한
사회는 그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기도 한다. 내국인의 범죄율이 훨씬 높음에도 불구하고, 차별 담긴 시선은 사라질 줄 모른다. 그들의 문화를 저급하게 취급하기도 한다. 최근 대구 이슬람 사원 건축 건으로 대구 시민 중 일부가 돼지머리를 놓고 난동을 부린 일이 있다. 이슬람 문화에서 돼지고기는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점을 이용한 폭력이다. 참여자들은 그들을 테러리스트로 칭하기도 했다.
이슬람의 모든 문화가 옳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여성을 차별한다. ‘히잡’으로 여성의 몸을 가리게 하고, 성인 여성은 남편 없이 외출할 수 없는 국가도 있어 그곳의 여성에게는 결혼이 선택 아닌 필수이다. 〈파르바나 : 아프가니스탄의 눈물〉에 그 현실이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슬림 유학생들이 차별과 혐오를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비판해야 할 대상을 가려 판단하지 않는다면, 제노포비아((xenophobia, 외국인 혐오자)가 될 것이다.
일본인을 흉내 내는 개그맨 김경욱의 캐릭터 ‘다나카’가 인기다. 그는 일본인의 어설픈 한국어 발음을 희화화하며 따라 한다. 이 개그에는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 걸까?
영화 속 알리는 에미가 항상 가던 가게에 방문한다. 식료품을 사려는데 자꾸만 비슷한 발음의 다른 물건을 내놓는다. 알리가 분명히 정확하게 발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끝까지 알리가 원하는 물건을 내놓지 않는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독일어나 똑바로 배우고 오라.”고. 이민자 차별의 전형적인 행태다.
‘다나카’는 이를 답습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웃고 심지어 일본에서도 그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의 코미디는 제노포빅을 기반으로 한다.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는 일본인 입장에서 본다면 유쾌할까. 표현의 자유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위쪽을 향할 때 쓰이는 말이다. 반대 방향을 향한다면 그것은 혐오에 불과하다.
다가가고 멀어지기
파스빈더의 카메라 워킹은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인물을 찍을 때, 보통의 영화라면 고정된 카메라로 촬영할 법한 쇼트에서 다소 무리하게 다가간다. 배경과 인물을 함께 담던 풀샷에서 클로즈업 쇼트까지 한 번에 이동하기도 한다. 배경은 프레임 아웃되고 아주 조금만 남은 채 인물이 쇼트를 장악하게 만든다. 이는 알리에게도 에미에게도 적용된다. 실컷 다가간 카메라는 별 대사 없이도 우리가 인물에게 이입하게 만든다. 들리지 않는 보이스 오버가 상상 속을 메울 만큼 다가간다. 파스빈더는 단순한 방법을 통해 인물의 감정을 관객이 해석하게 만든다.
그렇게 다가간 카메라는 또 훌쩍 멀어지기도 한다. 멀어지면 배경들이 다시 보이고 이들이 처한 현실이 다시금 드러난다. 이 방법이 가장 인상 깊게 사용된 씬은 야외 카페 씬이다. 모두가 그들을 차별한다. 슈퍼 주인도, 에미의 동료들도, 이웃 주민들도, 에미의 자식들도 등을 돌린다. 야외 카페 한 테이블에서 손을 잡고 있는 알리와 에미가 보인다. 직원들이 모두 나와 그들을 혐오하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다. 그들의 모습과, 울며 말하는 에미의 바스트 쇼트가 번갈아 보인다.
에미는 너무 힘들다고 그간 쌓여왔던 감정들을 토로한다. 그래도 알리의 손을 놓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지켜보고 있는 직원들에게 소리친다. 이 사람이 자신의 남편이라고. 둘은 모로코로 여행을 다녀오기로 결심하고 씬은 마무리된다. 마지막 쇼트에서 카메라는 둘의 바스트 샷에서 뒤로 쑥 빠져 롱샷에 가까운 풀샷으로 이동한다. 그들이 아주 작게 보이고. 비어있는 수많은 테이블들이 보인다. 아무도 그들 곁으로 오지 않는다. 냉담한 현실이 참혹하게 비춰진다.
한국에 온 한 흑인이 자신이 지하철을 타면 아무도 옆에 앉지 않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과연 1974년의 독일과 지금의 한국은 얼마나 다른가.
수많은 벽들과 퀴어함
이들이 겪는 차별을 보여주는 오브제로 영화는 벽을 적극 활용한다. 둘만의 공간인 에미의 집 안에서도, 그들이 결혼한 날 모처럼 방문한 좋은 식당에서도 그들은 겹겹이 쌓인 벽 안에 존재할 뿐이다. 보통 벽을 원경에, 인물을 전경에 배치할 텐데, 역으로 벽이 전경에, 인물이 원경에 배치된다. 심지어 벽이 인물과 더블(영화 속에서 사물 혹은 인물이 다른 사물 혹은 인물과 겹치는 현상)되어 인물을 조금 자르기도 한다.
이 쇼트들은 그들이 얼마나 답답한 상황인지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또 그들이 넘어야 할 벽이 많다는 것을 드러낸다. 왜 어떤 사랑은 벽을 배경으로 하지만 어떤 사랑은 벽의 뒤에 서야 하는가. 이 영화는 이성애 로맨스를 담고 있지만 이러한 지점에서 퀴어적 해석이 가능하다. 파스빈더는 커밍아웃한 감독으로, 퀴어를 담은 〈폭스와 그의 친구들〉(1975)을 찍기도 했었다. 알리 역의 배우 엘 헤디 벤 살렘은 실제 파스빈더의 연인이었다. 그가 느껴온 벽들과 에미와 알리를 가둔 벽은 다른 벽이 아닐 것이다.
알리와 에미는 여러 고달픈 상황 속에서 이별 직전에 이르게 된다. 결국 불안이 영혼을 잠식한 셈이다. 그들은 처음 그들이 만났던 가게에서 다시 만난다. 아랍음악이 흐르고 에미는 전과 같은 자리에 앉는다. 알리가 다가온다. 전처럼 똑같이 춤을 추자고 제안한다. 그 둘은 춤을 추며 화해의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알리가 쓰러진다. 알리는 심각한 위궤양이었고 치료를 해도 재발할 것이라는 의사의 의견을 에미가 듣는다. 그들의 사랑은 얼마 남지 않았다.
영화는 알리의 병의 원인을 외국인 노동자들의 스트레스라고 말한다. 끔찍한 차별을 겪어내며 알리는 지쳤을 것이다. 한 사회의 차별과 혐오가 한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내몰 수 있음을 함의한다.
알리가 정비공에서 일하며 모은 돈과 에미가 청소 노동으로 모은 돈을 함께 정리하는 장면이 있다. 에미는 기뻐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 금방 부자가 되겠어요. 천국의 한 조각이라도 살까 봐요.” 그들은 천국을 욕심내지도 않는다. 그저 한 조각만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다른 언어로 표현한다면 이것 아닐까. 천국의 한 조각을 욕심 내보는 것. 그 한 조각마저 빼앗으려는 혐오사회가 재빨리 탈바꿈하길 바란다. 알리에게는, 그들에게는, 우리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없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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