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들이 말하는 “납작하지 않은 섭식장애”[섭식장애와 여성의 몸] 국내 첫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를 준비하며-섭식장애를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바라보고, 젠더 관점을 담아 다각도로 접근하는 기획 ‘섭식장애와 여성의 몸’ 기사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작년 여름, 대학 캠퍼스 내 사무실을 둔 기술 스타트업에서 일할 때의 일이다. 점심시간에 구내식당 앞에서 식권을 끊어 줄을 섰다. 내 바로 앞에 거구의 청년 남성 둘이서 마치 세상에 그들만 존재하는 듯 큰 소리로 대화에 열중해 있었다. 두 사람은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었고, 땀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대화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 듯 했고, 에티켓도, 수치심도 없어 보였다.
수치심? 내가 만약 그들 앞에서 수치심이라는 단어를 언급한다면, 그게 대체 뭐냐고 그들은 내게 되물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나는, 그들 뒤에 떨어져 선 채 조그마한 수치심으로만 존재하는가? 왜 나는 수십 년째 내 자신과 낯가리는가? 왜 나는 지금껏 평생, 두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연사처럼, 내 몸을 어찌할 바 몰라서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굴려고 하는 걸까?
‘성녀’ 이미지와 자기 부정의 욕구
초등학교 6학년 무렵, 나는 어떤 깨달음을 얻은 양 확신에 차서 엄마에게 말했다. 나는 장애인과 결혼하거나 수녀가 될 것이라고. 그 즈음에 TV에서 성녀에 관한 옛날 영화를 봤던 것 같다. 나병환자의 몸에서 입으로 고름을 빨아 뱉어내는 장면을 보며, 나는 머리 위에 빛을 얻은 사람처럼 후련해졌다. 죄 사함을 받을 방법을 마침내 발견한 것처럼. 어머니는 정색을 하며 야단을 치셨다. 나는 나의 깨달음을 혼자 품고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내 기이한 매혹의 대상에는 나치즘이 포함되었다. 아버지의 책장을 뒤져 구석에서 낡다 못해 삭기 시작한, 우종서(右縱書)로 인쇄된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스스로를 고문하는 마음가짐으로 떠듬떠듬 읽어 나갔다. 그 무렵에는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TV에서 방영하는 마이너한 영화들을 볼 수 있었다. 내게 덴 자국 같은 인상을 남긴 영화가 있는데, 2차 세계대전 중인 유럽 배경인 <밀고자를 찾아서>라는 음울한 영화였다. 나중에 조사한 바로는, 원제가 Partir, Revenir인 1985년작 프랑스 영화인데, 1995년 6월에 KBS1 명화극장에서 방영했다.
유대인인 주인공 소녀의 가족은 안네 프랑크의 가족이 그랬듯 독일군을 피해 이웃 건물의 다락 같은 곳에 숨는다. 누군가 그들의 은닉처를 밀고하고, 주인공은 강제수용소에서 가족을 잃는다. 홀로 살아남은 그는 야윈 몸에 머리카락이 짧게 잘린 모습 그대로 고향으로 돌아와 밀고자들 앞에 선다. 그 유령 같은 모습. 밀고자들의 심장을 멎게 한 세상 그 누구도 두렵지 않은 죽음의 외양! 십대의 나는 그처럼 되고 싶었고, 마흔넷이 된 지금은 그 욕망의 기원을 찾고 있다.
섭식장애의 계보를 찾아서
거식증과 섭식장애에 대해, 많은 이들이 현대 사회에 들어와서 식습관의 불균형으로 생긴 새로운 현상이거나, 무리한 다이어트로 인한 결과라고 단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섭식장애의 계보는 중세 시대, 혹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며, 질병의 원인도 그리 간단하지 않다.
나의 섭식장애 문제를 해결하고자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검색했던 책들 중에는 서양사에서 거식증 여성들의 계보를 추적한 외서들이 있었다. 조안 제이콥스 브룸버그의 『Fasting Girls: The History of Anorexia Nervosa』(단식하는 소녀들), 월터 반데레이켄의 『From Fasting Saints to Anorexic Girls: The History of Self-Starvation』(금식하는 성녀에서 거식증 소녀까지: 자발적 기아의 역사) 등이다.
최근 캐롤 M. 코니한의 『음식과 몸의 인류학』(갈무리, 2005)이라는 책을 읽다가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했다. 여성의 극단적 단식이 성스러운 행위로 추앙을 받을 수 있었던 중세 시대에도, 식사를 거부하는 여자들의 이야기 속에는 어머니와 딸의 갈등과 같은 ‘관계의 역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캐롤 M. 코니한은 책에서 이렇게 분석한다.
“중세 혹은 빅토리아 시대 그리고 현재의 가족 내에서, 단식을 하는 여자들은 자율성에 대한 특별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대개 그들은 특히 사회적 역할의 제한에 의해 속박 받는다고 느끼는 지적이고, 투쟁적이고, 창조적이고, 혹은 상상력이 풍부한 여자들이다. 대부분의 거식증 환자는 성취형으로, 장애가 나타날 때까지는 외면상으로 볼 때, 학교나 스포츠, 그리고 생활 면에서 성공적이다. (중략) 여자에게 있어서의 음식의 구심성과 의미 때문에 그리고 다른 수단이 없기 때문에, 여자들은 음식거부를 정체성, 관계, 그리고 자율성의 추구를 위한 중심 매개체로서 사용하였다.”(212-213쪽)
작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화제작 <더 원더>(The Wonder)는 19세기 중반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한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인데, 작가 엠마 도너휴는 빅토리아 시대 사회적 현상 중 하나인 ‘단식 소녀’들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작품 역시 종교적인 세계관과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거식과 여성의 몸에 대한 억압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납작하지 않은 섭식장애”
몇 개월 전,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 섭식장애정신건강연구소 김율리 교수님을 만났다. 그분으로부터 외국에서 매년 진행되고 있는 '섭식장애 인식 주간’(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 행사를 한국에서도 추진해 보는 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고, 나는 곧장 기획서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섭식장애 당사자였던 사람으로서, 더욱이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을 기웃거렸던 입장에서, 나는 고통을 겪고 일상에서 튕겨져 나가게 된 사람들이 피상적인 층위에서 소비자-유저로 취급 당하는 통례에 진절머리가 났다. 거식증이 곧 '프로아나’(pro-ana)이고, 폭식증은 식욕을 통제할 수 있게 훈련시키고 식단을 짜고 스마트폰 알람으로 각성시키면 해결되는 것처럼 간주하는 사례도 있다. 어떤 ‘전문가’들은 섭식장애 환자들에 대해, 자기 마음과 행동에 대한 성찰이 전혀 누락된 사람들인 양 취급하기도 한다. ‘환자는 과연 어떤 삶에서 그렇게 행동했던 것일까?’라는 당사자 관점의 서사와 맥락이 빠져 있다고, 나는 여러 번 느꼈다.
아래는 국내에서 최초의 ‘섭식장애 인식 주간’ 행사를 기획하면서 내가 쓴 제안서의 내용이다.
제목: 사회 시스템 속의 섭식장애
[최근 뉴욕타임즈에는 '의료만으로는 당뇨병의 확산을 막을 수 없다’는 제목의 기사 가 실려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 지난 50년 간 당뇨병 연구와 치료 기술은 급격히 발전했지만, 미국 성인 중 제2형 당뇨병 유병률은 1970년대 20명 중 한 명 꼴에서 현재 7명 중 한 명 꼴로 늘었습니다. 기사는 “특히 마이너리티 그룹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만연한 빈곤, 공해, 스트레스, 식품 공급과 의료의 불균형 등의 폐해를 막아 낼 의료기기나 의약품은 더 이상 없다”는 UCSF 의대의 슐링거 교수의 말을 인용합니다. 그는 “우리 사회 자체가 제2형 당뇨병을 유발하도록 설계돼 있다”며 “우리는 바로 이를 뒤엎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섭식장애는 젊은 여성들의 유난스런 신경증, 사회적 관심의 우선 순위에서 겨우 끄트머리에 있을 만한 대수롭지 않은 질환, 다이어트 강박에 빠진 여성들이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회복될 허영의 중독, 혹은 ‘의지력만 발휘하면’ 당장에라도 깔끔히 포기할 수 있는 건강을 해치는 습관으로만 주로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더욱이 ‘건강’이나 ‘질병’이 개인의 특성 혹은 개인 내부에 자리잡은 현상으로 여겨지는 것 과는 또 다르게, 섭식장애는 일종의 ‘윤리적 실패’로 여겨지기도 쉬웠습니다. 어떤 불행의 원인이 당사자 자신에게 있다고 여겨질 때, 사람들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생각으로 그들의 불행을 외면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실에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 지금까지 일어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시스템적 관점으로 다시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섭식장애는 지난 20년 동안 놀라운 파급력으로 만연해졌고, 타격을 입는 연령은 훨씬 낮아지고 남성 환자도 크게 늘었습니다. 병원을 찾는 어린 환자는 이미 병증이 심각해져 찾아오는 경우가 다반사가 됐다고 합니다. 지금-여기라는 이 복잡계는 어떤 이유로 섭식장애의 온상처럼 되어 버렸을까요?]
이 기획서를 작성한 다음, ‘사회 시스템 속의 섭식장애’라는 말 대신 ‘납작하지 않은 섭식장애’라고 써 넣었다. 섭식장애는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역설적인 현상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는 제대로 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들을 적극적으로 초대하고 불러 내 우리 이야기를 발화하려고 하는 이유다.
섭식장애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시스템의 문제로, 복잡하고 역설적인 현상으로 접근하고 이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 섭식장애 인식주간 첫 행사가 그 가능성을 열어 줄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 첫 회 섭식장애 인식주간 “납작하지 않은 섭식장애” -날짜: 2023년 2월 24일~3월 2일까지 일주일 내내 -장소: 서울 곳곳의 독립서점과 치료센터 -주최: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인제대학교 섭식장애정신건강연구소 -링크: https://instagram.com/rabbitsubmarinecol
[필자 소개] 박지니. 1980년생. 생업을 하며 틈틈이 읽고 쓰고 번역한다. 거식증 회고록 『삼키기 연습』을 출간했다. 뜻하지 않게 ‘잠수함토끼콜렉티브’라는 소모임을 결성하고, 국내 첫 회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기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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