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에 대해 우리가 갖는 ‘두려움’

〈책방에서 밑줄 긋기〉 비벡 슈라야 『나는 남자들이 두렵다』

달리 | 기사입력 2023/04/29 [12:03]

성별에 대해 우리가 갖는 ‘두려움’

〈책방에서 밑줄 긋기〉 비벡 슈라야 『나는 남자들이 두렵다』

달리 | 입력 : 2023/04/29 [12:03]

[연재 소개] 여성들의 말과 글이 세상에 더 많이 퍼지고 새겨져야 한다고 믿으며, 서점에서 퍼뜨리고 싶은 여자들의 책을 고른다. ‘살롱드마고’의 신간 책장에서 마음에 새겨지는 책을 한 권씩 밑줄 그으며 꼭꼭 씹어 독자들과 맛있게 나누고자 한다.

 

‘두려움’과 남성성

 

“제겐 사는 게 공포인 걸요.” (비벡 슈라야 『나는 남자들이 두렵다』 22쪽)

 

늦은 밤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다. 대형 트럭 몇 대만 서 있을 뿐 인적이 전혀 없는 휴게소는 낮 시간과 다르게 을씨년스러웠다. 화장실 앞까지 갔던 난 주저하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어느 밤 남성 지인과 차를 타고 고속도로 휴게소를 지나다 그날이 떠올랐다. 화장실에 못 갔던 이야기를 하며 나는 지인에게 너도 그런 경험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살면서 밤에 공중화장실에 가는 것을 무서워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씁쓸히 “우린 같은 세상에 서 전혀 다르게 사는 것 같네”라 말했다. 그는 마음이 쓰였는지 호신용품을 사줄까, 했다. 나는 그것으로는 이 두려움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두려움에 대해 말하는 것이 두렵다. 여성으로서 두렵다고 말하면 반응은 대부분 둘 중 하나였다. 조심하라는 걱정, 또는 남성을 가해자로 보냐는 분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입을 다물게 만드는 태도들.

 

반대로, 여자가 혼자 여행을 하거나 자취를 한다고 하면 “여자애가, 겁도 없이”라는 말이 대번에 돌아왔다. 세상은 내가 두려움과 한 몸이 되도록 평생 그것을 심어주면서, 정작 “두렵다”고 말하면 수용해주지 않았다. 두려움은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상태로 일상에 뿌리내려 나의 주체성을 잠식한다. 이것은 나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 캐나다의 예술가 비벡 슈라야(Vivek Shraya)가 쓴 『나는 남자들이 두렵다』(현아율 옮김, 오월의 봄, 2023) 앞뒤 표지. 이 책은 ‘두려움’을 화두로 남성성과 젠더 이분법에 대한 성찰을 촉발한다.  ©달리

 

“이 두려움은 하루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내가 내리는 수많은 선택을 지배한다.” (14쪽)

 

캐나다의 예술가이자 유색인이며, 트랜스 여성인 비벡 슈라야는 성별이분법 체제에 ‘비순응자’인 자신을 ‘비정상’이라 낙인찍는 세상에서 ‘두려움’의 감정을 반복해 경험하였다. 에세이 『나는 남자들이 두렵다』는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도발적’인 제목 다음에 생략된 문장이 뒤표지에 적혀있다. “그리고 남자들은 나를 두려워한다.” 물론 서로가 느끼는 두려움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남성들이 가진 두려움

 

나는 성평등 교육과 활동을 하며, 젠더를 둘러싸고 남성들이 가진 두려움에 대해 여러 번 들었다. 가장 익숙하게 듣는 첫 번째 이야기는 “가해자로 오인받을까 봐 두렵다”는 것이다. ‘오인’은 “상대가 잘못 알고 있음”을 전제한다. 그러니까 (성)폭력에 대한 피해자의 판단을 신뢰할 수 없고, “나는 결백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피해자가 되어 목숨이나 건강, 존엄, 혹은 그 모두를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과, 가해자로 ‘오해’ 받을까 봐 두려운 마음을 등치시킬 수 있을까. 학교폭력이나 직장 ‘갑질’ 행위가 이슈화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피해자의 입장에 이입해 분노하는데, 왜 성차별이나 성폭력과 같은 젠더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가해자의 위치와 일치시켜 바라볼까.

 

어느 남자고등학교에서 성폭력 예방교육을 했을 때, 담당교사가 마무리 멘트로 학생들에게 “학교와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킬 일을 만들지 말라” 경고한 적이 있다. 성폭력 ‘예방’은 피해자의 인권이 아닌 가해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것인가. 성폭력 사건에 ‘명예’를 걱정하기 시작하면, 피해자가 아닌 다른 이들의 ‘안위’만 중시하게 된다. 피해자가 잃게 되는 것이 보이지 않고, 내가 잃을 수도 있는 것에 마음이 더 기운다. 우리가 인권교육을 하는 이유는,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피해자 입장에서 생각하고 피해자를 지지하는 태도를 배우기 위해서이다. 나는 다음 세대의 남성들에게 더 좋은 방향의 교육을 전하고 싶다.

 

“좋은 남자라는 말은 실제로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타인에게 두려움을 자아내지 않는 남성성의 형식들을 어떻게 다시 상상해야 하는가?” (24쪽)

 

남성들에게 들은 두려움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는 자신과 같은 남성 집단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남성성이 강하지 않다는 이유로 괴롭힘 당하거나 폭력의 대상이 된 경험,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것이 자신과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던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마음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어 외로웠던 삶에 대해서 말이다. ‘약함’은 곧 여성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남성으로서의 수치로 여겨지기 때문에, 어느 순간 자신에게 폭력을 가했던 남성들과 닮은 얼굴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 유색인 트랜스 여성으로 경험해온 삶과 세계를 작품에 투영하는 캐나다의 예술가 비벡 슈라야(Vivek Shraya). 책 『나는 남자들이 두렵다』를 통해 여성에게 위협이 되고 남성에게 족쇄가 되는 ‘남성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함께 사유하여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자고 제안한다. (오월의봄 제공)

 

비벡 슈라야의 경우, 남성으로서의 자신과 어긋나거나 융화되지 못함을 느꼈다. 여성성을 증폭하는 마른 몸은 게이문화 안에서도 이성애자 남성들 사이에서도 배제되기에, 근육질의 몸을 만들기 위해 애써야 했다. 남성으로서 “너무 많은 걸 느끼는 것은 잘못”이기에, “약점을 드러내지 않는 로봇 같은 존재가 되기를 갈망했다.” 젠더 고정관념이 강한 문화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외모와 성향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폭력과 혐오를 경험한 그는 둘 중 한 성별을 택한다고 해서 완전히 안전해지거나, 온전히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혐오와 폭력은 슈라야가 ‘남성’일 때도, ‘여성’일 때도 일어났다.

 

“불행히도 모호함과 비순응성은, 특히 그것이 성별과 관련돼 있을 경우에는 더더욱 공포를 자아낸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남자들은 나를 두려워하고, 여자들도 나를 두려워한다.” (101쪽)

 

그가 엄마의 청자켓을 입고 학교에 간 날 그의 등에 침을 뱉은 소년, 그리고 그걸 보며 옆에서 낄낄거린 소녀의 이야기는 사실 우리 역시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보고 겪어온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많은 성소수자 청소년들이 학교폭력의 피해를 입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러한 경험은 당사자에게는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고, 나머지 구성원들도 젠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경고를 받게 된다. “네가 타액을 담아 보낸 투명한 메시지는 그렇게 내게 얼룩을 남긴다.”

 

“온전히 내 것인 적이 없던 몸을 나는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44쪽)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오래 전 MBTI 워크숍에서 성격유형검사를 해봤다. 검사를 몇 번을 해도 E(외향형)와 I(내향형)의 점수가 똑같거나 아슬아슬한 1점 차로 나와, 16개의 유형 중 하나에 딱 들어맞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무엇’으로 소개할지 고민되었는데, 검사 결과를 떠나 스스로를 들여다봐도 어떤 때에는 무척 사교적인 한편, 어떤 때에는 고요하고 외부와 단절된 것을 편안해하는 사람이었다. 무엇 ‘하나’로 나를 정의할 수 없다는 사실은 조금 혼란스럽고 답답하면서도 어쩌면 당연해 보였다.

 

그러다 얼마 전 다시 해본 MBTI 검사에서 ‘완전 I’라는 결과를 받았다. 나이가 들면 성격도 변하는 것일까? 이것이 원래 나의 본질적 성향인데 늦게야 발견된 것일까? 내 성향을 상담하다 ‘내향적 리더십’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리더십이라 하면 보통 앞에 나서고 통솔하는 것을 떠올리는데, 나의 경우엔 사람들에게 판을 깔아주고 활동을 독려하되 뒤로 물러나 서포트하는 역할을 선호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둘 중 하나로만 딱 떨어지는 구조에서 조금 비껴난 자리에 나의 길을 찾은 것만 같았다. 두 가지 성향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섞여 또 다른 ‘고유함’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나라는 사람을 하나로 정의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의미인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또 여러 얼굴을 가진 나 자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었다. 이분법이라는 틀이 다양하고 복잡한 정체성으로 이루어진 우리 자신을 과연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MBTI보다 훨씬 ‘신봉’되는 성별이분법이 ‘정상’이나 ‘과학’으로 통용되는 이 사회에서, 하나의 성별에 자신을 완전히 끼워 맞출 수 없는 사람에게 ‘나다운’ 삶이 가능할까. 마치 ‘내향적 리더십’처럼, 대립항으로 보이는 두 성별이 섞였거나 교집합을 이루는 경우- 우리는 그것을 왜 잘못되었다고 보는가?

 

언젠가 젠더에 관한 책을 읽다가 “성(별)은 이분법이 아니라 스펙트럼”이라는 문구를 발견하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나를 여자에 끼워 맞추지 않고 살 수 있었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하고. 어쩌면, 덜 두려워하고 더 강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당신의 두려움은 나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도 아픔을 준다. 그 두려움은 어떤 존재라도 될 수 있는 당신의 잠재력을 제한한다.” (101쪽)

 

“무엇이 여성적이고 무엇이 남성적이라는 사고방식을 스스로에게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101쪽)

 

[필자 소개] 달리. 전북 남원에 있는 지역서점이자 페미니즘 문화공간 ‘살롱드마고’의 공동운영자이며 에세이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2021)의 작가이다. ‘고요한 해방, 나의 목소리를 찾는 글쓰기 여행’, ‘삶의 빈 칸을 채우는 글쓰기’ 등 여성들과의 글쓰기 활동을 기획,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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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냐 2023/04/30 [10:45] 수정 | 삭제
  • 중, 고등학교때까지 성정체성 때문에 또래들보다 고민이 많았던 한 사람으로써 공감이 큽니다.
  • 밀레 2023/04/29 [20:31] 수정 | 삭제
  • 그냥 너무 슬프다.. 난 남자로 태어나지도 않았고 트랜스젠더도 아니지만 그 두려움 조금은 알 것 같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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