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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okeesalon.org)은 모든 나이듦이 존엄한 사회, 다양한 나이대가 호혜적으로 연대하는 사회를 꿈꾸는 페미니스트 연구소입니다. 지난 3년간 옥희살롱 연구활동가들이 노인요양시설 안팎의 돌봄에 대해 고민해온 바를 시민들과 나누려 합니다. 이를 통해 ‘정의로운 돌봄사회로의 전환’에 대한 페미니스트 사유 지평을 넓히며, 변화의 지향점을 좀 더 구체화해나갈 수 있는 토론의 장이 열리길 기대합니다.
모두가 돌봄을 논하는 시대, 돌봄의 가장자리에 있는
격세지감이라고 해야 할 만큼,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돌봄에 대한 논의는 폭증했다. 언론에 기획 기사가 더 자주 등장하고, 학문 분야마다 ‘돌봄’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고, 돌봄을 다루는 출판물이 쏟아지고, 시민사회 곳곳에서 돌봄에 대해 다루는 강좌와 토론회가 열린다. 대통령 후보 시절 공약에서부터 온통 ‘스마트’와 ‘기술’만 논하더니 급기야 돌봄 예산을 마구 깎아버리고 있는 현 정부만 빼고, 모든 곳에서 돌봄의 중요성과 돌봄 사회로의 전환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런 담론장의 빠른 변화 와중에도, 노인요양시설에서의 ‘삶’, 그리고 그 삶을 지탱하는 돌봄에 대한 논의가 같은 속도로 깊어지거나 넓어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현실’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가. 그 앎은 누구의 자리에서 구축된 앎인가.
옥희살롱 연구활동가들이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의 〈감염병 시대의 인권〉 연구조사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때, 인터뷰했던 한 노인요양시설 원장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사실 코로나19 이전에도 독감이 돌거나 하면 장기간 면회를 완전히 금지하는 조치는 흔히 해 왔다’는 이야기. 우리는, 마치 말하는 사람조차 누설한 줄 모르는 비밀을 들어버린 기분이었다. 코로나19 이전에도 노인요양시설은 이미 혹은 자주 ‘격리’되어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노인요양시설에서의 거주를 ‘이미’ 격리로, 심지어는 감금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강도가 심할 뿐인데, 코호트/예방적 코호트격리가 뭐 그리 문제가 되랴, 문제가 된다면 그건 종사자들에게 해당되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이번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다시 질문할 필요가 있다. 만일 노인요양시설에서의 거주가 실제로 ‘이미’ (원하지 않지만 겪을 수밖에 없는) 격리의 내용과 형태를 띠고 있다면 그 이유를 밝히고, 해결책을 찾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옥희살롱 연구팀, 김영옥 발표, “노인요양시설 코호트/예방적 코호트격리 조사”, 〈감염병 시기의 인권〉 온라인 토론회 자료집 (2020년 9월 9일), 국가인권위원회, 128쪽.
아무도 가고 싶어 하지 않고 이미 간 사람들은 말이 없는 곳. 코로나19 첫해였던 2020년 내내, 노인요양시설은 너무나 쉽게, 아무런 의문 없이 ‘코호트격리/ 예방적 코호트격리’의 대상이 되었다. 코호트격리에 대한 당사자와 인권운동계의 비판이 컸던 장애인시설과는 달리, 노인요양시설의 경우 ‘노년 당사자’의 목소리는 전혀 없었고, 돌봄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조직되기까지는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렸으며, 무엇보다 ‘격리는 부당하다’는 입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쉬움, 그 의문 없음, 그 목소리 없음에 대해 생각한다. 격리조치 전부터 이미 격리를 받아들이고 있는 듯한 그 조용함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인지장애가 생기고 거동이 불편해졌을 때 가게 될 마지막 장소. 내가 도저히 더 이상 돌볼 수 없을 때 가족을 보내게 될 마지막 장소. 노인요양시설은 모든 이들에게 일종의 ‘최후의 도착지’로 여겨진다. 말하자면 노인요양시설은 심리적으로, 그리고 인식론적으로도, 돌봄의 맨 끝 가장자리에 있다. 노인요양시설에 입소하여 살아가는 노년당사자의 목소리는 ‘없다’. 노인요양시설에 대한 앎은 여전히 “너무나 두루뭉술해서 ‘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연재칼럼 1편 참조 https://ildaro.com/9579)
어떤 ‘포기’의 마음과 함께 다다르는 그곳에 대해, 아직 ‘포기’하지 않은 우리는 알고 싶지 않거나 알기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대안’을 만들 수는 없다. 그러므로 새로운 앎, ‘다른’ 앎은 우리가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모름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에 조금 더 오래 머물러야 한다.
요양보호사들의 이야기를 묻고, 듣고, 해석한다는 것
노인요양시설에서의 삶과 돌봄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 요양보호사들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것은 필수적이기도 하고, 필연적이기도 하다. 요양시설에 입소한 노년의 돌봄의존자들 당사자의 목소리는 아직 들을 수 없고(이것은 하나의 논의 주제다), 요양시설에 가족을 ‘맡긴’ ‘보호자’들은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렇다.(이것 역시 또 다른 논의 주제다.) 적어도 지금, 노인요양시설에서의 삶이 어떤지, 돌봄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가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많은 배움은 요양보호사들의 경험에서 온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는 요양보호사들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익숙한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두 가지 플롯이 두드러진다. 하나는 요양보호사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고발하고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누구도 하기 힘든 일을 도맡아 해내는 ‘대단하고 고마운 존재’라는 찬사. 그래서 노인요양시설에서의 돌봄은 ‘집회 구호’와 ‘르포 기사’를 통해 인지되거나, 아니면 ‘감동 수기’를 통해 짧게 회자된 후 심드렁하게 잊혀진다.
“사람들은 또 한 번 익숙한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재난을 이해하느라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리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 정해영 옮김, 펜타그램, 387쪽.
페미니스트 저술가 리베카 솔닛은 100년간 북미 지역에서 일어난 재난들에 대해 탐구하면서, 재난이 닥치면 사람들은 이기적으로 돌변하고 약탈과 파괴 등 무질서한 상황이 만들어지기 마련이라는 식의 ‘익숙한 이야기’를 반박한다.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돕고 돌보며 (한시적이지만) 일종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재난으로부터 사회 변화를 위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 우리에겐 우선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돌봄은 ‘위기’가 아닌 적이 없었고, 노인요양시설은 코로나 이전에도 ‘재난’적이었다. 15년간 어떤 비명과 아우성에도 변치 않았던 돌봄노동자 인력배치 기준은, 현실에서는 밤 동안 1명의 요양보호사가 30명 가까운 노년을 돌봐야 하는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오늘 밤에도, 어떻게든 애를 쓰며 노년들의 안전하고 평화로운 밤잠을 위해 분투하는 요양보호사들이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열악한 조건에서도 오늘의 돌봄을 해내는 요양보호사들의 역량과 애씀이, 그 ‘열악한 조건’을 변화시키지 않아도 되는 알리바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열악한 조건’을 비판하며 처우개선과 인력배치 기준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봄을 해내고 있는’ 요양보호사들의 역량/실천/해석을 침묵시키는 효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이야기는 서로를 상쇄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이야기들의 이면과 주변에 있는 더 많은 이야기들을 ‘다르게’ 들을 수 있는 사유와 토론의 공간이 필요하다.
상충하는 이야기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021년 봄꽃이 질 때부터 가을이 시작될 무렵까지, 옥희살롱 연구팀이 만난 요양보호사들의 이야기는 알지만 몰랐던 이야기였고, 들은 적 있지만 해석이 필요한 이야기였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들이다.
야간에는 혼자서 20~30명을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 낙상사고가 나면 “초능력이 없는 게 한”이라며 인력배치 기준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오감이 다 열려 있으니까” 어느 방의 누가 지금 호흡이 가쁘다는 것을 몸으로 안다는 이야기. 요양보호사의 일과가 얼마나 눈코 뜰 새 없이 고된지 성토한 다음, 쉬는 날에는 요양보호사들끼리 자원활동모임을 만들어서 다른 시설에 자원활동하러 간다는 이야기. 인지장애(‘치매’)로 인해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분 때문에 괴로운 마음과, 그분이 상태가 나빠져 더 이상 폭언도 폭행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눈물 나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들.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문제’들이, 구체적인 얼굴과 살아있는 (때로는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다시 다가왔다. 이것은 요약되지 않고, 요약해서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다.
선명하게 대비되는 탓에 오래 곱씹게 되는 이야기들도 있다.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와 정말 보람을 느낀다는 이야기, 요양시설은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와 ‘지옥’이라는 이야기, ‘이렇게 좋은 곳이 없다’는 이야기와 ‘이런 곳에 나도 오게 될까 봐 두렵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 그렇다.
“나는 여기가 적성이 맞나봐. (...) 어르신들 케어하는 자체, 케어할 때 그렇게 좋더라고 그냥. 그리고 퇴근할 때는 뿌듯~하고. (...) 그냥 어르신들 이렇게 만나는 자체가, 너무 좋아! (웃음)” “어르신들을 정을 깊게 안 줘요. 똑같이, 일률적으로 똑같이.” “한번 여기서 나가면 안 들어와 다시. 너무 이게 힘드니까. (...) 그러던데 뭐, ‘어르신들은 천국이고 요양보호사들은 완전 지옥’이라고.” - 민간요양시설에서 일하는 7년차 요양보호사의 이야기 (2021 옥희살롱 연구프로젝트 심층면접 녹취록 중)
‘나는 여기가 적성에 맞’지만 ‘여기는 요양보호사들에게는 지옥’이고, ‘어르신들 만나는 것 자체가 너무 좋’지만 ‘정을 깊게 안 준다’. 모두 한 사람이 말했지만 상충되는 듯 보이는 이 이야기들을, 어떻게 들어야 할까. 그 행간과 이면에는 저숙련 육체노동이라는 통념과 달리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는 돌봄의 속성이 있고, 돌보는 사람과 돌봄 받는 사람 사이에 엄존하는 긴장이 있고, 저마다 다른 여러 타인들을 동시에 돌봐야 하는 직업적 돌봄노동을 지속가능하기 어렵게 하는 제도적 조건이 있다.
이 이야기들을 또다시 ‘돌봄노동자의 헌신성에 대한 찬사’나 ‘돌봄노동자에 대한 열악한 처우’라는 익숙한 이야기로 환원하지 않으려면 (그래서 ‘이미 다 아는 얘기’로 착각하지 않으려면), 이야기들의 행간, 이면, 배경을 함께 사유할 수 있는 사회적 문해력(literacy)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들이 무엇을, 왜 생략하는지 알고자 하는 노력, 요양보호사들의 이야기를 ‘다르게’ 들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에 각자의 경험을 더 많이 연결시키고, 함께 더 크고 두꺼운 지도를 그려가야 한다.
돌봄은 깔끔하지 않고, 깔끔할 수 없다. 돌봄은 노동이자 동시에 윤리이고, 목욕물을 끼얹는 손길부터 법과 정책까지 여러 차원에 걸쳐있으며, ‘그 사람’의 고유함을 마주해야 하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의 취약함을 인식해야 하는 문제이기에 그렇다. 지금 여기의 노년돌봄 현실은 복잡하게 척박하고, ‘정의로운 돌봄 사회’라는 지향은 분명하지만 아주 멀리 있다. 그 사이를 메우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건,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 ‘다른 앎’을 함께 만들어가는 동안 비로소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한다.
[필자 소개] 전희경.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연구활동가. 공저로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2020)와 『코로나시대의 페미니즘』(2020), 『페미니스트 모먼트』(2017) 등이 있다. junhk101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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