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약성’을 키워드로 남성성을 분석하다

비평가 스기타 슌스케 인터뷰① 내면의 우생사상과 자각 못한 취약함

조경희 | 기사입력 2023/02/28 [11:27]

‘취약성’을 키워드로 남성성을 분석하다

비평가 스기타 슌스케 인터뷰① 내면의 우생사상과 자각 못한 취약함

조경희 | 입력 : 2023/02/28 [11:27]

일본에서 최근 몇 년 동안에 ‘약자남성’이라는 단어를 쓰며 남성성을 분석하고 관련 저서를 잇달아 출간한 비평가 스기타 슌스케 씨. “스스로가 어둠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감각이 있어서 남성학”을 한다는 그는 현재 잡지 『대항언론』 편집인으로 활동, 남성학과 관련해 집필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남성성과 식민주의 경험이 어떻게 관계하고 어떤 차이를 낳고 있는지 공동연구라도 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는 최근 학술대회에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다. 그간의 스기타 씨의 저작과 활동을 주목해온 조경희 성공회대 교수가 인터뷰했고, 대화의 내용과 범위가 방대해 총 4회에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 일본에서 잡지 『대항언론: 반 헤이트를 위한 교차로』를 만들고 있는 스기타 슌스케 씨. 인터뷰 후 서울 한 식당에서. (촬영: 조경희)

 

비평가 스기타 슌스케(杉田俊介)는 일본에서 어떤 존재인가. 그의 대표작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그의 특징이 잘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무능력 비평: 노동과 생존의 에티카』(2008), 『미야자키 하야오론: 신들과 아이들의 이야기』(2014), 『나가부치 쯔요시론』(2014), 『전쟁과 허구』(2017), 『도라에몽론: 래디컬한 약함의 사상』(2020), 『재패니메이션의 성숙과 상실』(2021), 『주류 남성에게 정직함이란 무엇인가: 미투에 참여하지 못하는 남자들』(2021), 『하시카와 분조와 그 낭만』(2022), 『남자가 힘들다! 자본주의 사회의 약자남성론』(2022)…

 

노동운동, 정치사상, 장애, 페미니즘, 대중음악, 애니메이션 등 그의 집필 영역은 얼핏 봐서도 매우 광범위하다. 이 주제들을 관통하는 시각은 일본 사회의 능력주의와 자기책임론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식이다. 최근 몇 년은 동료들과 함께 잡지 『대항언론: 반 헤이트를 위한 교차로』 간행에 분주했다. 복합차별의 현실 속에서 이를 방관하는 ‘대부분의 다수자들’이 내재적으로 변하기 위한 지침서와 같은 잡지다.

 

나 또한 필자로 참여하게 되면서 그와 인연을 맺었다. 그의 비평의 원동력과 주제들의 내적 연관성, 그리고 개인사가 궁금했다. 마침 학회 발표차 한국을 처음 방문한 스기타 슌스케와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고 그 후 온라인으로도 대화를 이어갔다. 같은 1970년대생이라는 것 외는 별로 공통점이 없지만, 그와의 대화는 매우 즐겁고 유익하고 편안했다.

 

프리터 × 장애인 문제의 교차로에서

청년 비정규노동 당사자 운동에서 출발, 장애인 운동과 페미니즘

 

스기타를 처음 알게 된 건 그의 데뷔작 『프리터에게 자유란 무엇인가』(2005)를 통해서였다. ‘프리터’란 ‘프리 아르바이터’라는 신조어를 줄인 말로, 정규직이 아닌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리는 청년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1990년대 이후 일본에서 ‘꿈을 포기하지 않는 청년들’이라는 낭만화된 담론과 함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급증했다.

 

자발적 선택으로 보이던 이 취업 형태가 청년들을 간편하게 쓸 수 있는 노동력으로 재편하는 신자유주의적 기획의 산물이었다는 문제의식이 나온 것은 장기적인 경기침체기에 들어선 후였다. 당시 청년 세대의 대항적이고 대안적인 담론형성 과정에서 스기타의 글은 단연 돋보였다. 차가운 현실분석이 아닌, 프리터 당사자에 의한 당사자들을 향한 실존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언어였다.

 

조경희: 2007년에 ‘일본학연습’이라는 수업에서 일본 책을 읽는 수업을 처음 진행했는데, 그때 읽은 것이 스기타 씨 책 『프리터에게 자유란 무엇인가』였어요. 현장감 느껴지는 내용이 마음에 들어서 골랐는데, 한국의 대학생들과 일본의 프리터 문제를 일본어로 읽기는 쉽지 않았어요. 애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스기타: 아, 그 책은 부서진 말로 선동적으로 써서 더 어려웠을 수도요. 2000년대 중후반은 소위 로스트 제너레이션(잃어버린 세대) 논단이라 불린, 사회적 격차나 빈곤 문제에 대해 당사자가 일어나서 사회적 책임을 주장하기 시작한 시기였어요. 그 전까지 정규고용을 선택하지 않았던 이들은 가난과 불행이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러한 자기책임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운동이었어요. ‘프리터즈 프리’라는 협동조합 비슷한 것을 만들고 잡지를 내거나 시위를 했어요.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었지만, 어쨌든 2005년에 책을 내기 전까지 여러 활동가들과 함께 모색하는 과정이 있었어요.

 

조경희: 2008년 즈음, 작가 아마미야 카린(雨宮処凛) 씨가 한국의 청년빈곤 문제를 취재하러 온 적이 있어요. 그때 한국에서 ‘백수연대’라는 그룹과 간담회를 했고 저는 통역으로 참석했는데, 일본 측 내용이 심각한 것에 비해 한국은 좀 더 뭐랄까, 유머러스했다고 할까요. 단체의 캐릭터 때문이었을 수도 있는데, “월드컵을 보고 싶어서 직장을 그만뒀다”, “돈이 없어도 선배가 밥 사준다”는 이야기가 오고 가서 일본의 분위기와 상당한 갭이 있었죠. 실제로 인적 안전망이라는 면에서 보면, 일본청년들의 현실은 훨씬 불안하고 비장했어요.

 

스기타: 네, 사회적인 상호부조가 매우 약하죠. 그 점이 일본사회의 잔혹함이에요.

 

▲ 스기타 슌스케의 데뷔작 『프리터에게 자유란 무엇인가』(2005)와 그가 주도해 만든 잡지 『프리터즈 프리』(2007) (촬영: 조경희)

 

스기타: 당시 내 안에는 세 개의 축이 있었는데, 하나는 노동, 사회적 격차 문제이고, 또 하나가 장애인 돌봄이었어요. 20대 후반부터 30대 후반까지 장애인 지원단체에서 일했습니다. 일본에서는 1970년대부터 장애인해방운동이 꽤 급진적으로 전개되었어요. ‘푸른 잔디 모임(青い芝の会)’이라는 뇌성마비 장애인 중심의 활동단체가 있는데, 저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들은 내 안의 우생사상, 그들은 ‘건전자(健全者) 문명’이라고 불렀는데, 이 세상이 비장애인 중심으로 만들어지고 있음을 꽤 급진적으로 호소했어요. 문화나 국가 차원이 아니라 문명 차원에서 장애인을 배제함으로써 성립되었다고. 그것을 비판하는 장애인들 또한 노멀한 아름다움의 기준을 거울로 삼고 자신의 몸을 추악한 것으로 바라본다든가, 또 누구를 좋아한다고 할 때도 장애인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이쁘다고 하는 젊은 여성들에게 성적 욕구를 가진다든가, 그거야말로 ‘내 안의 우생사상’이라고 질문을 던진 것이죠.

 

로스제네(로스트 제너레이션) 운동을 했을 때도, 장애인 운동의 축적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월급이 적고 생활이 어려운 것을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자살한 사람들도 있었고요. 신자유주의적인 것을 내면화하고 자신을 탓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내 안의 자기책임론에서 어떻게 스스로 벗어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죠.

 

능력주의와 에이블리즘 비판, 젠더 관점은?

 

세 번째로 1970년대 우먼리브(여성해방운동)의 저작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우먼리브의 대표격으로 다나카 미쓰(田中美津: 『생명의 여자들에게: 엉망인 여성해방론』 저자)가 있죠. 그는 여성스러움의 규범을 비판하면서도 좋아하는 남자가 눈앞에 오면 갑자기 무릎을 가지런히 모아서 앉게 된다든가… 그런 젠더의 속박과 자기모순을 올바른 말로 지우지 않고 끊임없이 대면하고 질문했어요.

 

프리터 문제도 그렇다면 자신들에게 자유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모순의 내부에서 집요하게 고민했을 때, 그 너머에 정의와 같은 보편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점은 지금도 의심하지 않아요.

 

조경희: 자기모순을 올바른 말로 덮어서 지우지 말고 그 모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1970~1980년대 급진적인 장애인 운동은 우먼리브, 페미니즘 운동과도 치열하게 논쟁하고 대립하죠. 여성들의 자기결정권을 둘러싸고요.

 

스기타: 네, 여성들의 임신중단의 권리가 장애인 말살 사상과 연결된다는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논쟁이 있었죠. 그렇다면 여성들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라는 논점은 현재까지도 중요하게 이어진다고 봅니다. 지금의 말로는 능력주의(meritocracy)나 에이블리즘(ableism, 비장애인 중심주의)으로 불리는 문제를 당시부터 비판했어요.

 

그런데 한편에서는 그 담론 자체가 장애인 남성들에게 편중되어 있어서, 뇌성마비 여성들의 존재가 배제되어 있었어요. 그 후 CP여성모임이 결성됩니다. CP는 뇌성마비를 뜻해요. 잘난 척하는 ‘푸른 잔디 모임’도 결국은 남성중심이고, 젊은 비장애 여성들에게 돌봄을 맡기고 여성들의 문제를 고민하지 못하고 있다는, 그야말로 ‘교차성’이라는 말이 없었던 시절에 그런 질문들이 제기되었어요. 이런 문제로 끊임없이 질문하고 갈등하고 어떤 해답을 찾으려고 했던 사람들의 경험이 일본에서 지금까지도 중요한 참조점이 되고 있죠. 그 실천이 제대로 계승되었다거나, 해답을 찾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요.

 

▲ 반 헤이트(혐오 반대)를 내걸고 2019년에 창간한 잡지 『대항언론』 (촬영: 조경희)

 

‘여친이 없다’는 게 가장 힘들어…대면하지 못했던 취약함

 

스기타: 그런데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냐면요. 지금 보면 첫 번째 프리터 책에서 장애 이야기는 나오죠. 나름대로 교차성 관점에서 접근했던 것 같은데, 젠더 문제가 거의 나오지 않아요. 그건 함께 운동한 여성 활동가에게도 비판받았던 점이기도 해요.

 

제가 젠더 문제에 관심이 없었냐고 하면 꼭 그렇지도 않아요. 나름 공부도 했고 의식도 있었어요. 일본에서는 히모테(非モテ: 주로 인기 없는 남자를 지칭하는 온라인에서의 속어)라는 말이 빠른 시기부터 유통되었는데, 내 안에도 그런 문제의식이 계속 있었어요. 일용직 프리터로 일했던 20대 후반은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는데, 애인이 없다는 사실이… 저는 완전한 시스 헤테로 매저리티(majority) 남성인데요. 그… 솔직히 여자친구가 없었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돈이 없거나 일이 없다는 사실, 혹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더 힘들어할 법한데 그거보단 연애를 못한다는 것,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괴로웠어요.

 

그런데 그 고민이 첫 번째 책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아요. 거꾸로 말하면 그만큼 억압이 깊었다고 볼 수 있어요. 왜 그 부분을 안 보려고 했는지, 괴로움이 그 후에도 계속 남았어요. 여성들이나 퀴어들의 질문을 내 문제로 바라보게 된 건 꽤 시간이 지난 후였는데, 이 점은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고 뼈아픈 부분이었어요.

 

조경희: 그건 일부러 피했다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자각하거나 언어화하지 못했다는

 

스기타: 네, 자각하지 못했어요.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자신의 욕망이나 고통을 억압했다는 것. 안 보려고 했다는 것이 약간의 회한으로 남았어요. 그래서 이 내용에 관한 이야기를 2016년에 『히모테의 품격』이라는 책에서 풀어냈어요. 저는 책 부제인 ‘남자들에게 약함이란 무엇인가’를 제목으로 달고 싶었는데, 그런 제목이면 안 팔린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저만이 아니라 남자들이 젠더나 성 문제와 대면하는 데 꽤 시간이 걸리죠. 남자들이 이 문제에 대면하기 어려워하는 것과, 여자들에게 공격적으로 대하는 태도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어서 이 점을 제대로 풀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왜 여성혐오나 백래시로 나아가게 되는지, 솔직히 남의 일이 아니라 나도 자칫 잘못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 스스로가 궁지에 몰리면 여성혐오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고 느끼는 거죠. 내 성격상.

 

그래서 나 스스로가 어둠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감각이 있어서 남성학, 저는 맨즈리브(mens liberation)라는 말을 선호하는데, 최근 몇 년은 그쪽 방향에서 집필하고 있어요.

 

오타쿠-히키코모리 정체성과 서브컬처 비평

 

조경희: 도입부부터 본질적인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런데 그동안 쓴 책을 보니 서브컬쳐나 대중문화에 관한 비평을 가장 많이 했어요. 대중음악, 코미디, 애니메이션 등 10권 이상 다양하게요.

 

스기타: 네. 왜 그랬을까. 초기에는 노동문제에 관한 글을 쓰고 장애인 돌봄 일을 했으니, 글쓰기와 현장에서의 실천이 양륜을 이루면서 나름 잘 돌아갔다고 할까요. 그런데 점점 프리터 운동에서도 내부분열이 일어났고, 그리고 돌봄 일도 고된 노동이니 좀 번아웃된 감이 있었어요. 양륜이 동시에 삐끗하면서 글을 못쓰게 되었어요. 두 번째 책 『무능력 비평』을 낸 후 6년간 공백이 있는데, 그때는 더이상 집필이 불가능하다고까지 생각했죠. 점점 신경이 쇠약해져서…

 

그런데 우연히 서브컬처에 대해 써봤더니 생각보다 할 수 있었어요. 사회비평은 못하겠는데, 원래 좋아하는 서브컬쳐에 대한 비평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던 거죠. 원래 저는 히키코모리적 오타쿠 기질이 강해요. 어쨌든 그것이 순풍이 되었고, 그 후 글을 쓰는데 자신감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당시 일본에서 서브컬처 비평가들도 많이 나왔는데, 역시 내가 쓰면 대체로 정치, 사회, 노동문제가 조금씩 혼입이 돼요. 그런데 일본의 오타쿠 비평은 별로 그런 걸 선호하지 않아… 아니, 매우 싫어해요. 작품 속에 사회문제 따위 읽는 건 오타쿠적 입장에서 용납하기 어렵다는…(웃음) 그런 건 문화좌익들이 하는 것이라고 미움을 받기도 했어요. (2편에서 계속)

 

[필자 소개] 조경희. 일본 출생. 성공회대학 동아시아연구소 부교수.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를 중심으로 식민주의, 이주, 소수자, 젠더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친다. 주요 공저에 『아시아의 접촉지대: 교차하는 경계와 장소』(2013), 『주권의 야만: 밀항, 수용소, 재일조선인』(2017), 『〈나〉를 증명하기: 동아시아의 국적, 여권, 등록』(2017), 『두 번째 ‘전후’: 1960-70년대 아시아와 마주친 일본』(2017), 『포스트냉전과 팬데믹: 오키나와의 코로나 경험과 정동』(20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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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4/26 [21:12] 수정 | 삭제
  • 스기타님의 책 읽고 싶어요...
  • 2023/03/03 [18:06] 수정 | 삭제
  • 이런 내용을 읽고 싶었습니다.
  • sj 2023/02/28 [23:32] 수정 | 삭제
  • 너무나 솔직하고 성찰적인 언어가 마음을 깊이 울리네요. 한국어로 잡지를 보고 싶어요..
  • 둘리 2023/02/28 [21:00] 수정 | 삭제
  • 요즘 같은 시기에 너무 필요한 내용이다!
  • 투투 2023/02/28 [18:38] 수정 | 삭제
  • 보기 어려운 훌륭한 분석이네요.
  • ㄱㄴㄷ 2023/02/28 [17:46] 수정 | 삭제
  •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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