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이 진행될 때 그 취지는 좋으나 과정이 석연찮을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지가 옳기 때문에 지지하는 의견이 있고, 과정이 취지의 본질을 흐리기 때문에 비판하는 의견 또한 있다. 가끔 그 ‘취지’와 ‘목적’은 과정의 불합리함을 쉽게 눌러버리곤 한다. 빈곤을 타자화하는 기부 영상이 일례다. 이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하는 그 영상들은 구조적인 문제는 보지 못하게 만들며 가난한 사람들을 연민하고 동정함으로서 기부를 하게 만든다. 그 취지가 선함에는 의심이 없다. 하지만 이 과정과 형식이 윤리적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래도 옳은 일을 하는데’하는 주장은 때때로 그 과정과 형식을 비판하는 일조차 비윤리적으로 취급하게 만든다. 과정에 대한 비판이 취지에 대한 비판으로 오해를 사기도 한다. 형식에 대한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좋은 일’을 한다는 명목 하에 일어나는 불합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또한 그러하다. ‘고발 영화’라는 이름 하에 자행되는 2차 가해들을 수없이 목격해왔다. ‘충격’을 목적으로 한 불필요한 재현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정만 자극하는 ‘빈곤포르노’와 다름없다. 사실을 알리는 데에 꼭 시청각적 재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토마스 맥카시의 〈스포트라이트〉(2016)는 고발 영화가 갈 수 있는 하나의 길을 제시한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스포트라이트〉의 오프닝 시퀀스는 경찰서를 배경으로 한다. 경찰서에 신부, 검사, 경찰이 있다. 경찰서와 신부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출발한다. 불길한 음조의 음악이 깔리고 검사는 게오건 신부를 데려간다. 경찰들의 대화로 추론해 보건대 이 사건은 신문에 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타이틀이 뜬다.
다음 장면은 보스턴 글로브의 사무실이다. 한 기자의 은퇴식이 있는 날이다. 기자들이 모여 케이크를 나눠먹는다. 케이크는 관객을 영화의 주 배경인 〈보스턴 글로브〉(미국 일간지)의 스포트라이트 팀 사무실로 데려다 놓는다. 스포트라이트 팀에는 네 명의 기자가 있다. 아이가 있는 기자도 있고, 가톨릭 신도인 할머니와 함께 사는 기자도 있다. 그들은 보스턴 교구 내 아동성추행 사건을 조사하게 된다.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했던 게오건 신부를 비롯하여 성직자의 탈을 쓴 여러 가해자들을 파헤치는 이야기다.
영화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기자의 시점으로 진행이 된다. 고발 영화에서 흔히 보기 힘든 시점을 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사건과 직접 연관이 되지 않은 기자의 시점을 취하게 된 이상 영화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해야만 한다. 열정적으로 취재하되, 감정적으로 서술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모든 언론이 이 윤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해자의 입장을 지나치게 서술하는 기사를 흔히 볼 수 있으며, 피해자의 피해 사실을 부러 구체화하여 2차 가해를 저지르는 기사 또한 마주하기 쉽다. 이런 기사를 읽고 나면 전자의 경우 가해자의 가해 사실에 대해 정당성을 찾는 사고를 독자도 모르는 사이 행하게 되고, 후자의 경우 지나치게 가해 장면을 상상하게 만들어 논리적이고 냉철한 판단보다는 즉각적인 감정들이 앞서게 된다. 이 경우에는 독자의 트리거(트라우마, 공포 등 정신적인 동요를 유발할 수 있는 지점)를 건드릴 수도 있고, 가해자를 단순히 악마화하여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로부터 동떨어지게 한다. 이는 고발의 목적을 가진 영화가 종종 저지르는 실수와 닮아있다. 언론 윤리와 영화 윤리는 굵직한 부분에서 다르지 않다.
기자의 시점에서 사건을 다루게 되면 재현이 불필요해진다. 인터뷰어의 구술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기자의 역할은 피해 사건 당시로 돌아가 그 사건을 그대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자, 피해자의 언어로 사건을 듣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 더 기자의 언어로 정리하는 과정을 거쳐 보도를 하게 된다. 영화도 기자의 과정을 그대로 따라간다. 카메라는 단 한 번도 피해 사실이 있었던 과거를 회상하지 않는다. 스포트라이트 팀 기자가 피해자의 말을 듣는 장면으로 대신한다. 아동성범죄 피해자들의 어린 시절이 비춰지는 것은 피해자연대 대표가 스포트라이트 팀을 찾아와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 한 장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이 제3의 입장이 냉정하고 방관자처럼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기자’라는 제3의 입장은 인터뷰어, 피해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온전히 사건에서 떨어져 방관하는 입장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피해자의 언어를 담는 방향성을 띤다. 신뢰가 있다면 플래시백을 보지 않고도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러한 연출은 관객들이 굳이 ‘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하다.
차가운 진심
주연 배우들은 모두 기자이며 영화는 분명 기자의 서사라는 태를 띠지만, 이 영화를 보고 명백하게 남는 것은 ‘사건’이다. 교구 내에서 아동성범죄가 만연하게 벌어졌고 추기경은 이 사건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사실이 남는다. 사실에 앞서는 감정이 아니다. 신문지에 적힌 기사처럼 정확하고 냉철한 보도가 남는다.
극의 후반부, 스포트라이트 팀의 기자 마이크가 흥분을 한다. 건조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도로를 뛰고 언성을 높이는 역할이다. 추기경이 한 신부의 범죄를 묵인한 사실을 밝혀낸 마이크가 바로 보도를 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 팀의 팀장인 월터는 지금 보도하면 한 명을 은폐한 증거만 밝혀지지 나머지 90명의 신부의 사건을 밝힐 수 없다며 미룬다. 마음이 급한 마이크는 당장 터뜨려야 한다며 핏대를 세우지만 월터는 추기경 한 명이 아니라 시스템을, 구조를 파헤쳐야 한다며 말린다. 화가 난 마이크가 자리를 뜬다.
처음부터 이 영화를 보지 않고 이 장면만 떼어놓고 본다면 마이크의 직업에 대한 열정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리고 월터가 지나치게 냉정하다고, 심지어는 수상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종일관 건조한 톤 앤 매너를 유지해 온 영화 속에서 이 씬을 보면 마이크의 흥분이 이해는 가지만 더 깊숙한 보도를 위해 기다려야 한다는 월터의 말에 동의하게 된다. 그리고 뜨거운 감정만이 진실에 대한 열정은 아니라고 느끼게 된다. 진실을 열정적으로 파헤치고 알리려 하는 진심은 때로는 차가워야 한다. 어울리지 않는 ‘차갑다’와 ‘진심’이 만나 ‘차가운 진심’이 되었을 때 가능한 것들이 있다. 차가움을 유지해야 눈앞의 악마보다, 그 뒤의 구조를 볼 수 있다. 영화 속에서는 추기경의 묵인 사실을 뒤늦게 더 여러 사건과 엮어 보도함으로써 교회가 사건을 덮을 수 있는 기회를 막을 수 있었다.
또한 차가움을 지닌다면 정의감에 도취되지 않을 수 있다. 영화는 기자를 찍지만 그 정의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기자의 열정이 이 사건 위에 서는 것을 철저히 견제한다. 어느 한 기자의 감정이나 개인사를 과하게 다루지 않음으로써 기자 개인에 대한 이입을 방지한다. 감독은 샷 사이즈로 이 과정에 적극 개입한다. 이를테면 클로즈업 샷을 사용하지 않는다. 가장 가까이서 인물을 찍은 샷을 바스트 샷으로 제한함으로써 한 인물의 이야기가 아닌 거대한 성범죄에 포커스를 맞춘다.
다큐멘터리와 고발
이러한 연출이 극영화여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의견도 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재현이 불가피하며 그것이 다큐멘터리 본래의 목적이라고 주장하는 자도 있다. 하지만 재현하지 않고도 사건을 잘 드러내는 연출은 다큐멘터리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낸시 슈왈츠만의 〈최강레드!〉(2018)는 2012년 미국의 한 마을에서 미식축구 선수를 포함하여 여러 가해자들이 성폭행을 저지른 사건을 다룬다. 영화가 주력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는 조사를 받는 가해자들의 영상이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가해자를 쫓는다. 가해자들의 불필요한 개인사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피의자로서의 모습만 담는다. 그리고 가해자들이 가담한 정황이 포착된 소셜미디어 영상을 보여줄 때도 피해자의 모습은 일절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건 경위를 따라가기 어렵다거나 하는 문제점은 조금도 없다. 사실 그간의 영화들이 과하게 피해자를 찍었던 것은 관객의 힘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보여줘야만 믿고, 이입할 대상을 찾아야만 감정적으로 공감하는 존재로 관객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피해자에 대한 존중도, 관객에 대한 존중도 없는 연출이다.
알랭 레네의 다큐멘터리 영화 <밤과 안개>(1955)는 나치 수용소의 과거와 현재를 담는다. 과거는 흑백 자료 사진들로, 현재의 수용소는 컬러의 영상으로 담는다. 끔찍하고 충격적인 과거와는 달리 현재는 조용하다. 알랭 레네는 이를 트래킹 숏으로 담아 마치 그냥 우연히 기차여행을 하다가 본 풍경처럼 담는다. 그 풍경에 어떤 역사가 있는지 우리는 기억을 하고 살아야 한다고 영화는 강력히 주장한다.
영화는 범죄의 극악무도함보다 망각에 초점을 맞춘다.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 우리가 지속적으로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영화는 불필요한 재현을 하지 않았을 뿐 역사적 비극에 대해서도 충분히 담고 있다. 과거 자료 사진에 그것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이 또한 충격적이다. 헌데 이 작품이 상영되었을 때 홀로코스트의 충격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사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비난을 한 사람들이 원한 것은 무엇일까. 충격과 경악일까. 실제 과거 자료 사진보다 경악할 재현이 필요했던 것일까.
충격은 자기방어를 불러일으킨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 사건을 회상하려고 하는 의지를 막을 수 있다. 그 충격과 방어의 불쾌한 싸움이 때로는 사건보다 더 깊이 남을 때가 있다. 이 불필요한 싸움을 야기하지 않고 사건을 전달하는 방법을, 앞서 말했던 세 편의 영화가 제시해주었다. 창작자가 윤리적 고발의 언어를 계속 고민할 때에 비로소 사건의 본질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세 감독이 선택한 ‘보여주기’는 피해자의 언어를 들려주거나, 가해자만 보여주거나, 다 없어진 망각의 현재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보여주지 않기’와는 다르다.
불필요한 재현이 거둬진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기억할 것인가.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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