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를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바라보고, 젠더 관점을 담아 다각도로 접근하는 기획 ‘섭식장애와 여성의 몸’ 기사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너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무대잖아’
1년 전의 일이다. SNS에서 『삼키기 연습』이라는 책과 관련한 인터뷰 영상을 보고, 그 길로 바로 구입해 읽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책이 나오는구나 하고 가슴이 떨리기도 했고, 이런 자세하고 예민한 이야길 다 써도 되나 싶을 만큼 섭식장애 경험과 관련해 큰 용기 내준 저자에 대해 궁금해졌다. 트위터에서 박지니 작가와 몇 번의 멘션을 주고 받으며 ‘트친‘이 되었다.
몇 달 전 어느 날. 박지니 작가가 국내에서 첫 섭식장애 관련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며, 와서 노래를 해줄 수 있냐고. 그리고 나의 경험을 이야기해줄 수 있냐고 제안을 해왔다. 서울의 작은 책방에서 공연할 거라고.
굉장히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나는 무서웠다. 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혹시나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듣고 비난을 하면 어쩌지? 지금 뚱뚱한 내 모습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을까? 너무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비난하면 어쩌지? 나는 망설여졌다.
‘공연을 해볼까?’ 하는 생각만 해봤을 뿐인데, 그 날 밤 악몽을 꾸었다. 깨어나서도 불안이 몰려왔다. 내 이야기를 들은 정신과 선생님은 그렇게 불안하고 무서운 건 안 하는 게 맞다고. 지금은 본인부터 챙기자며 공연 제의를 거절했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나도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생각 한 쪽 끝에서 자꾸 자그마한 손이 내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너를 필요로 하는 무대잖아. 너는 그런 걸 꿈꿔왔잖아. 진정한 너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 앞에서 너의 이야길 할 수 있는 기회잖아. 그동안 수없이 방황하며 했던 생각들. 음악인으로서, 내가 있어야 할 무대는 어디일까, 그 답은 어쩌면 이곳이 아닐까?’ 자꾸 이런 생각들이 내 마음을 붙잡았다. 무대에 오르기로 했다!
공연 일정은 ‘섭식장애 인식주간’(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이 열린 2월의 마지막 주 일요일 저녁이었고, 나에겐 약 두 달의 시간이 주어졌다. 준비시간으로 두 달이면 넉넉한 편이었지만, 나는 현재 입시 보컬 트레이너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정시 실기 시간과 맞물려 공연을 준비할 틈 없이 시간은 매우 바쁘게 흘러갔다. 일하는 중 틈틈이 연습은 했지만, 사실 노래 연습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의 섭식장애 경험에 대하여 어떤 이야길 할 수 있을까. 고민도 많고 용기가 나질 않았다. 트라우마가 올라와 고생한 날들도 적지 않았고, 공연 날이 다가올 수록 불안해져만 갔다.
드디어 공연 당일. 나는 다소 피곤한 컨디션으로, 사전에 박지니 작가와 그리고 함께 무대에서 공연할 백은선 시인과 만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백은선 시인과는 처음 본 사이였음에도 이야기가 잘 통해서 금세 마음이 풀어졌다. 우리가 리허설을 끝내고, 스탠바이. 레디, 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사실 고민만 많이 했지, 어떤 이야길 해야 할지는 딱히 정하지 않고 갔던 터라 머리 속이 하얘졌다. 노래를 끝내고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하면서 횡설수설 이야길 늘어놓았는데, 다행히 사람들은 중간중간 웃어주기도 하고, 반짝이는 눈빛을 보내며 내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주었다.
반짝이던 가수 시절, 외모품평에 타들어 간 마음
17살, 처음 음악을 시작했을 땐 하루하루가 신이 났다. 대학로에서 음악을 시작했는데 매일 교복을 입고 혜화동을 강아지처럼 뛰어다니며 노래하고 연습하고 좌절하고 울고 웃고 떠들고…. 음악 안에서 너무나 자유로웠다. 그 이야길 하면서 그 때 나를 상상해보니 참.. 뒤에 올 고난(?)의 파도를 모르고 해맑기도 하지.. 라는 생각이 든다.
스무 살이 지나, 입시에 실패하고 방황하던 중에 친구 따라 갔던 회사 오디션에 덜컥 합격을 해, 연습생이 되었다. 규모가 작은 기획사라는 건 늘 시간이 없기 마련이고, 기회는 생각지도 못할 때 찾아와 어설픈 내 자신으로 세상 앞에 나갈 수밖에 없다. 내가 조금만 더 준비되었더라면… 하는 생각은 의미가 없다. 준비는 용기와 같다. 용기가 생겼을 때 일단 뛰어들어서 굴러다니며 점점 나아져야 하는데, 이십 대의 나는 너무나 소심하고 상처가 많은 아이였다.
내가 들어간 작은 기획사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들밖에 없었기에 더더욱 주눅들고 내가 잘못된 사람인 것만 같았다. 으레 여자 가수 연습생이 그렇듯 나는 못생겼다고, 너무 뚱뚱하다고, 너무 말주변이 없다고, 밝지가 않다, 애교가 없다 등등 숨만 쉬어도 단점을 지적당하며 연습생 기간을 거쳤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좀 더 사회적이고, 덜 소심한 성격으로 노력해주길 바랬던 걸 수도 있다. 하지만 21살의 나에겐 모든 게 다 공격적으로 느껴지고 무섭기만 했다.
그래도 내가 있던 회사는 적.어.도. 얼굴이나 몸매보다는 ‘음악적으로’ 주목 받길 원하는 회사였기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는 운 좋게도 지상파 첫 방송을 ‘유희열의 스케치북’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1년 간은 정말 스케줄이 많았다. 그 때의 상황을 글로 쓰면 누가 봐도 참 잘 되던 시기였는데, 내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더 소심해져 갔고 주눅들어만 갔다. 그 때부터 내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음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의 일상은 매일 못생겼다, 뚱뚱하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고, 급기야 대표는 본인의 앞에서 내가 음식 먹는 모습 보는 걸 싫어하기 시작했다. 나는 회사 사람들이 다같이 밥을 먹을 때면 혼자 연습실 구석에서 집에서 싸온 야채를 먹었다. 나는 그 당시 2년 정도 익힌 음식을 아예 먹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런 규칙을 세워서 살에 대한 나의 불안한 마음을 조금 기대고 싶었던 것 같다. 몇 년간 내가 먹은 익힌 음식은 삶은 고구마 정도가 다였다.
그리고 아침엔 요가, 점심엔 복싱, 밤에는 헬스장을 다니며 50kg 초반까지 몸무게를 줄이고, 유지하였다.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무서웠고, 점점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조차 크게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키 170cm에 몸무게 53kg였던 내 모습도, 나는 너무 뚱뚱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매일 저주하고 미워했다.
다이어트 약과 알코올…최악의 루틴
나의 반짝이던 가수 시절은 참 얼마 못 갔는데, 1년을 정말 종횡무진 바쁘게 활동을 한 뒤, 회사의 대표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그로부터 다시 회사를 만들고 새 앨범을 내고 일본에서 활동하게 되기까지 방황을 하면서 알코올에 빠지게 되었다. 섭식장애를 앓는 사람들은 중독에 쉽게 노출되어 있다. 연약해진 마음과 파괴적인 행동의 습성으로 인해서. 나는 연습생 때부터 말 못하고 쌓여온 내 마음의 갈증을 어디에 풀어야 할 지 전혀 몰랐다.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이도 없었고, 치료를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술과 약으로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비뚤어져 갔다. 좋지 않은 관계에 얽매이거나, 데뷔 전부터 먹어온 다이어트 약을 최고 용량으로 올려서 술과 함께 먹기를 반복하는 일상이었다.
다이어트 약. 여기서 다이어트 약 이야기를 하지 않고 지나갈 수가 없는데, 당시의 나는 당장 살을 빼는 것,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가장 간절했다. 그 마음 안에는 ‘건강하게’라는 선택지는 전혀 없었다. 당시에 나는 타이밍 좋게(?) 다이어트 약을 용량 생각 없이 최대치로 처방해주는 병원을 만나게 되었다. 나를 구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고, 내 주변 모두가 나의 침몰만을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는 술과 약의 수렁으로 깊게 빠져들어갔다. 강도가 센 식욕억제제를 먹으면 하루 종일 토할 것 같고 머리가 아프고 손이 떨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며 식은땀이 난다. 그래서 뭘 먹으려 해도 먹을 수가 없다. 밤에는 술을 마시고, 새벽에 술 기운에 먹은 음식은 다 토하기. 최악의 루틴이었다.
이 기간에 무서움이라는 감정이 나를 지배했다. 살이 찔까 봐 무섭고, 음식을 먹을까 봐 무섭고, 사랑 받지 못할까 봐 무섭고. 사실은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애정을 사랑이라 믿으며 그렇게 악몽 속에서 매일을 살았다. 그래도 나는 새로운 회사에서 다시 무대에 오르기를 꿈꿨고, 회사가 열심히 노력해준 결과 감사하게도 일본에서 가수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십 대가 끝남과 동시에 나의 가수 활동도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즈음 나는 슬슬 병행해오던 보컬 트레이닝 일을 메인으로 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정신과에 찾아갔다. 내 몸이 술과 약으로 사는 걸 더이상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는 내게 ‘그 말씀하신 다이어트 약이 심장 근육에 정말 안 좋은 약인데, 어떻게 그 약을 8년을 드셨어요? 안 힘드셨어요?’ 라고 물었다. 알코올 의존도도 상당히 높게 나와, 술과 약을 끊는 데 노력하기로 했다.
당시 나는 트라우마 증세로 지속적인 공황증세와 불안증세가 올라와 일상 생활이 어려웠다. 한 번 망가진 건강은 반드시 깨진 자국을 남긴다. 이를테면, 이십 대에 내가 안 좋은 다이어트 방식으로 끌어다 쓴 내 건강이 삼십 대의 나에게 복수를 한다는 얘기다. 내가 겪는 내 몸의 복수(?)는, 기침 하다가 갈비뼈가 부러짐. 빈혈 수치가 5.5까지 내려가 입원하여 피를 수혈 받음. 계단 하나를 잘못 보고 접질렀던 발목이 한 번에 모든 인대 파열, 뼈 부러짐. 그것도 두 번이나. 그리고 잠을 잘 때는 정신과 약을 8알 정도는 먹어야 겨우 잠을 잘 수가 있다.
악몽 속에서 혼자 앓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국내에서 처음 열린 ‘섭식장애 인식주간’ 세 번째 날 행사인. “우리의 가능세계”는 따듯한 분위기로 잘 마무리되었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관객들은 우리의 이야기를 필요로 했었고, 누군가에게 내 노래가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와 누워서 생각했다. 섭식장애라는 이름으로 사람들 앞에 나가서 이야기하고 노래한다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구나. 나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할수록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도 함께 상승하고, 또 끝없이 검열하게 된다. 내가 기억을 조작해서 이야기하는 건 아닐까? 사실을 부풀려 이야기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말을 쉽게 끝내지 못하고, 이 글도 쉽게 끝내질 못한다. 어딘가에 내 잘못이 있을까 봐.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니는 나를 믿지 못하는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용기를 내어 이 자리까지 왔다. 많이 망설였지만 이야기하고 싶었다. 섭식장애는 더없이 외로운 질병이고, 아주 비밀스러운 악몽이기에 나 말고도 이 악몽 속에서 혼자 앓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그 용기 하나 믿고, 이렇게 두서 없는 글을 써내려 간다.
정신과 치료 5년. 상담치료 4년. 나는 아직도 매일 ‘밤의 아이’와 함께 있다. 나의 밤의 아이는, 여전히 음식을 먹고 토하고 싶어하고, 살고 싶지 않아하며, 옛날 기억들을 떠올려 나를 절망에 빠뜨리고 싶어한다. 밤의 아이를 외면하고 미워했던 시절이 있었다. 너무너무 미웠고 왜 그러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고치고, 나아지고만 싶었다. 그러나 언젠가 상담을 받다가, 밤의 아이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아이일 거라는 해답이 나오게 되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나를 망치는 내면? 놀랍지만 왠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는 밤의 아이의 옆에 함께 앉아있을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함께 앉아, 손을 잡고 가만히 기다려주는.
언제쯤 잘 정리할 수 있을까? 나의 이십 대를. 현재 금주한 지 2년차이고 정신과 치료에 매진하고 있지만, 언제쯤 나는 밤의 아이를 더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그 때 꿈을 꾼다. 그 때의 악몽 같은 기억을 생생하게 꾼다. 그래도 음악은 놓지 않고 싶고, 노래를 계속 부르고 싶어 여기까지 왔다. 사람들에게 노래를 가르친 지 올해 횟수로 9년차. 처음엔 가수 생활로부터 도피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변화했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 너무나 많은 마음들, 아주 다양하게 마주하고 어루만지며 함께 노래를 발전시켜 나가는 경험을 하면서 나는 조금씩 단단해졌다. 사람들과 함께 굴러가며 조금은 성장할 수 있었다. 실수도 많았고 여전히 많이 부족하지만, 앞으로도 더 꼼꼼하고 또 밝게 사람들을 가르치고 싶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내가 말하고 싶은 걸 내 음악으로 발매하고, 다시 한 번 무대에 서고 싶은 소망이 있다.
섭식장애는 앞으로도 꽤나 오랫동안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한동안 힘들어할 것이다. 이 지독하고 외로운 나와의 싸움. 끊임없이 나를 버리지 않으려는 노력, 나를 미워하지 않으려는 노력. 살아내려는 노력. 오늘도, 내일도. 그곳으로부터, 그 때의 나를 데리고 나오고 싶다.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에서 바바라 님이 부른 Demi Lovato의 “Anyone” 공연 영상(자막). #진부책방스튜디오 https://youtube.com/watch?v=mAH39nMr5KY
[필자 소개] 바바라. 2011년에 “내버려둬”라는 곡으로 데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가수 활동을 하다가 현재는 보컬 트레이너로 활동하며 새 앨범 발매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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