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에게 ‘약함’이란 무엇인가

비평가 스기타 슌스케 인터뷰③ 남성학의 계보

조경희 | 기사입력 2023/03/07 [10:20]

남자들에게 ‘약함’이란 무엇인가

비평가 스기타 슌스케 인터뷰③ 남성학의 계보

조경희 | 입력 : 2023/03/07 [10:20]

일본에서 최근 몇 년 동안에 ‘약자남성’이라는 단어를 쓰며 남성성을 분석하고 관련 저서를 잇달아 출간한 비평가 스기타 슌스케 씨. “스스로가 어둠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감각이 있어서 남성학”을 한다는 그는 현재 잡지 『대항언론』 편집인으로 활동, 남성학과 관련해 집필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간의 스기타 씨의 저작과 활동을 주목해온 조경희 성공회대 교수가 인터뷰했고, 대화의 내용과 범위가 방대해 총 4회에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조경희: 최근 몇 년 동안에 ‘약자남성’에 관한 책을 3권 내셨잖아요. 인터뷰에서 가장 초점을 두고 싶었던 점은 이 부분인데요. 1990년대부터 일본에서는 남성학의 흐름이 조금씩 있어왔죠? 도중에서 좀 끊긴 것 같은데요.

  

스기타: 네, 있었죠. 한동안 남성학의 시대라고 불리기도 했는데요. 대표 논자들도 나왔고, 당시 각지의 시민강좌에서도 남성학 강좌가 열렸어요. 다만 그때 논자들이 젊은 나이가 아니었고, 어쩌면 회사를 은퇴하는 남성들이 이제 남자다움에 얽매이지 않고 나답게 살자는 식의 이른바 ‘고령자 멘즈리브(남성해방)’라는 측면이 있었어요. 고령 남성들이 더 잘 살기 위한 남성학. 그렇게 시민강좌도 어느 정도 하고 나니 남성학의 역할은 끝나버린 것이죠. 물론 남성학 쪽에서 젠더 문제를 자신의 생활이나 욕망의 차원에서 접근했던 사람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발전하지는 않았어요.

 

조경희: 1990년대 후반에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와 미야다이 신지(宮台真司) 대담이 화제가 되었잖아요.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없는 성적 약자 남성들은 어떻게 욕구를 충족하면 되냐”고 묻는 미야다이에 대해 우에노가 “평생 자위하면서 죽어가면 된다”고 말해 비판을 받았어요. 성산업의 폭력적인 불평등 구조를 생각할 때 미야다이의 발언이야말로 문제였는데, 어쨌든 둘 다 개개인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습득이 중요하다는 ‘자기책임론’을 바탕으로 한 점에서 한계가 있었죠.

 

스기타: 너무 단순화시킬 수는 없지만 1990년대는 역시 우에노 치즈코가 아이콘이 되면서 일종의 신자유주의적인 소비사회 페미니즘과 같은 것이 확산된 면은 있었다고 생각해요. 다만, 동시에 여성학 쪽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통해서 내셔널리즘과 페미니즘의 관계가 주된 화두였잖아요. ‘위안부’ 문제를 통해 일본인 여성들이 가진 가해성이라는 점이 추궁되기도 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남성학이 페미니즘에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고 봐요.

 

▲ 스기타 슌스케 씨. 인터뷰 후 서울의 한 식당에서 (촬영: 조경희)

 

‘인기 없는 남자’ 히모테 담론과 혐한

 

조경희: 2000년대 초중반에 『전차남』과 같은 ‘히모테’(非モテ: 주로 인기 없는 남자를 지칭하는 온라인에서의 속어) 남자의 성공 이야기도 나왔죠. 내용은 거의 판타지 같았지만요. 그런데 그 시기 온라인에서 혐한 담론이 한창 활성화되었던 시기에요. ‘히모테’ 담론과 혐한 사이의 상관관계를 어떻게 보시나요.

 

스기타: 온라인 공간에서는 2000년대 초부터 ‘히모테’에 대해 비교적 활발하고 독자적인 논의가 있었어요. 2채널(일본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전차남』과 같은 내용도 나왔는데, 그 히모테 담론이 1970년대 이후 우먼리브(여성해방운동)나 페미니즘의 맥을 발전시켰는가, 라고 하면 그렇게 보기는 어려워요. 즉 자신의 욕망이나 사회를 바꾸는 방향이 아니라, 자기조롱이라 할까요. 아이러니를 통해 자신을 상대화시켜 웃음으로 바꿔버리는 전략이 있었다고 봅니다.

 

혼다 도루(本田透)의 『모단(喪男)의 철학사』라는 책이 있어요. 한자로 잃어버린 남자라고 쓰는데요. 예컨대 “사실은 니체는 히모테였다!”라는 내용을 재미있게 쓴다거나. 히모테의 심각성을 상대화하고 유머로 바꿔버리는 것이요. 『전차남』도 그런 편이죠. 이런 전략의 장단점이 있는데요.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웃음 코드로 완화시킨다는 효과는 있었는데, 결국 끝없이 자신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아이러니컬한 태도를 낳았어요. 이건 기타다 아키히로(北田暁大)의 책 『비웃는 일본의 내셔널리즘(嗤う日本のナショナリズム)』이 지적한 부분이죠. 끊임없이 조롱, 조소하면서 자기상대화하는 태도 말이에요.

 

‘히모테’ 담론은 인기 없는 자기를 그냥 웃기는 설정으로 상대화하면서도, 어느 순간 그것이 리얼한 방향으로 반전할 때 내셔널리즘이나 혐오 담론에 바로 흡수되어 버리는 위험성이 있어요. 누구나 여유가 없어지면 설정(ネタ)이 리얼(ベタ)이 되어버리는데, 온라인은 그것을 무한히 부추기니까요.

 

전쟁 가해자 측의 남성성 문제

 

조경희: 조금 역사적인 접근을 해봤으면 좋겠는데요. 한국의 경우 근대 초기에 식민지배를 당했고, 또 지금도 분단체제에 군복무가 있는 상황이니 가부장제와 군사주의, 포스트콜로니얼한 남성성의 문제는 뿌리가 깊어요. 일본의 남성성 문제를 전후 일본의 정신사적으로 접근하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스기타: 노다 마사아키(野田正彰)라는 정신과 의사가 쓴 『전쟁과 죄책』(한글본 『전쟁과 인간』)이라는 책이 있죠. 아주 중요한 책이라 생각하는데, 전쟁을 겪은 군인들의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같은 것이 일본은 너무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전쟁 가해자 측도 상처를 입고 책임을 느끼는 건 당연한데, 그런 것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세대 간에서 계승되지 않았죠. 후세대는 전쟁 세대의 모습을 보고 배우니까, 아 가해를 해도 상처받을 필요가 없겠구나, 책임을 느낄 필요가 없겠구나… 아파시(apathy)라고 하잖아요, 무감각, 무관심. 그런 문화가 계승되어 버렸어요.

 

한국의 식민지화된 남성성과는 다른, 식민화한 측의 남성성 문제가 80년이 지난 지금도 계승되어서 회사나 학교나 여러 집단에서 학습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건 누가 말한 거지만, 죄책감이 그 사회의 문화를 만드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죠. 그때 죄책감이란 건 단순히 반성하는 정도가 아니라 더 갈등하지 않으면 안돼요. 나도 상처받았지만, 다른 누군가를 가해하거나 죽여버린 경험이란 건 인간에게 해소할 수 없는 모순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것과 제대로 대면하는 문화를 만들지 않았어요.

 

주디스 하먼 등이 말하는 복잡성 PTSD는 외상후 스트레스가 복합화되어서 마음속에서 갈등하는 상태를 말하고 있는데, 말하자면 ‘복잡성 죄책감’ 같은 것을 일본도 문화적으로 만들어갈 필요가 있었어요. 가해자 측도 상처를 입거나 트라우마를 느끼거나… 인간은 분명히 그런 면이 있다고 봐요. 폭력을 휘둘러버린 사실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을 추궁하는 감각이 더 있어도 되는데, 그것이 축적되지 않았어요.

 

그런 경험의 부재가 왜곡된 피해자 의식의 만연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요. 교차성이라는 말도 좀 조심해야 하는 것은 결국 책임의 상대화 같은 것에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여성이라 해도 가해국 국민이고 비장애인이 아닌가. 그런 논리가 가능한데, 그러면서 (남성들이) 책임을 조금씩 상대화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여성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통해 내셔널리즘과 젠더의 교차성을 내재적으로 질문해온 역사가 있지만, 일본 남성들은 그런 갈등도 거치지 않았죠. 오히려 전혀 리얼리티를 갖지 못한 채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되자’고…, 이 문제는 정말로 매우 뿌리 깊다고 생각합니다.

 

조경희: 가해자의 경우에도 복합적인 트라우마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런 갈등을 겪는 경험을 축적하지 못했다… 정말 맞는 지적이에요. 일본 사회에 있는 그 기묘한 가벼움, 경박함의 원인이죠. 그동안 식민지배나 전쟁책임을 묻는 논의는 계속 반복해왔지만, 더 정신분석 차원에서 젠더문화와의 연관성도 포함한 내재적 분석이 필요한 것 같아요.

 

스기타: 우크라이나 전쟁을 배경으로 일본에서 ‘새로운 전전(戦前)’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지만, 역시나 전쟁을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는 리얼리티가 결여되어 있어요. 징병제도 없고, 일단 자위대는 군대가 아니라는 자기기만이 있고요. 전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없다는 건 전후 세대의 망각이라는 수준만이 아니라, 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마저도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버렸다는 부(負)의 유산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끌어내지 않으면 차별이나 혐오의 문제도 제대로 대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후 일본의 미성숙한 아저씨들

 

조경희: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전후 일본사회의 경박함을 만들어온 아저씨(おじさん)들, 이것은 뚜렷한 실체라기보단 아저씨적 멘탈리티의 문제죠. 전후 일본의 기득권 세대가 가부장적이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미성숙한 태도나 행동을 취해왔다는 지적은 종종 제기되죠. 유치한 아저씨들, 실제로도 많고요.

 

스기타: 서브컬쳐로 말하면 〈에반게리온〉은 바로 그런 이야기로 읽을 수 있어요. 주인공들은 14세의 소년소녀들인데, 부모 세대의 명령으로 가혹한 전쟁을 하게 돼요. 부모 세대의 책임을 아이들에게 전가하고 있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고통스럽게 싸워야 하는 것처럼 보여요. 주인공 신지의 아버지는 겐도라는 남자인데, 결국 모든 악의 근원은 이 남자에게 있어요. 겐도의 욕망은 세계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했던 실험으로 죽어버린 아내를 되살리고 싶은 건데, 이 여성은 아내와 어머니를 동시에 구현하는 존재에요. 겐도는 그녀를 잃은 상실감을 견딜 수 없어서 아이들을 착취하면서 여러 모략을 꾀하는 것이죠.

 

아이들에게는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인데, 그런 사람이 부인을 잃은 슬픔의 상처를 극복할 수 없어서 굉장히 유치한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죠. 현실 세계와 겹쳐서 굉장히 리얼해요. 아저씨들은 억압적이고 폭력에 무감각하지만 얼핏 보기에 약하거나 미숙함을 안고 있다는 부분이 너무…

 

조경희: 역사적 경험이 어떤 남성성을 형성하는지는 또 다른 주제네요. 한국의 경우, 무감각이나 미숙함보다는 탈식민 분단국가로서 완성되지 않는 주체화의 욕망이 자기연민과 여성억압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여요. 남성성 분석은 한국에서도 흥미로운 책들이 나오고 있어요. 『그런 남자는 없다』(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엮음), 『한국, 남자』(최태섭), 『남성성의 각본들』(허윤)과 같은 책이 있고요. 『한국, 남자』는 일본에서 번역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아요. 한국의 남성성 논의는 군사주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어서 『여자도 군대 가라는 말』(김엘리)과 같은 군대를 통해 젠더 문제에 접근하는 시도들도 있어요. 이런 역사적 경험이 젠더 문화와 구조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비교하는 것도 중요하죠.

 

스기타: 아, 정말 공동연구라도 하고 싶을 정도네요. 한일 남성성과 식민주의 경험이 어떻게 관계하고 어떤 차이를 낳고 있는지 말이에요.

 

미성숙함을 퀴어화하기

 

조경희: 그런데 스기타씨의 약함의 사상은 일본의 미성숙함의 문화와 일정한 친화성을 가져버리지 않나요? 상대적으로 일본에서 받아들이기 쉬운 감각으로 보여요. ‘약함’이란 말이 미성숙이나 무책임을 용인해버리는 위험도 있지 않을까요.

 

스기타: 네. 멍하니 지내는 아저씨들이 많으니까… 30년 전 오에 켄자부로(大江健三郎)가 노벨 문학상 수상식에서 “애매한 일본의 나”라는 강연을 했지만, 이제는 “멍 때리는 일본의 아저씨”라고 말하고 싶어요(웃음). 물론 이대로 미숙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미숙함이나 취약성을 ‘아저씨화’하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열어가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 시도들은 좀 있는데, 요즘 에토 준(江藤淳)의 『성숙과 상실』(1993)이 다시 붐이에요. 젊은 20대 여성들도 새로운 에토 비평을 하고 있는데요. 어떻게 보면 이 책은 돌봄에 계속 실패하는 남성에 관한 이야기에요. 강한 아버지가 되지 못하는, 그리고 병든 어머니와 아내의 돌봄에 실패하는 남자들에게 에토는 주목하고 있어요. ‘케어링 트러블’(caring trouble) 같은 건데, 이런 실천이 가부장적이지 않는 남자들의 다른 삶의 가능성으로 읽을 수는 있어요.

 

또, 미성숙함을 퀴어화하려는 방향은 일본의 서브컬처의 역사 속에서 가능성이 있었다고 봐요. 그 점이 사랑받은 부분이기도 하고요. 〈에반게리온〉도 읽기의 가능성이 열려있죠. 아까 말한 ‘겐도’를 비판하고 다른 등장인물에게서 가능성을 모색하는 텍스트로 읽을 수도 있어요. 메타적인 미성숙함과 취약성을 남성을 특권화하지 않는 방향으로, 퀴어한 욕망 쪽으로 가져간다는 것은 저도 지향하고 있는 과제입니다.

 

▲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포스터. 스기타 슌스케 씨는 “나는 올바르게 상처받았어야 했다”는 주인공의 메시지가 끊임없이 자기관리를 요구하는 또 다른 올바름의 속박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한다.


조경희: 남성의 미성숙함을 여성들이 지탱하거나 승인하는 방향이 아닌, 신체성을 흔드는 방향으로 구상하는 가능성이네요. 그런 점에서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 대한 글도 재미있었어요. 얼핏 자상하고 똑똑하지만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제대로 상처받을 줄도 모르는 주인공 가후쿠가 타인과 트라우마를 공유함으로써 남성성을 변화시키는 이야기로 분석했죠. 주인공과 젊은 여성과의 위태로운 조합에 대해서도 남자가 ‘돌봄에서의 자기소외’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해석해서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감정표현이 없고 현실을 회피하는 주인공이 답답했는데, 이런 폐쇄성 또한 오늘 나온 이야기, 즉 죄책감이나 상처와 대면하지 못했던 미성숙한 남성성의 계보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4편에서 계속)

 

[필자 소개] 조경희. 일본 출생. 성공회대학 동아시아연구소 부교수.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를 중심으로 식민주의, 이주, 소수자, 젠더 문제를 연구하고 가르친다. 주요 공저에 『아시아의 접촉지대: 교차하는 경계와 장소』(2013), 『주권의 야만: 밀항, 수용소, 재일조선인』(2017), 『〈나〉를 증명하기: 동아시아의 국적, 여권, 등록』(2017), 『두 번째 ‘전후’: 1960-70년대 아시아와 마주친 일본』(2017), 『포스트냉전과 팬데믹: 오키나와의 코로나 경험과 정동』(20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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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짝임 2023/03/10 [19:08] 수정 | 삭제
  • 인터뷰 진짜 재밌다.
  • 후추 2023/03/08 [09:35] 수정 | 삭제
  • "인간은 그런 면이 분명히 있다고 봐요" 가해자성, 나약함, 혹은 죄책을 어둠으로 가져가지 않고 어떻게 수면위로 끌어내어 더 나은 방향으로 갈 것인지 논의하자는 이야기 속에서 눈길이 머문 문장입니다.
  • ㅅㄹ 2023/03/08 [09:03] 수정 | 삭제
  • 일본에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우에노 지즈코로 대표된다는 이유로 납작하게 바라봤던; 편견이 있는데요, 두 분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당연히 일본 사회에도 특유하고도 다층적인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는 걸 몇 편의 인터뷰를 통해 엄청 많이 배우고 갑니다.
  • 독자 2023/03/07 [23:40] 수정 | 삭제
  • 이분께 한국의 서브컬쳐 비평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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