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은 체중계로 잴 수 없는 것[섭식장애와 여성의 몸] 여성주의 건강심리학 연구자 안드레아 라마르 인터뷰뉴질랜드 매시대학교(Massey University)에서 여성주의 건강심리학을 강의한 안드레아 라마르(Andrea Lamarre)는 섭식장애와 관련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고, 기존과는 다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스스로 섭식장애를 겪었고, 병원 치료를 받았고, 삼십 대가 된 지금도 불안과 편두통을 비롯해 몸과 고투하면서 살아가는 안드레아는 자신의 삶을 내내 성찰하는 연구자이기도 하다.
특히 그는 ‘섭식장애로부터 회복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물으며, 회복에 대해 다시 논의해볼 것을 제안한다. 병원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는 섭식장애 환자가 다수인 것이 현실이지만, 지금의 치료 체계에서 미비점을 지적하고 더 나은 치료를 상상하는 안드레아의 메시지는 우리에게도 큰 시사점을 준다. 최근 고향인 캐나다로 돌아가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안드레아 라마르(트위터 계정 @andrealala89)를 서면 인터뷰했다.
-섭식장애와 관런해 어떤 경험을 갖고 있는지 들려주세요.
“저는 섭식장애를 직접 경험했고, 전문적으로 연구해 오고 있습니다. 15살 즈음해서 섭식 문제와 운동 강박이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다가 19살 때 절식으로 일관하는 제한형 거식증이 심해졌어요. 소위 ‘집중 외래환자 프로그램’(intensive outpatient program)이라고 불리는 낮병원(정신질환 재활 프로그램) 치료를 받게 됐지요.
치료를 받느라 대학 한 학년을 쉬었고, 치료를 마친 후 복학했습니다. 학부를 졸업할 즈음 ‘섭식장애에서 회복된다는 건 과연 무슨 의미일까’에 대해 천착하게 됐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톺아 보고, ‘건강한 외양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들이 산재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그것이 사람들의 회복 여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도요. 이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고 마침내는 박사 논문까지 쓰게 되었어요.
섭식장애로 치료를 받고 회복의 여정을 거쳐 온 나의 경험과, 질적 연구 및 디지털 스토리텔링 같은 예술기반 기법을 활용한 연구를 통해, 사람들이 섭식장애를 진단받고 치료받을 기회를 막는 장애물이 얼마나 많은지 밝혔습니다. 또한 ‘회복되었다’고 여겨지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째서 더 수월하고, 다른 이들에겐 그렇지 못한지, 한 사람이 처한 사회적 맥락이 그가 그리는 회복의 모습을 얼마나 크게 결정짓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섭식장애와 관련한 액티비즘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섭식장애 환자들이 더 나은 치료 선택지를 갖고 한층 수월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접근성을 개선하는 문제, 섭식장애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높이는 일 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특히 ‘섭식장애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만 걸리는 병’이라는 식의 편견 탓에 소외되는 사람들을 대변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섭식장애를 치료하기 위한 정신과적 혹은 심리학적 중재를 받았나요? 전문적 치료를 받았다면, 그에 대한 개인적 경험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내가 낮병원 치료를 받았던 것은 2009년도의 일입니다. 시기를 명확히 말하고 싶은 건, 그때 이후 치료를 받아 본 경험이 없고 그 사이 섭식장애 치료 영역도 많이 변화했을 것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받았던 치료에 대해서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치료 덕분에 목숨을 구한 건 사실이지요. 나는 이상 식이와 운동 강박을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니까요. 치료를 받기 전에는 혼자서 하루 이틀 정도 변화를 시도했다가도 다시 원점으로 복귀하는 식이었어요.
치료를 받은 직후에는 내가 겪은 경험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회복되었다’고 느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때의 그 치료 경험에 대한 내 감정은 몇 가지 이유들로 더 복잡해졌습니다. 일단, 나는 백인 중산층 가정 출신이죠. 비교적 날씬한 체격을 한 젊은 여성이었고요. 그 때문에 치료를 받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사람들이 통상 생각하는 섭식장애 환자의 전형적 모습에 내가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진단 받기도 쉬웠을 테고요. 또 한편, 나는 사회가 ‘건강하다’고 여기는 체격을 회복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치료진들로부터 ‘회복되었다’고 판단될 수 있었습니다.
또 나는 병원의 규칙을 제법 잘 따르는 축에 속했기 때문에 치료가 ‘효과적이었다’고 평가 받았을 겁니다. 치료가 끝나고, 나는 도리어 병원에서 익힌 규칙을 벗어나 스스로 판단하는 일이 당혹스러울 만큼 어렵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규칙들 중엔 내 상황에 맞지 않는 것도 있었다는 것, 그리고 내가 병원 밖 세계로 돌아갔을 때를 대비해 나를 준비시켜 주지 못했다는 것을 차츰 인식하게 됐지요.
낮병원 치료를 거의 마무리하고, 외래 전환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도 있었는데요. 그때 다룬 주제 중 운동에 대한 것도 있었지만, 내 기준으로는 충분히 깊이 있게 다뤄지지 못했다고 기억됩니다. 그런 까닭에 퇴원한 뒤 내 몸에 맞는 운동 방식을 혼자 찾아가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또한 회복은 종종 ‘귀결점’으로 인식되지만, 내 경우에 비추어 보면 삶이 움직이고 변화함에 따라 수없이 재설정되는 것이 바로 ‘회복’이란 개념이었어요. 33살에 내가 겪었던 회복은 20살에 경험한 회복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저를 보살펴 준 섭식장애 치료진들은 모두 선의를 갖고, 자원이 한정된 의료체계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그 치료 체계 자체가 과도하게 엄격한 프로그램에 기반해 있고, 유효한 선택지가 없으며, 그러한 체계의 기저에는 신뢰와 협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비판할 뿐입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섭식장애 치료 시설들이 지리적으로 집중돼 있는 것이 계속 문제가 되고 있죠. 저 역시 불편을 겪었는데, (3개월 대기 끝에)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 가장 가까운 병원이 집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매주 운전해 가서 치료 받고 다시 운전해 돌아와야 했어요.”
-‘섭식장애에서 회복된다’는 것의 의미를 ‘정상 체중과 정상 식습관을 회복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바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셨잖아요. 그 까닭은 무엇인가요?
“체중을 회복하고 영양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이야기를 시작해야겠군요. 내가 비판하는 지점은, 그것이 유일한 기준이 될 때 부딪치게 될 문제들입니다. 또, 그 기준들이 적용되는 방식 자체가 문제적일 때도 있죠. 내 연구가 초점을 맞춰 온 것 중 큰 부분은 섭식과 체격에 관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상성’에 대한 생각을 우리가 더 탐색하고, 거기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는 지점입니다.
많은 경우 ‘정상적’이라는 표현은 마치 모두가 그 의미에 동의하고 있는 양 사용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정상적으로 먹었다’라고 말할 때만 해도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서로 크게 다를 수 있잖아요? 따라서 유념해야 할 것은 ‘누구에게 정상적인가?’ 혹은 ‘누구의 판단에서 정상적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많은 경우 ‘정상적인 식사’는 서구화된, 중산층 가정의 식사 방식을 의미하죠. 그뿐 아니라 매 끼니 식사를 언제 하느냐, 혹은 할 수 있느냐에 관한 다양성조차 고려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정상 체중’ 역시 ‘너무 마른’ 몸과 ‘너무 뚱뚱한’ 몸 사이 어딘가라는, 사실상 매우 좁은 영역을 지칭하는 데 사용됩니다. 여기엔 확실히 우리 사회의 비만공포증(fat phobia)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섭식장애에서의 ‘회복’은 종종 BMI(체질량 지수)의 특정 하한선과 상한선 사이에 놓이는 것으로 규정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해당 BMI 수준보다 원래 체격이 큰 사람들이 있고, 그 체격일 때가 정상이고 건강할 수도 있어요. 그뿐 아니라 회복을 일차적으로 체중과 식습관으로 규정하는 건, 회복의 다른 측면들을 간과하는 셈이 됩니다. 환자의 인간관계, 그가 주위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지, 직업에선 보람을 느끼는지, 즐기는 취미활동은 있는지 같은 삶의 나머지 부분들에 대해선 일러주는 게 없거든요.
한편으로 증상과 체중에만 편협하게 초점을 맞춘 회복 개념은 진정한 회복을 실로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 문제들을 간과하기도 합니다. 가령, 식비를 충당하기 어렵거나 주거가 불안정한 사람은 다른 환자들처럼 착실히 식사를 챙길 수가 없겠죠. 그 같은 상황은 굉장한 심적 부담이 되고, 회복의 다른 측면들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회복 양상은 여느 다른 환자들과는 다르게 구축이 될 겁니다. 본질적으로 회복은 아주 복잡미묘한 것이고, 한 사람의 생활 조건과 경험, 그 이상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섭식장애에서 회복된다는 개념을 좀 더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무언가로 다시 규정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개인적 차원에서, 당신 스스로 ‘섭식장애에서 회복되었다’ 혹은 ‘과거의 나와는 다른 내가 되었다’고 느끼게 한 것은 무엇인가요?
“내가 농담처럼 하는 얘기가 있는데요. 박사 과정일 때 ‘과연 회복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데 그게 마치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는 느낌이었다고요. 인생이 간단한 문제가 아닌 만큼, 회복도 그러니까요!
회복을 정의할 때는 사람들의 서로 다름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이 다름, 이질성은 종종 문제시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질성은 중요하고, 근사하며, 부정하기보다 기꺼이 포용해야 할 무엇이죠. 회복에 대한 기준을 너무 엄격하고 편협하게 잡아 버리면, 어떤 사람들은 그 밖에 날 수밖에 없고, 스스로 경험한 회복은 충분히 좋은 회복이 아니라고 느낄 수 있거든요. 이상적 회복의 모습이 사회에서 칭송되는 신체와 삶의 ‘그림처럼 완벽한’ 형태로 여겨진다면, 우리는 다른 회복을 위한 여지를 남기지 못하게 됩니다. 회복 이후 다시는 힘들어지지 않으리라는 것도 공허한 약속이고요. 실제 삶에선 언제 다시 말썽이 일어나고 그걸 감당하게 될는지 누구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개인적으로 나는 회복이 ‘과거의 나를 되찾는 것’이라는 생각에는 공감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질문해 준 것에 감사할 따름이에요. 나는 지금 정말로 예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니까요! 섭식장애 경험은 분명 내게 영향을 줬습니다. 연구해 보고 싶은 주제를 발견하게 해 줬고, 지금의 직업으로 이끌어 주기도 했죠. 지금까지 수많은 심리치료 세션을 거쳐 온 덕에, 내가 삶의 사건들에 어떤 식으로 대처하는지 그 방식을 솔직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특유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어떻게 하면 잘 유용해 나 자신을 해하는 대신 도울 수 있을까 착안해 볼 수도 있었어요.
회복에 갓 돌입했을 당시에는, 섭식장애와 영원히 이별한다는 식의 언어를 많이 사용했어요. 이제 더이상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나는 탄탄한 회복 여정을 가고 있는 중이지만, 섭식장애와 절연했다기보다는 설령 상황이 다시 안 좋아진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 나 스스로에게 정직할 수 있다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지난 몇 해는 내게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고, 수 차례 불안발작에도 시달렸어요. 회복 중에 있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나를 돌보는 방향으로 헤쳐나가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이해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전문가들 중에서 일부는 회복을 그렇게 느슨하게 정의할 경우, 환자들의 변화 동기를 촉발하지 못할 것이라 염려할 텐데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내 생각은 정반대입니다. 스스로에게 깊이 공명하는 회복에 대한 정의, 혹은 회복의 목표를 마주하면 한층 더 치료 동기가 강해지지 않을까요? 회복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일은 건강한 삶을 이루기 위한 열쇠라 생각합니다.
회복을 한층 광범위하게 해석하고 치료적 접근 방식에 빡빡하지 않은 여지를 둔다는 것에 대해, 종종 사람들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방식이라고 잘못 이해하곤 합니다. 내가 주창하는 방식은 그게 아니에요. 좀 더 열린 자세로 회복에 대해 논한다는 건, 우리가 언제나 스스로에게 최선이 될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유념한다는 걸 뜻해요. 회복에 대해 진실되고 정직하게 같이 논할 수 있다면, 바로 그 같은 우리의 약점을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됩니다. 그때 회복의 지난한 과정을 어떻게 뚫고 나갈지를 함께 고민하는 게 가능해지죠.
회복을 포용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편안하고 쉬운 여정만 추구한다든가,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회복만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니에요. 회복을 '실천'한다는 건 사실상 우리 스스로에게 도전하는 일이니까요. 우리가 자신에게 최선의 길을 택하는 데 실패하고 있을 때, 솔직한 염려를 털어놓고 진심으로 지지해 줄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을 거예요. 회복의 정의를 확장한다는 건 ‘파편적 회복에 만족한다’는 게 절대 아니라, 그 반대지요. 지금까지 얘기되어 온 회복 그 이상을 전망하는 일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연재 끝)
[필자 소개] 박지니. 1980년생. 생업을 하며 틈틈이 읽고 쓰고 번역한다. 거식증 회고록 『삼키기 연습』을 출간했다. 뜻하지 않게 ‘잠수함토끼콜렉티브’라는 소모임을 결성하고, 국내 첫 회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기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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