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쓰기를 멈추고 더 잘 듣기로 한다

〈책방에서 밑줄 긋기〉 김혜진 장편소설 『경청』

달리 | 기사입력 2023/02/07 [17:29]

그녀는 쓰기를 멈추고 더 잘 듣기로 한다

〈책방에서 밑줄 긋기〉 김혜진 장편소설 『경청』

달리 | 입력 : 2023/02/07 [17:29]

[연재 소개] 여성들의 말과 글이 세상에 더 많이 퍼지고 새겨져야 한다고 믿으며, 서점에서 퍼뜨리고 싶은 여자들의 책을 고른다. ‘살롱드마고’의 신간 책장에서 마음에 새겨지는 책을 한 권씩 밑줄 그으며 꼭꼭 씹어 독자들과 맛있게 나누고자 한다.

 

“말에 관해서라면 그녀는 두려움을 느껴 본 적이 없다. 그녀는 말의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믿었다. (중략) 그리고 그녀는 깨닫는다. 자신은 그저 넘쳐 나는 말들에 둘러싸여, 불필요한 말들을 함부로 낭비하는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이 한 말이 언제 탄생하고 어떻게 살다가 어디에서 죽음을 맞이하는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김혜진 소설 『경청』 225쪽)

 

▲ 살롱드마고에 입고된 김혜진 소설책들. 『딸에 대하여』(2020, 민음사) 『너라는 생활(2020, 문학동네)』 『경청』(2022, 민음사) ©달리

 

재미로 본 새해 운세 어느 대목에 “구설수를 조심하라”는 문장이 나오자, 순간 가슴이 덜컹 했다.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다. “악플도 관심”이라는 말도 들어본 적 있지만, 어떤 종류의 관심은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 아무리 대중의 관심으로 먹고 사는 이라도, 비난과 폭언은 사람의 마음을 순식간에 할퀴어 무너지게 만든다.

 

오래 전 무심결에 뱉은 말이 누군가에 의해 조각난 채 짜깁기되어 주변에 일파만파 번진 적이 있다. 나 때문에 상처받았다는 사람들이 현실에 등장하자, 나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집단적 추궁과 심판 앞에, 그 말의 진위나 그것이 퍼진 과정을 따져볼 여유가 없었다. 나는 그저 납작 엎드린 채 악몽 같은 순간이 지나가기만 바랐다.

 

그 일 이후 나는 꽤 오랫동안 아팠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자책과 원망, 반성과 억울함이 엉망으로 꼬인 실타래가 되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돌아가 짚어보다가 과거의 덫에 빠져 헤매기를 반복했다. 결국, 나는 고통을 더 매만지는 데 항복하고 그 사건도 사람들도 마음에서 끊어버렸다.

 

의도치 않게 세간의 도마에 오르거나 주변 관계에서 오해를 살 때,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을 둘러싼 사람들이 원하는 건 사실 ‘대화’가 아니라 ‘주장’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주장’만 존재하는 세상에서 ‘진실’은 스피커의 크기로 결정되고, 그 앞에서 ‘진심’은 힘이 없다. 자신이 옳음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옳지 않다고 확신하는 타인에게 날 선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하면 한없이 무자비해진다. 대화 불능한 이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구차하고 부질없는 짓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평행선을 타고 살아가다 어긋난 만남만 반복하게 되는 것일까.

 

“그녀는 말이 이끄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그 속에서 매번 길을 잃었다.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잃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는 몇 개의 단어가, 한 줄의 문장이 심장을 찌를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러니까 그때, 매일 밤 스마트폰과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그녀는 수백 번 수천 번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65쪽)

 

소설 『경청』의 주인공 해수 역시 예기치 않은 사건에 휘말려 ‘공공의 적’으로 몰린 후, 자신의 입장과 감정을 당당히 밝히지 못한다. 그는 일 년 가까이 날마다 주변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편지를 써 말하지 못한 것들을 꾹꾹 눌러 담는다. 예의를 갖추며 건조하게 시작한 편지는 매번 억울함과 해명, 원망으로 흐르다 완성되지 못한 문장으로 남는다. 해수는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 언어를 찾기 위해 마치 돋보기를 든 편집자처럼 편지를 다시 읽고 고치기를 반복하지만, 결국 매일 밤 부치지 못한 편지를 들고 나가 자신의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폐기시킨다. “용서받지 못한 가해자인가, 어쩌면 가혹한 누명을 뒤집어쓴 피해자인가.”

 

십 오년간 심리상담사로 일하며 TV에 전문가로 출연할 만큼 자기 분야에서 인정받았던 해수는, 모자랄 것 없는 삶의 토대 위에서 감정도 언어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 믿어왔다. 하지만 TV에 나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한 연예인을 비난하는 발언을 했다가, 그가 자살하면서 일과 관계 모두를 한꺼번에 잃고, ‘사람 죽인 상담사’로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된다.

 

세상으로부터 추방되고 나서 해수는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숨을 수 있는 밤 시간에 주로 산책을 한다. 그 산책길에서 어느 날 우연히 아픈 길고양이 순무와, 순무를 돌보는 동네 초등학생 세이를 만난다.

 

“뭐든 쌓는 건 어렵고 허물어뜨리는 건 쉽다. 삶이 신중하게 블록을 쌓아 올리는 것과 같다면 단 하나의 블록을 빼는 것만으로도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걸 그녀는 배우는 중인지도 모른다. 교훈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이처럼 도처에, 발에 걷어차일 정도로 흔하다는 사실에 놀라면서.”(156-157쪽)

 

▲ 김혜진 장편소설『경청』(2022, 민음사)  ©달리

 

보이기 시작하면 마음이 쓰이는 법이다. 그 마음을 외면할 수 없으니 우리는 공존할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세이로부터 길고양이 돌보는 법을 배우고 함께 구조하는 과정에서 해수의 감각과 소통의 통로는 새롭게 열린다. 해수는 늘 자신의 주변에 있었으나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에게 익숙한 언어가 아닌 방식으로 서투른 ‘말 걸기’를 계속 시도한다. 상대를 계속 바라보고, 기다리면서.

 

말하는 일에 능통하다 믿어온 자신이 말 한 마디에 의해 삶이 산산조각나고,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장벽을 느끼면서 그는 혼자 쓰는 편지에서조차 ‘말’을 잃었다. 익숙했던 언어의 벽이 무너지자 삶의 방향도 길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말 아닌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길고양이 순무, 아무 의도나 계산 없이 그저 생각난 그대로를 말해버리는 초등학생 세이와 관계를 쌓아가며 해수는 새로운 대화를 경험한다. 이들과의 관계는 “해석하고, 설명하고, 반박하고, 동의하고, 고백하”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자신”한 해수에게 다른 세상의 문을 열어주고, 뜻하지 않은 위안을 주었다. 이들의 대화처럼, 돌봄도 일방적으로 흐르지 않은 것이다.

 

“언어가 생략된 순무와의 교감이 그녀에게 이상한 안도감을 준다. 수없이 많은 말들로 소란스럽던 세계에서는 느낄 수 없던 감정이다. 헤아림과 공감, 위로와 포용. 그런 것들은 이처럼 완전한 침묵 안에서만 가능해지는 것일까.”(224쪽)

 

해수는 순무를 살리는 것이 마치 자신을 수렁에서 건지는 일인 듯 구조에 온통 몰입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이 행위가 어쩌면 자기연민이 아닐까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한다. 세이가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상황임을 짐작하면서도, 도움을 원치 않는 세이의 마음을 존중하고 세이가 허용한 곳까지만 다가간다. 호의나 도움을 베푸는 이로서 자기감정에 빠지지 않고 그것과 거리를 두려 노력하는 태도는 김혜진 작가의 것이다. 이 ‘거리두기’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고집스러울 정도로 견지되는데, 이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돌봄 관계의 모습이자 약자에 대한 윤리의식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고통으로 연결된 관계에서 ‘연대’를 쉽게 호명하곤 하지만, 고통의 경험만으로 서로를 다 이해하거나 책임질 수 없다. “보잘 것 없는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전부를 걸고 잃을 수도 있는 싸움”의 거리에서 살아온 순무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통덫을 놓고 자신을 기다리는 해수를 믿지 않는 것처럼. 해수와 세이, 순무가 끝내 공존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과거와의 싸움을 접기로 하며 해수가 깨달았듯, 우리는 고통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선의와 연민으로 연결될 때 서로 기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연습해도 지는 피구 게임을 멍청하다고 투덜거리는 세이에게, 해수는 “시합은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지는 쪽이 언제나 배우는 게 더 많은 거야.”라 말해준다.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며 그때의 자신을 힘껏 껴안기로 한 해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쏟아내는 편지를 쓰지 않는다. 대신 더 잘 듣기로 한다. ‘경청’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상담사였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내면에 나약하기 짝이 없는 상처받은 마음이 있다는 걸 확인해 왔다. 그런 마주침은 선의와 연민에 기대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그런 믿음뿐인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남겨진 것. 그녀가 잃지 않은 것. 그러므로 그녀가 지켜 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걸까.”(296-297쪽)

 

[필자 소개] 달리. 전북 남원에 있는 지역서점이자 페미니즘 문화공간 ‘살롱드마고’의 공동운영자이며 에세이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2021)의 작가이다. ‘고요한 해방, 나의 목소리를 찾는 글쓰기 여행’, ‘삶의 빈 칸을 채우는 글쓰기’ 등 여성들과의 글쓰기 활동을 기획,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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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냐 2023/04/09 [15:40] 수정 | 삭제
  • 말은 유용하기도 하지만 피곤한 것이기도 해서 개, 고양이, 비둘기, 파리, 모기, 개구리등이 사람과 같은 말을 사용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말- 배가 아프다, 배고프다, 어디서 누구한테 맞았다, 가렵다 등- 못하는 짐승이라 무엇이 필요한 지 몰라 애처로운 한편 안심이 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들의 요구를 넌지시 모르는 척해도 원망을 사지 않으니까요. 정확히 표현하기도 어렵지만 해찰하지 않고 듣기는 더 어렵습니다. 개, 냥이 앞에서 맘껏 떠들면 그들은 무심한듯 다 들어주는 것 같다니까요.
  • ㅇㅇ 2023/02/11 [00:22] 수정 | 삭제
  • 요즘 보고 싶은 소설들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에요. ㅎㅎ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야지.
  • 반가워요 2023/02/08 [10:38] 수정 | 삭제
  • 말들로 소란스럽고 혼란스럽고 거짓과 왜곡에 분노했던 시간이 있었는데, 누구나 그런 일들이 있을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언어를 전보다는 믿지 않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언어란, 꼭 문자가 아니라는 거.. 동물들도 언어가 있고 인간도 말이 아닌 다른 언어가 있다는 것에 더 민감해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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