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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구 장승배기역에서 2분 거리에 있는 한 건물엔 ‘색다른의원’이라는 간판이 달려있다. 무슨 병원인지 아리송하다. 입구에 들어서면 ‘색다른의원 SDR 클리닉 Supporting Diversity and Reproductive Health Clinic’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다양성과 재생산 권리를 지지하는 건강 클리닉이라니, 좀처럼 보기 힘든 병원임은 분명하다.
임신중지, 트랜지션 호르몬치료가 가능한 병원
색다른의원 안은 깔끔하다. 그리고 색다르다. 요즘 병원들에서 으레 홍보하는 시술이나 주사 등 홍보물을 볼 수 없다. 대신 성과 재생산 관련 이야기가 담긴 책들, 셰어에서 제작·배포한 「상담자와 의료인을 위한 임신중지 가이드북 〈곁에, 함께〉」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성중립 화장실과 장애인 화장실이 있다.
-유동인구가 많은 합정이나 신촌 등이 아닌 장승배기역에 자리를 잡게 된 이유가 있나요?
지역에서 주민들이 편히 올 수 있는, 교통이 편한 곳을 찾았어요. 서울역 근처에 할까 생각도 했는데, 주변에 병원을 낼 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라고요. 그래서 영등포나 신도림 쪽도 보게 되고, 경복궁 쪽도 찾아봤거든요. 근데 너무 비싸더라고요. 현실적으로 월세를 감당할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까 여기로 오게 된거죠. 공간 크기도 적당했고요
-은평구에 위치한 살림의료복지 사회적협동조합에서 4년간 근무를 하셨으니 그 지역과 친근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어요.
살림에 있을 때, 먼 곳에서 오는 환자들이 있었어요. 트랜지션 호르몬치료 받는 분들 중엔, 지역에 갈만한 병원이 없어서 서울까지, 또 거기서 은평까지 오는 분들이 있었거든요. 임신중지도 마찬가지에요. 살림에선 약물로 하는 임신중지밖에 안 했었는데도 거기까지 찾아오는 분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병원을 하게 되면 위치를 잘 고민해야겠다’ 했죠.
(※트랜지션 호르몬치료: 자신에게 편안한 몸의 상태를 찾기 위해, 남성화 호르몬치료의 경우 테스토스테론을 투여하여 남성적 특징을 유도하고, 여성화 호르몬치료의 경우 에스트로겐과 남성호르몬 억제제를 투여하여 여성적 특징을 유도하는 치료. 호르몬치료를 지속하게 되면 외양과 신체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감정적, 심리적 변화도 나타남으로 전반적인 삶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호르몬치료를 시작하기 전엔 의료진과 충분히 상담할 것을 권장한다. -색다른의원의 호르몬치료 설명서 중)
-살림과 ‘나는봄’에서 근무하다 개인병원을 열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개원이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내가 하고 싶은 진료들을 좀더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게 생각만큼 잘 안 되더라고요. 살림에서 트랜지션 관련한 임상 경험을 쌓을 수 있어 좋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좀 한계가 느껴졌거든요. 살림은 산부인과만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산부인과 진료를 위한) 체계를 잡기가 조금 힘들더라고요. 가정의학과 중심이기도 하고, 여러 사업을 하는 곳이기도 했고요. 임신중지도 약물밖에 못하는 상황이었고. 협동조합 병원이다 보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한군데 얽매이지 않고 살림이랑 나는봄 두 군데서 일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는데, 각각 또 한계가 있어서, ‘결국 내가 차려야 겠구나’ 싶었어요. (개인병원을 열면) 셰어랑 같이 할 수 있는 일도 더 찾을 수 있을 것 같았고요. 결국 이렇게 됐네요(웃음)
-색다른의원은 산부인과가 아닌 성·재생산 건강 전문 의원이라고 설명하는데요. 사람들에겐 좀 생소할 것 같아요.
산부인과라는 이름은 쓸 생각이 없었어요. 여성의학과와 같은 특정 성별을 지칭하는 용어를 쓰고 싶지도 않았고요. ‘셰어’의 이름처럼 성과 재생산 건강 관리라는 말을 앞으로 계속 알릴 필요가 있고요. 성적 권리와 재생산 권리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고, 건강과 관련된 권리로서 누릴 수 있어야 하죠. 예를 들어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필요한 의료적 조치 여부를 결정하고, 누구와 섹스를 할지, 피임이나 임신 여부를 결정할지와 같은 것들인데, 그것과 관련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충분히 담길 수 있는 용어가 바로 성·재생산 건강 전문 의원이었습니다.
다양성을 포용하는 공간으로
색다른의원은 누군가에겐 절실한 공간이다. ‘산부인과’라는 이름의 문턱을 넘기 어려웠던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뿐만 아니라 ‘산부인과’라는 이름만으로도 경계심, 불안감, 불편함을 느끼는 많은 여성들에게 필요한 병원이다.
-색다른의원은 타깃층이 일반 산부인과랑은 조금 다를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어떤 진료나 시술을 받지 못해 전전하던 사람들, 산부인과를 쉽게 가지 못하는 사람들, 성·재생산 건강과 관련해서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편히 올 수 있는 병원을 만들고 싶었으니까요. 그래서 색다른의원에서는 다양한 성별 정체성, 장애, 연령, 국적 등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타깃층이 될 수 있습니다.
-경영적인 부분은 괜찮나요? 색다른의원이 오래 가야 하는데 말이죠!
셰어를 통해서만 홍보를 하고 있어서 좀 어렵긴 했어요. 그래도 이제 4개월 정도 되니까, 조금씩 형태를 잡아가는 것 같아요. 지금은 일단 호르몬 치료하는 분이 제일 많고, 주변이나 지역에서 오는 분들도 조금씩 생기고 있고, 검색해서 찾아 오는 분도 있고, 임신중지 같은 경우엔 멀리서 오시는 분도 있고요. 환자가 얼마나 오느냐 보다 무엇 때문에 오느냐를 봤을 때, 제가 원했던 방향대로 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영적으론 아직 잘 모르겠어요(웃음) 이제 대충 유지비 정도는 되는 것 같고, 그래도 망하진 않겠다 싶은 수준이에요. 근데 대출금도 갚고 해야 하잖아요?(웃음) 시작할 때부터 주5일제(매주 수요일, 일요일 휴무)로 하고, 야간 진료를 안 하는 것도 주변에서 우려가 좀 있었어요. 처음엔 그래도 좀 빡세게 해야 한다고. 근데 초반부터 막 그렇게 달리면 사실 너무 힘들잖아요? 오래 가려면 잘 쉬면서 해야하니까요.
-간호사 두 분과 함께 근무하고 있는데요. 원장님이 그리는 병원을 위해, 함께 할 동료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두 분이랑 함께 일한 적이 있어요. 문보라 간호사와는 ‘나는봄’에서, 이혜림 간호사와는 ‘살림’에서요. 두 분이 그만두고 나서도 개인적으로 계속 연락을 주고 받는 사이였어요. 그런 연락을 주고 받을 때부터 개인병원 개원하는 거에 대한 고민도 얘기했었고요. 그러다 자연스럽게 같이 해보자는 얘기를 건넸고, 두 분 다 안 하겠다는 얘길 안하더라고요(웃음)
-색다른의원은 소수자들을 위한 곳이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곳이라, 그런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을 것 같아요.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하진 않았어요. 두 분이 일했던 의료 환경이 달랐잖아요. 살림은 외래 진료 기반이어서 산부인과가 주 진료가 아니었고, 나는봄에선 트랜지션 호르몬 치료는 안 했었고, 또 여성 청소년 위주였고…. 그래서 같이 공부를 하는 시간을 가졌죠.
왜 두 명의 간호사가 필요한가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색다른의원은 진료실에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진료를 하는 게 가장 중요한데, 아무래도 지금의 한국 의료 체계에선 현실적으로 어렵긴 하거든요. 환자를 한 시간씩 본다? 경영이 안 되죠. 그러니까 간호사가 환자와 상담하고, 교육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했어요. 그런 걸 할 수 있는 능력이 (두 분한테) 있다는 걸 아니까, 그걸 좀 같이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죠. 이런 것부터 같이 공부하고, 병원 보러 다니고, 인테리어 하는 것까지. 시간이 되는 한 같이 했어요. 병원 이름을 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였고요. 사실 이 병원은 셋이서 연 거라고 봐야죠.
앞으로도 필요한 공부를 같이 해나갈 생각이에요. 사실 상담이라는 것도 레퍼런스 없이 하면 쓰는 용어도 다르고, 설명하는 방식도 아예 달라질 수 있거든요. 그런 부분을 함께 맞춰야 하니까요. 간호사 업무를 도와줄 간호조무사도 고용할 생각이고요. 원하던 병원을 만들기 위한 체계를 여전히 다지는 중이라 생각해요. 천천히 시작하는 거죠.
-상담이라는 건, 어떤 걸 이야기하는지 예를 들어주실 수 있나요.
가령 피임에 대한 걸 환자한테 이야기할 때, 제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설명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잖아요? 그런 부분을 간호사가 하는 거죠. 의사가 필요한 진료와 처방을 하고, 간호사가 상담과 안내를 하는 식으로요. 의사 입장에선 내가 설명하고 안내하다 진료 시간을 다 써 버리면 정작 환자 이야기는 제대로 못 듣는 경우가 생기거든요. 그래서 간호사가 사전 상담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거죠.
차별없는 병원으로, 함께
개원한 지 이제 5개월차, 병원을 운영하는 관리자가 된다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임을 깨우치고 있다는 최예훈 원장.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오랜 고민 끝에, 하고 싶은 일들을 이뤄보겠다는 목표를 안고 색다른의원을 시작한 만큼 천천히 가더라도 오래 갈 수 있도록 함께 할 동료도 더 많이 찾고 싶다.
-아직 사람들에게 접근성이 높지 않은 진료들을 하고 있으신데요. 이런 것들을 좀 더 확장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 같아요. 트랜지션 호르몬 치료 같은 경우 수도권 내엔 병원들이 몇 군데 있는 걸로 알아요. 치료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맞춰보는 등의 협업도 논의하시나요?
‘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라고 십여 명이 활동하는 모임이 있어요. 트랜스젠더 관련 진료를 하는 산부인과, 성형외과, 정신과 같은 임상 의사들뿐 아니라 교육학 쪽 교수들과 연결이 되어, 서로의 필요가 모여서 활동하게 되었는데요. 작년에 책 〈차별 없는 병원 - 진료실을 바꿀 성소수자 의료 가이드〉(한국성소수자의료연구회 기획, 휴머니스트)도 냈죠. 올해는 세계 트랜스젠더 보건의료전문가협회(WPATH)에서 발간하는 ‘트랜스섹슈얼·트랜스젠더·성별비순응자를 위한 건강관리실무표준(SoC)’의 최신 버전을 번역해 보려고 하고 있어요.
-셰어와 함께 할 수 있는 활동도 분명 기획 중일 것 같은데요. 셰어도 소속되어 있는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모임넷)에서 지금 “2023년을 유산유도제 도입의 해로” 캠페인을 하고 있죠. 임신중지 비범죄화 3년차를 맞이하는 시기, 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셰어’의 올해 계획에 색다른의원과의 연계사업이 있어요. 색다른의원에서 하고자 하는 진료를 셰어의 활동과 같이 녹여보고자 하는 거죠.
임신중지 관련해서는 정책적 변화를 위한 활동도 물론 필요하고요, 색다른의원에서 가능한 일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임신중지 의료서비스를 위해 색다른의원을 다녀가시는 분들에게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목표에요. 아직은 임신중지가 실질적으로 비범죄화되려면 제도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각자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낙태죄’는 사라졌다는 거니까요. 환자에게 불법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고,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좋습니다. 임신 상담부터 이후 피임까지 진짜 의료서비스다운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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