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섭식장애를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바라보고, 젠더 관점을 담아 다각도로 접근하는 기획 ‘섭식장애와 여성의 몸’ 기사를 연재합니다.
나는 잘 나가는 여자 아이돌 멤버다. 무대에 올라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열광하는 이들을 보며 활짝 웃는다. 그러나 곧 시점이 전환된다. 화면 속에 아름다운 아홉 명의 여자아이들과 혼자서만 울퉁불퉁 살찌고 못생긴 내가 있다. “저런 애가 왜 거기에 있는 거야?”, “살찌니까 자신감 없어 보이고 동태 같다”, “다른 노력하는 애들도 있는데…”, “너무 뚱뚱하다.” 누군가 나를 보며 말한다. 수치심을 견딜 수 없어 도망쳐 보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내가 어디 있건 찾아내 카메라를 들이댄다. 숨을 헉헉 몰아쉰다.
눈을 뜨니 고양이들이 곁에서 자고 있다. 꿈이다. 이런 꿈을 꾼 날에는 호흡이 진정될 때까지 한참이고 기다려야 한다.
회사는 43kg을 요구했다
화려하고 반짝이는 세계의 일원이 되기를 얼마나 열망했는지 모른다.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아이돌 데뷔 기회가 찾아왔다. 꽤 유명했던 아역배우를 필두로 여자 아이돌 멤버를 짜고 있는데, ‘덕후몰이상’을 담당할 멤버로 내가 발탁된 것이다. 마침 쌍꺼풀이 없는 여자 연예인의 얼굴이 새로운 유행처럼 각광 받고 있었다. 쌍꺼풀이 없어 성형수술을 해야 오디션에 붙을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던 내게 주어진 꿈만 같은 기회였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얻게 된 기회는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회사에서는 매주 전신이 나오는 영상을 찍어 갔다. 그들은 매번 명확한 것을 요구했는데, 그건 노래 실력이나 춤 실력이 아닌 ‘43kg’이라는 숫자였다. 163/43, ‘키-120’이 되어야 데뷔할 수 있다고 했다. 당시 40kg 후반대에서 50kg 초반대를 오가던, 내 섭식장애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일과가 새로 짜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까지 한 시간을 걷는다. 점심시간 내내 운동장을 빙빙 돈다. 학교를 마치면 노래 연습을 하고 기록 영상을 찍는다. 저녁에는 수영을 한다. 식사는 칼로리바 하나를 다섯 번에 쪼개 먹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수업 중 배가 너무 고프면 꼬르륵 소리가 요동친다. 이걸 숨기기 위해 2리터짜리 물병을 들고 다녔다. 자고 일어나자마자 몸무게를 재고 가슴, 허리,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팔뚝, 팔목의 둘레를 기록한다. 집에 있는 병에 물을 채워 종아리에 멍이 들 때까지 민다. 도저히 식욕을 참을 수 없을 땐, 아프리카 티비의 먹방 유튜브를 보며 칡즙을 마시는 것으로 허기를 달랬다. 목요일마다 변비약을 사 먹었다. 금요일엔 회사에서 몸 상태를 검토 받았다.
한 달에 한 번씩, 무언가 먹고 싶어서 미칠 거 같은 날이 찾아왔다. 모아둔 용돈을 털어 하프갤런 아이스크림, 피자 한 판, 라면, 치킨 한 마리를 사서 입에 쑤셔 넣었다. ‘먹고 토하면 된다. 먹고 토하면 된다. 먹고 토하면 된다.’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책상 앞에 붙여둔 ‘꼭 데뷔하자, 예인아!’라는 문구와 잡지에 나온 여자 연예인 사진을 오려 붙여 만든 워너비 리스트가 나를 비웃는 거 같아 필사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어떤 날엔 아무리 먹어도 구토가 나오질 않았다. 그럴 땐 짜장면 한 그릇을 더 시켜야 한다. 편의점에 달려가 과자를 쓸어와야 한다. 라면을 두세 개씩 끓여야 한다. 배가 찢어질 거 같은 고통을 참아가며 먹다 보면 속에서 음식물이 밀려 나온다. 비로소 모든 걸 게워낼 수 있다. 위액이 나올 때까지 손가락을 집어 넣어 구토를 했다. 혹시라도 영양분이 흡수되었을 지도 모르니, 다음 날에는 쓰린 속을 부여잡고 수영을 하러 나가 마감 시간에 돌아왔다.
노래를 하다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이명이 들려도, 배가 너무 아파 아무것도 없는 위 속을 몇 번이고 내시경으로 들여다 봐도, 춤을 출 때 ‘힘이 없다’며 호되게 혼나도, 나는 괴롭지 않다고 믿었다. 어른들 말에 따르면 ‘17살 후반에서 18살은 데뷔하기에 나이가 너무 많’은 나이며, ‘이번이 내게 남은 마지막 기회’이니까.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여자아이돌 몸매 사진과 그들에게 달린 악플을 보며 목표를 곱씹었다. 텅 빈 몸만이 나를 저 길로 이끌 수 있기에 매일 더 날카로워지는 턱선과 이목구비, 줄어드는 몸무게를 위안 삼았다. 몸무게 정체기가 찾아오면 입이 바싹 마를 때까지 침을 뱉었다. 1g이라도 더 줄이고 싶었다.
이런 각고의 노력을 멈추지 않았음에도, 나를 평가하는 어른들은 폭언을 멈추지 않았다. ‘최종에 올리려면 안면 윤곽을 해야 한다’, ‘상체는 너무 말랐는데 하체가 반전이다.’ 집에 혼자 있던 날, 샤워를 하다 쓰러졌다. 눈을 떠보니 두 시간이 흘러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분명 죽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제서야 그 짓거리를 멈출 수 있었다.
18살로부터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때때로 그 시절로 돌아간다. 매일 아침 몸무게를 재는 것 정도는 이제 당연하다. 매체에 얼굴을 드러내거나 셀프 포트레잇을 찍을 때면 며칠을 굶기도 한다. 1인분의 음식을 전부 먹는 일이 잘 없다. 한 번 망가진 위는 조금만 많이 먹어도 소화를 멈춰 탈이 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가장 많이 먹은 음료는 까스활명수와 포카리스웨트. 가장 많이 먹은 약은 아마도 소화제일 것이다. 폭식을 하던 시절 먹은 과자에 물려 더이상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생기면 곧바로 음식 섭취부터 어려워진다. 53kg를 살이 쪄도 되는 최대한의 기준으로 정해둔다. 상한선을 넘어가면 화가 나 견딜 수 없어진다. 허리에 조금이라도 살이 붙으면 스스로가 실패한 사람처럼 여겨진다. 한편으로는 점점 말라가는 다리를 보며, 입을 수 있는 옷들이 늘어난 에이블리 장바구니를 보며, 내 몸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들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한다.
탈코르셋 이후에도 여전히 ‘보여지는 몸’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스스로의 몸을 사랑해야 한다는 슬로건 아래 나도 수많은 노력을 해왔다.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그러하듯 ‘보여지는 몸’으로 살기를 멈추고자 했다. 첫 번째로 한 일은 파운데이션 프리(피부 화장을 하지 않는 거)였고, 두 번째는 눈썹 탈색이었다. 처음 눈썹을 탈색했을 때는, 모두가 깜짝 놀라 ‘예쁘다’ ‘못생겼다’ 등의 외모 평가를 하지 않았다. 그다음에는 머리를 밀었다. 집에서 가위를 들고 서걱서걱 머리를 자를 때, 어린 시절 허벅지와 종아리 살을 잘라내고 싶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끊어져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평가’와 ‘시선’은 존재했다. 사람들이 멋지다고 올리는 ‘탈코사진’ 속 여성들은 메이크업을 하지 않아도 매끈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파운데이션 프리를 끝냈다. 자궁근종으로 인하여 미레나 시술을 받았는데, 잡티 하나 없던 피부가 뒤집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눈썹 탈색은 반년쯤 뒤에 유행하며 ‘멋’과 ‘힙’의 기준이 되었다. 삭발을 해도 사람들은 내 동그란 두상과 힙스터스러움에 대해 칭찬했다.
동시에 인터넷 세상에서는 ‘이런 여성의 몸은 없다’며 여성성이 과도하게 부각된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비난하는 흐름이 있었다. 큰 골반과 가슴, 잘록한 허리. 그런데 내 몸은 그런 여성에 가까웠다. 몸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페미니즘 행사에 참여하면 페미니스트로서의 진정성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되었다. 쿨한 탈코르셋 페미니스트들은 오버핏이 잘 어울리는 마른 몸이었다. 나는 어딜 가도 ‘보여지는 몸’으로 살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몸과의 싸움을 말리는 다정한 나의 동료들
이 지긋지긋한 몸과의 싸움이 잠잠해진 것은, 시선의 잣대를 들이밀지 않는 동료들 덕분이었다. 밥을 많이 먹어도, 적게 먹어도, “뭐 어때“라고 받아들이는 동료들. 나의 마르고 싶은 욕구와 보여지고 싶은 욕구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동료들. 나를 평가하는 사람들 뒤통수를 후려버리고 싶다는 말에 ”한 번 해봐“라고 말해주는 동료들.
다 같이 술을 마시던 자리였다. 만취한 나는 먹고 싶은 욕구를 잔뜩 드러내며 새로운 음식을 계속해서 시켰다. 나는 ‘배가 부른 건지 잘 느끼지 못하겠다’고 ‘이 타코야끼 한 알을 더 먹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살이 찔까 봐 무섭다’고 얘기했다. 동료들은 말했다. 너는 적당히 잘 먹고 있으니 먹고 싶으면 먹으라고. 내일 배가 아플 거 같아서 걱정되면 그만 먹어도 된다고. 아무도 네가 하고 있는 걱정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고. 괜한 걱정일 뿐이라고.
그때부터 나는 그들 사이에 있을 때만큼은 ‘정상적’으로 보이기 위한 노력을 멈췄다. 먹고 싶은 날엔 마음껏 먹고, 한 입만 먹고 싶은 날엔 한 입만 먹었다. 맛 없는 표정으로 먹고 있을까봐 걱정하지 않았다. 튀김과 곱창, 매운 음식은 속이 망가져 잘 먹지 못한다고, 단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다. 입고 싶은 옷을 마음껏 입고, 화장을 하고 싶은 날에는 화장을 했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씻지 않고 나가기도 했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매끈한 옷을 입기도 했다.
그들은 그런 나의 상태에 대해 결코 먼저 말하지 않는다. 그저 내게 함께 수영하는 방법을 알려달라 제안할 뿐이다. 며칠째 밥을 못 먹는 나를 눈치채고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말간 조개탕을 끓여 먹인다. 동네의 맛집을 줄줄이 말하며 데려가 주겠다고 말한다. 식사를 마치면 귤을 하나 까서 먹으라고 건네준다. 돌아가는 길에는 싱싱한 야채를 볶아 만든 잡채를 싸주고, 배가 고플 때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으라며 다정히 굴 뿐이다.
우리는 한 번도 몸에 관해 입 닥쳐 본 적이 없으니까
최근 여자 아이돌 판에 4세대의 막이 열렸다. 다양한 컨셉과 퍼포먼스로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그들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다 보면 여러 평가를 마주하게 된다. 오래 무용을 해 탄탄한 몸이 매력적이라는 아이돌에게는 두 가지 평이 따른다. ‘근육이 멋지다. 쟤처럼 되고 싶다’, ‘저렇게 마른 몸에 있는 근육은 거식증이다’. 광고계의 유망주로 등장한 아이돌이 피자를 먹는 영상에는 이런 댓글이 달린다. ‘피자 광고인데 피자를 너무 조금 먹는다’, ‘저렇게 먹어야 저만큼 마른 거구나’. 풋풋함을 컨셉으로 하는 아이돌 그룹의 팬은 이렇게 말한다. ‘열폭하는 오징어들아, 우리 ㅇㅇ은 타고나길 ’뼈말라‘라서 님들이랑은 다름’.
매스미디어의 폭이 더욱 넓어진 이 시대에, 이런 평가는 아이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인플루언서로 활동하는 친구 A는 살 빠지는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스스로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했다. 내가 잠시 근무했던 소셜미디어 쇼호스팅 회사의 사장은, 회사에 올 때마다 직원들의 몸 상태를 체크하고 살을 빼란 잔소리를 해댄다. 그래야 매출이 오르고, 직원들 성과급으로 돌아간다. 그 회사의 주요 판매물품은 식품이다. 이 현상이, 어떤 특정한 직업군에만 국한된 일만도 아니다. 본인의 이미지가 빠르게 자본화되어가고 있는 시대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바디프로필을 올리고 ‘좋아요’와 댓글로 즉각적인 판단을 받는다. 옷 사이즈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들도 나도, 우리 모두는 이런 괴이한 현상을 멈추기 위해 무슨 행동을 해야할 지 명확한 답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이 시대의 섭식장애는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섭식장애를 앓고 있는/앓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개인의 몸에 대해서 말하기를, 평가하기를 멈춰야 한다. 걱정이든, 부러움이든, 분노든, 말을 얹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아마도 어떤 몸에 대해 말을 얹지 않는 것으로부터 어떤 흐름을 조금은 환기시킬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우리는 한 번도 몸에 관해 입 닥쳐 본 적이 없으니까.” 동료인 한유리의 말이다. 이제는 조용히 시선을 돌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고 있는지 바라볼 때다.
[필자 소개] 곽예인. 1995년 4월생. 아이돌 지망생, 리포터, 소규모 인플루언서, 인체모델을 거쳐 스스로를 찍는 사람이 되었다. 현재는 판매되기를 자처하는 욕망에 주목하고 있다. 이외에도 수원 성매매 집결지 기록 촬영 후 성노동자 인권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창작그룹 W/O F. 멤버이며 엄살원의 크루로 활동하고 있다.
이 기사 좋아요 241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많이 본 기사
일다의 방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