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벳 교수’ 사건…권력형 성폭력은 왜 계속되나

대학 내 성폭력 담론을 다시 묻다④ 좋은 해결이란?

권소원 | 기사입력 2023/03/05 [17:10]

‘알파벳 교수’ 사건…권력형 성폭력은 왜 계속되나

대학 내 성폭력 담론을 다시 묻다④ 좋은 해결이란?

권소원 | 입력 : 2023/03/05 [17:10]

‘권력형 성폭력‧인권침해 문제 해결을 위한 서울대인 공동행동’. 권서공은 서울대학교 내에서 반복되어온 권력형 성폭력, 인권침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결성된 학내 독립 기구다. 권서공은 개별 성폭력/인권침해 사건에 대응하는 활동과, 그러한 사건의 반복을 야기해온 학교의 구조적인 문제들에 대응하는 활동, 두 가지를 모두 진행하고 있다.

 

닮아있는 ‘알파벳 교수’들의 이야기

 

‘알파벳 교수’라고 부른다. A교수, B교수, C교수... 서울대뿐 아니라 다른 학교에서 수많은 ‘A교수’들이 존재했다. 서울대 경우 코로나19 등이 겹치며 몇 년 동안이나 사건 해결이 지연되었고, 사건이 공론화되었던 시기 캠퍼스에 있었던 19학번이나 20학번들에게 이제 알파벳 교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 ‘아 그 교수? 아직 안 잘렸어? 아직 해결 안 됐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 서울대 인문대학 서어서문학과 A교수에 대한 1심 무죄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 (출처: 권력형 성폭력·인권침해 문제 해결을 위한 서울대인공동행동)

 

유감스럽게도, 잘렸을지언정 해결이 되지는 않았다. 해임이 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다른 학교의 교단에 설 수 있으며, 파면이 되었다 하더라도 사법적인 해결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의 알파벳 교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개별 사건들의 대응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그러한 가해를 가능케 했던 위계 관계를 방조하는 학교의 구조가 여전하고, 사건 해결의 과정을 마주하는 대학 본부와 구성원들의 태도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각 알파벳 교수 사건들은 놀라울 만큼 닮아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교수들에게 그 가해를 가능케 했던 위계를 쥐어준 구조가 닮아있고, 학교 측의 미진한 대응이 닮아있으며, 그 사건을 마주하는 공동체적 인식이 그토록 닮아있다.

 

서어서문학과 전 A교수의 경우, 2019년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되었다. 아직 학생자치라는 것이 지금처럼 낯설지는 않을 때였기에 전체학생총회가 열렸고, 인문대 학생들은 A교수의 연구실을 학생자치공간으로 전환하겠다고 선포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에도 불구하고, 대학 사회에서는 성폭력 사건의 해결을 바라는 문화가, 그러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문화가 어색하지 않던 시기였다.

 

이때 학교 인권센터가 정직 3개월을 권고하여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결국 A교수는 해임됐다. 그러나 피해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된,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에서는 무죄가 선고되었고, 항소심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접촉 사실도, 피해자의 불쾌감도 인정되지만 ‘추행’은 아니라고 한다. A교수 사건은 공론화된 지 3년이나 지났지만, 완결되지 못했다.

 

1심 선고 이후, 학내에서는 이 사건의 맥락을 지운 채, 전공인 ‘스페인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스킨십이 자유롭지 않냐’는 망발이 오가는가 하면, 자극적인 소재들이 오고 갔던 법정의 맥락을 지운 채 ‘A교수가 불쌍하다, 억울했겠다’고 동정하는 소리가 나온다. 무죄가 나왔는데 왜 아직도 난리냐고도 한다. 이것이 이 공동체가 마주한 백래시다.

 

음대 B교수 사건, 누구의 시점으로 보는가

 

한편, 2020년 6월 성희롱이 공론화된 음악대학 B교수의 경우, 직위를 정지당한 상태에서도 국제 학회의 이사진으로 참여하는 등 활발히 학계에서 활동했다. 가해를 가능케 했던 위계는 학교의 대응이 코로나19를 핑계로 지연되는 동안 계속해서, 학외에서마저 피해자의 학술 활동을 방해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피해다녀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사건 공론화 초기 미진한 대응으로 일관하던 학교는 1년 9개월만에 해임을 결정했다. 여기서 잠시 해임과 파면의 차이를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파면이 되면 국공립대학교에서는 교수가 될 수 없다. 해임이 되면, 서울대학교에서만 해임이 되는 것이니 언제든 다른 대학에서 교수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학생사회는 파면을 외쳐왔다. 학내의 문제는 학계 전반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해교수가 학내에서 쫓겨난다 하더라도 학계에서 그가 지니는 권력은 유지될 수 있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서는 파면이 필요하다. 그 필요성을 보여줬던 것이 이 사건이다.

 

▲ 서울대 음악대학 B교수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처분을 규탄하는 기자회견 (출처: 권력형 성폭력·인권침해 문제 해결을 위한 서울대인공동행동)

 

또한, B교수 사건은 검찰이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내가 OO이를 학생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냐’, ‘다신 안 보게 해줄까’ 등의 내용이 담긴 녹취가 존재했으나, 성적인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협박이 아니라고,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하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그러면서 가해교수의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대학원생들의 증언을 증거로 채택했다. 학술활동을 이어나가고 싶다는 피해자의 발언을, 가해의 심각성을 희석하는 근거로 사용했다.

 

검찰의 불기소 처분은 사법부가 교수-학생 간의 관계에 대해 지니는 몰이해를 보여주는 것이다. 새벽에 여학생의 호텔방에 들어온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다른 의도가 없었다고 판단하는 검찰의 견해에는 성폭력 사건의 해결에 있어 ‘누구의 시점을 채택하고 있느냐’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교수가 아닌 대학원생이라면, 보통의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어떠한 위계관계의 아래에 놓여있는 사람이라면, 새벽에 자신의 방에 들어와 강압적인 언동을 보이는 것으로부터 어떤 저의를 파악하지 못할까?

 

C교수 사건, 원인 파악과 대책 마련에 소홀한 대학

 

학교 측의 문제를 가장 여실히 보여준 것은 C교수 사건이 아닐까 싶다. 사건 해결의 과정에서 피해자의 권리는 정말 기본적인 차원에서부터 보장받지 못했다. 진상조사 과정에서는 사건 진상 파악의 수준을 넘어선 무례한 질문들이 오갔다. 당연히 피해자는 자신의 사건의 해결을 위한 과정에 직접 참여하며 올바른 해결을 함께 구상할 수 있어야 하나, 이 사건 피해자는 해결을 논하는 장에 참여할 수 없었다. 파면 소식마저 먼저 고지받지 못해 피해자가 징계 과정에 온 신경을 쏟아 정보를 캐내야만 했다. 대학 본부는 1년 9개월 가량의 시간 동안 징계를 미뤄왔다. ‘사법적 절차가 먼저 들어갔기에 학교 측에서도 곤란하다’는 입장을 펼쳤을 뿐이다.

 

한편, C교수 사건 역시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되었다. 1심에서 가해교수에 대한 실형이 선고되었고, 검사 측에서는 형량이 너무 가볍다며 항소를 결정했다.

 

그러나 사법적 해결이 아니더라도 분명 대학에는, 교육기관으로서의 대학에는, 어떠한 공동체에는 그것이 추구해야 할 고유의 가치가 있고, 구성원을 보호하기 위해 제 나름의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다. 왜 하필이면 그 공동체 내에서 그와 같은 사건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원인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기본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사건에서 학교 측은 가해교수의 징계 이외의 공동체적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징계, 라는 일방적인 방식만을 해결의 방안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은 서울대학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대학 내 권력형 성폭력/인권침해 사건의 피해자는 대개 위계관계의 아래에 놓여있는 이들이고, 징계위원회는 행정적인 전문성 등을 이유로 교수나 법조인 등이 아닌 이들은 배제하곤 하며, 이는 사립학교법 역시 마찬가지니까.

 

성폭력의 ‘좋은 해결’을 위해 대학이 해야 할 것

 

만약 징계위원회에 학생이나 학생 추천 전문위원이 참여할 수 있었다면, 또 만약 징계위원회의 내용을 공론화하지 못하게 하는 독소 조항이 없었다면, 만약 인권센터에 충분한 인력이 지원되어 상담위원과 전문위원이 분리되었다면, 최소한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공론화하고 투쟁을 하는 과정이 이렇게 지난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에 대한 사건이 언제, 어떻게 심의되고 있는지 아는 것과, 진상조사 과정에서 피해를 증언하는 동안의 심리적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것은 피해자가 보장받아야 하는 당연한 절차적 권리다. 그런 변화들이 일어나고, 학교 측에서도 반복되는 권력형 성폭력을 방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강하게 대응하고, 구성원들도 그런 변화의 움직임에 열렬히 참여하였다면, 어떤 성폭력 사건들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구조적 방지책이라는 것을 마련할 수 있었다면, 모두가 조금은 더 평안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 권력형 성폭력·인권침해 문제해결을 위한 서울대인 공동행동 권소원 대표가 '대학 내 성폭력 담론을 다시 묻다' 토론회에서 발언 중인 모습 (출처: 대학알리)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학내에 다음과 같은 대책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먼저, 교원징계위원회에 대한 것이다. 서울대학교는 규정이 ‘훈시규정’이라는 핑계로 원칙적인 징계 의결 기한이 무시되는 ‘늑장 징계위’와, 피해자가 당사자로서 참여하지 못하고 공론화할 권리마저 침해받는 ‘밀실 징계위’의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세 가지 개선이 필요하다. 첫째는 학생 참여다. 교원들의 제 식구 감싸기 논란을 타파할 수 있도록, 징계위원회에 학생 혹은 학생측의 의사를 반영하면서도 학교측에서 그토록 요구하는 전문성을 충족하는 학생추천전문위원의 도입이 필요하다.

 

둘째는 피해자의 공론화할 권리 보장이다. 징계 과정에서 주변의 헛소문과 추측, 의도적인 2차 가해 등이 있을 수 있고, 징계과정 자체에서도 2차피해가 유발될 가능성이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피해자에게 징계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교원징계 규정은 징계위의 의결을 피해자가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셋째는 피해자의 절차적 권리 보장이다. 신고 때부터 징계위원회가 개최되고 활동하며 그 활동을 마치고 다시 피해자가 공동체로 복귀하기까지, 이 모든 단계에서 피해자는 절차적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 대표적으로는 신고 당시, 진상조사 과정에서 조사위원과 상담위원을 분리하여 피해자가 적절한 심리적 안정을 보장받으면서도 진상조사의 과정에 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징계위가 개시될 때마다 징계위 측에서 먼저 그 사실과 결과를 고지하여, 피해자가 전전긍긍하며 소식을 팔로우업하는데 모든 신경을 쏟도록 하지 않아도 되게, 그렇게 조금이나마 일상을 회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징계위원회에서 피해자의 진술이 어떤 맥락으로 공유되고 있는지, 혹시 잘못 공유된 것은 아닌지를 재확인할 기회도 주어져야 한다.

 

‘성폭력 사건의 좋은 해결’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러한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만들어가는 시작점을 열고 있다. 이제 그 시작을 넘어 던져가야 하는 질문은 무엇일까. 그 답을 ‘함께’ 만들어가고 싶다. 그때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 라는 말이 아닌, 이제는 이러한 논의를 시작할 때다, 라는 말이 통용되는 시대를 당신과 함께 만들어가고 싶다.

 

[필자소개] 권소원. 권력형 성폭력‧인권침해 문제해결을 위한 서울대인 공동행동의 대표로, 서울대학교 내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난 권력형 성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피해를 피해라고, 가해를 가해라고 부를 수 있는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가고자, 더이상 피해자가 떠나갈 필요가 없는 공간을 만들어보고자 반성폭력 활동을 시작했다. ‘권서공’에서는 학교와 인권센터의 밀실/늑장 대응에 대한 투쟁, 사법 투쟁 등 각종 구조변혁을 위한 노력을 지속해왔다.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 ㅇㅇ 2023/03/07 [11:51] 수정 | 삭제
  • 싸우는 여자들이 세상을 바꾼다는 구호를 떠올리게 됩니다. 응원합니다. 성폭력 없는 대학을 만들기위해 고군분투하는 페미니스트들!
  • 보보 2023/03/06 [13:01] 수정 | 삭제
  • 대학에서 아직도 피해학생에게 절차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니 참 안타깝습니다. 대학이 이런 일에는 가장 발벗고 나서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 골치 아파 2023/03/06 [12:44] 수정 | 삭제
  • 대부분의 수컷들에겐 피해갈 수 없는 욕구이다 보니 특별히 자제력 약한 수컷은 늘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키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이 빌어먹을 성 문제! 그렇다고 성욕 자체를 아예 싹 없애버린다면, 종족 번식이 안 되는 참담한 결과에 도달하게 되니 이 또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고 과연 이 문제를 으째야 쓸까나... 아이고 머리 아파랑.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