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명문여고에 다녔던 ‘제국의 소녀들’

『제국의 소녀들-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생의 식민지 경험』을 읽다

윤일희 | 기사입력 2023/06/16 [10:57]

식민지 명문여고에 다녔던 ‘제국의 소녀들’

『제국의 소녀들-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생의 식민지 경험』을 읽다

윤일희 | 입력 : 2023/06/16 [10:57]

일제강점기,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면서 내지인들을 조선으로 이주시켰다. 가족 단위의 이주가 많았는데 정점이었던 1942년에 75만이 넘었다. 당시 2천만이었던 조선 인구를 감안하면 적지 않은 일본인이 조선에서 살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부모와 함께 이주했거나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 소녀들이 다니던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이하 제일고녀)가 있었다. 제일고녀는 1906년 경성부인회의 부속학교로 시작해, 1908년 “경성부인계의 꽃이 될 ‘양처현모’의 후보자”들을 양성한다는 기치를 걸고 경성 거류민회 고등여학교로 거듭난다. 1945년 10월 문을 닫을 때까지 6,065명이 졸업했다.

 

▲ 『제국의 소녀들 -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생의 식민지 경험』(히로세 레이코 지음, 서재길 옮김, 소명출판, 2023)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나고 자란 재한일본인들의 식민자 경험을 다룬 책이다.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가 있었던 자리(덕수궁 돌담길)에서 찍은 사진. (출처: 소명출판 페이스북 페이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여성의 역할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히로세 레이코(広瀬玲子, 홋카이도정보대학 명예교수)는 제일고녀에 다녔던 이들의 경험을 『제국의 소녀들』에 기록했다. 그는 “지배 역사가 끝나도 일본인의 식민자로서의 정신사는 끝나지 않는다”는 ‘식민지 책임’ 의식으로 식민자 생활을 밝힐 필요를 느꼈다. “식민자로 식민지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식민지 지배의 뒷받침”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2009년부터 2011까지 16명의 졸업생을 인터뷰했다. 그는 이들의 인터뷰를 통해 개인사와 역사의 접점에서 ‘일상화된 체제로서의 식민주의’를 조망하고자 했다. 제일고녀 여학생들은 자신의 특권적 상황이나 식민지 유지 및 안정에 조력한 역할을 자각하지 못한 채 패전을 맞았다. 그렇다면 이후 6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들은 어떤 성찰로 “내면화된 식민주의를 극복하거나 해체하려” 노력했을까.

 

“식민지(조선)는 천국이었다”

 

인터뷰에 응한 제일고녀 졸업생들은 조선에 살던 시절을 한결같이 “식민지(조선)는 천국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들의 부모 대부분 조선에서 안정적 일자리를 가진 신분이었기에, 크고 좋은 집에서 풍족히 살았다. 대부분 낮은 임금의 조선 여자나 어린 여자아이를 ‘식모’로 고용해 생활했다. 나이 든 여자의 경우 ‘오모니’, 어린 여자아이의 경우 ‘기지배’로 불렸는데, 이름도 직함도 없는 호칭은 식민자가 피식민자를 타자화한 흔적이다.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는 치열한 입시를 뚫고 들어가야 하는 조선 제일의 엘리트 여학교였다. 명문여고로서 학생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음악회나 운동회를 열고, 소풍은 물론 고학년의 경우 일본 내지로 수학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부러울 게 없는 학창 생활을 보냈다. 조회, 운동회, 소풍, 수학여행 등이 우리가 학교 다니며 거쳤던 학과 과정과 매우 유사해, 일제 식민지 영향이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 교육을 지배했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들의 낙원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세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빛을 잃기 시작한다. 교육 목표에 여학생의 전쟁협력, 필승, 충성 등이 강조되면서, 소풍에 행군이 포함되고, 수학여행 대신 부여 신궁으로 근로봉사를 나갔다. 교육과정에 재봉은 물론 양잠 실습까지 부가되고, 중등 이상에선 학도근로보국대가 결성되었다. 1960-1970년대 고등학교에 다녔던 독자들이라면 학도호국단이 연상될 것이다. 당시 교련 과목이 있어서 여학생들은 전시 환자를 돌보는 훈련을, 남학생들은 모형 총을 들고 군사훈련을 받았다. 일제 식민의 뿌리 깊은 잔재였다.

 

1941년 이후 일제가 총력전 체제에 들어가면서 제일고녀도 급격히 변했다. ‘여학생을 간호부로’라는 기치 아래 지원 압박이 거세지자, 어쩔 수 없이 지원하는 여학생들이 생겼다. 여학생들은 상시로 운모 깍기, 말똥 운반, 건빵이나 캐러멜 공장 등의 근로봉사와, 출정 병사 배웅하기, 위문편지 쓰기, 전사자 유골 맞이 등에 동원되었다. 1942년부터는 교복이 금지되고 ‘오버올 몸빼’를 착용하게 된다. 학생도 군국주의 앞에선 전쟁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으며 여학생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여학생은 보국뿐 아니라 미래 가정주부라는 이중의 책무를 부여받았다.

 

패전 이후에야 보이기 시작한 조선인의 존재

 

전시 체제 돌입으로 조선 최고 여학교라는 영광이 희미해지던 차 패전을 맞는다. 바로 인양(식민지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시작되면서, 이들에게 비로소 조선인이 보이기 시작한다. 흰옷(조선인의 상징으로 각인하고 있었다) 입은 조선인들이 도처에 나타나고, 들을 수 없던 조선어가 웅성대기 시작했다. 한 인터뷰이가 일본어를 쓰던 급우가 패전 후 조선어를 유창하게 쓰는 걸 보고서야 조선인인 걸 알았다고 얘기한 것처럼, 소거됐던 조선(인)이 패전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조선인을 처음으로 타인으로 인식했던 순간이었고, 비로소 자신들이 식민자였음을 자각했던 계기였다.

 

부러울 것 없이 살던 식민자들에게 인양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낙원이 사라진 디스토피아에서 유일한 목표는 생존해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미군의 엄중한 보호로 인양이 이루어졌지만, 그제서야 보이기 시작한 조선인들에게 위협을 느꼈다. 평소에 보이지도 않던 이들을 두려워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이들에게 “패전은 시작이었다.”

 

일본으로 귀향한 이들을 맞은 것은 생각지도 못한 냉대와 멸시 그리고 차별이었다. 바로 자신들이 조선인들에게 가했던 차별을 일본에 돌아와 내지인들에게 받은 셈이었다. 어렵게 도착한 부두에 나붙은 “침략자인 너희들이 돌아와서 우리가 굶주린다”는 표어는 인양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며 깊은 상흔을 남긴다.

 

준비 없이 돌아온 인양인들이 안정된 삶을 이어가기는 어려웠다. 더부살이와 눈칫밥을 먹으며 “인양자인 주제에 고생해도 싸다”는 냉대를 당했다. 인양 여학생들은 “대륙(조선) 태생은 다르다”거나 “가정주부로는 부적절하다”는 상시적 폄하를 겪었다. 일상의 소외와 차별을 겪으면서 인양인들 사이에선 “일본인이면서 ‘재일 일본인’”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러한 감각은 온전한 일본인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이등 국민으로서 갖는 열등감이지만, 조선인을 멸시한 억압자로서의 자신들을 비추게 한 인식의 기제가 되기도 하였다.

 

식민자의 추억과 남겨진 질문

 

일본 패전 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노인이 되어 한국을 바라보는 인터뷰어들의 심정은 각각 결이 달랐다. 미안한 마음 때문에 한국 방문을 꺼리는 이도 있었지만, 여전히 그때 그 낙원을 보고싶어하는 이도 있었다. 대부분 조선인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 안의 식민자성을 구조적으로 성찰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졌는지 여부에는 상당한 격차가 있었다.

 

식민자로서의 위치를 통감한 한 인터뷰어는 자신의 경험을 계속해서 증언하고 기록하는 가운데, 일제의 전쟁과오를 성찰하고 자신의 식민자성을 갱신해가고 있었다. 또 한 인터뷰어는 “일본이 한 일은 나쁘지만, 그렇다고 선의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며 식민 지배와 개인의 책임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가 던진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다. 일본 총리가 한국 대통령과 조선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공동 참배했다고 해서, 일제의 전쟁과오를 일본 사회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믿기는 어렵기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물론 “선의를 가진” 일본인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것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제일고녀 출신의 각성한 인터뷰어들, 일본군 ‘위안부’나 징용 피해자를 지지하는 일본인 모임, 그리고 자이니치와 공생을 외치는 일부 일본인들의 탈식민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하지만 지배와 착취의 구조와 역사는 “선의”가 아니라 ‘정의’와 ‘책임’에서 출발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제국의 소녀들』은 한국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어떤 역사적 성찰을 하고 있을까. 식민 통치가 이루어진 36년간 온전히 피해자이기만 한 조선인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일본 여학교를 다니며 일본인으로 통용되다 해방을 맞은 조선인 여학생들은 ‘8.15’를 해방으로 인식했을까. 교실에서 일본인 학생으로 여겨지고 교실 밖에서 일본인처럼 살았던 조선인들은 식민 지배의 피해자이기만 한 걸까? 이같은 질문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성찰 없이 일제 식민 역사를 단지 ‘매국노’만의 국치로 상쇄하려는 것은 너무나 손쉽고 진전이 없다. 패전 후 일본인은 떠났다. 떠난 이와 이별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조선인의 ‘식민의 추억’일지 모른다. 어쩌면 그 추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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