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사건을 상담, 지원하는 현장 단체들은 꾸준하게 성폭력의 판단기준을 ‘폭행과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바꾸는 법 개정과 사회 인식의 변화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성폭력 운동을 하는 단체들의 경험과 목소리를 토대로 현행법 상 드러나는 쟁점과 문제, 개정의 필요성을 담아 총 7회에 걸쳐 릴레이 칼럼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가해자와 술을 마셨는데 어느 순간 기억을 잃었어요.” “평소 주량보다 적게 마셨는데 기억이 없고, 평상시와 다르게 구토가 심하고 꿈꾸는 듯한 상태가 계속되어 약물을 탔는지 의심스러워요.”
상담 및 지원 현장에서 만나는 준강간 사건 피해자들은 대개 피해 당시를 자신이 기억할 수 없고, 대응할 수 없는 상태였음을 호소하곤 한다.
피해 사실에 대해선, 피해 전·후의 상황, 목격자의 증언, 사건 발생 시간대의 전화 및 문자 기록 같은 증거, 가해자와의 관계 등을 통해 맥락적으로 준강간 피해가 있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평소 자신의 행동 패턴과 비교하였을 때와 전혀 다른 행동과 상황을 통해, 자신이 동의나 거절의 의사 표현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성폭력 피해를 겪었다는 것을 인지한다.
강간죄와 준강간죄의 차이점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가 어떤 상태에서, 누구로부터 피해를 입었는지에 따라 적용하는 법이 다르다. ‘폭행, 협박’을 구성요건으로 하는 강간죄와 달리, 준강간죄는 피해자가 1)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는지 여부와 2)가해자가 피해자의 이러한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하였는지, 이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따라서 위의 예시처럼 피해자가 깊은 잠에 빠졌거나 술이나 약물에 취한 상태에서 피해를 입는 경우가 준강간에 해당된다.
그러나 준강간 사건 피해자를 상담하거나 지원하다 보면, 가해자가 기소조차 되지 않거나 기소가 되었더라도 무죄 판결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심신상실 혹은 항거불능 상태에서 겪은 성폭력 피해가 어떠한 이유로 불기소 혹은 무죄가 나는지, 그 원인은 무엇일까.
심신상실 및 항거불능의 상태는 피해자의 기억 소실 및 피해 호소만으로는 입증할 수 없다. 때문에 법적 절차 진행 과정에서는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하는 것과, 그 증거를 어떠한 관점으로 해석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심신상실, 항거불능’을 증명하라고?
피해자의 심신상실 및 항거불능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물적 증거라면 CCTV이다. 그러나 CCTV는 경찰 신고 이후에야 확보할 수 있으며, 신고 여부를 고민하다가 뒤늦게 신고를 하면 보관 기간 경과로 확보조차 어려운 경우가 많다. 혹여 CCTV 영상을 확보했더라도 그 영상을 어떠한 관점으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판단의 결과가 달라진다.
그래서 많은 가해자들은 ‘(피해자가)만취인 줄 몰랐다’. ‘피해자가 의식이 있는 줄 알았다’라고 하는데, 특히 피해자가 타인의 부축 없이 걷거나 서는 등의 모습이 보일 때이다.
수사기관 또한 ”범행 당시 의식상실 상태가 아니었고 그 이후에 기억하지 못하는 장애가 있는 것”이라며 블랙아웃이라고 판단하거나, “가해자가 정상적인 성관계 혹은 동의한 것이라 오인 착각할 수 있었다”고 해석하여 처벌되지 않는다. 대법원 판례에 의하면, 알콜 블랙아웃과 패싱아웃을 구별하여 술에 취해 수면상태에 빠지는 등 의식을 상실한 상태인 패싱아웃의 경우에 심신상실 상태로 판단하여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판단 혹은 의사형성 능력이나 대응 능력이 현저하게 저하된 상태라도 무의식적 반응이 있으면 블랙아웃으로 쉽게 판단하곤 한다.
또한 피해자가 만취 상태로 업혀가거나 끌려가는 것이 CCTV로 확인이 되면 가해자들은 “만취 이전에 동의를 받았다”, “이미 스킨십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성관계까지 나아간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수사기관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사전에 성관계에 동의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가해자 진술에 근거한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수사 및 법적 과정에서 성폭력에 대한 편견과 통념 드러나
2020년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회원단체를 대상으로 2019년 1월~12월까지 지원한 준강간 사건에 대한 사례 조사를 실시했다. 총 67개소 성폭력상담소에서 음주 상태 등을 이용한 피해자 760명의 법적 결과에 대해 응답하였다.
준강간 사건 760명 중 고소 신고한 피해자 수는 511명(67%)이며, 기소된 사건은 229명(30%)이었다. 전체 피해자 중 유죄가 선고되어 가해자에게 처벌이 내려진 경우는 단 112명(14%)뿐이었다.
사례조사 대상 피해자의 불기소 이유서를 통해 확인한 불기소 사유 건수(83건) 중 ‘피해자의 상태를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로 보기 힘들다’가 24건(29%), ‘블랙아웃으로 보인다’가 11건(13%)으로 두 사유가 35건(42%)에 달했으며,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이 낮다’가 20건(24%), ‘피해자의 대처 양상이 피해자답지 않다’는 사유가 11건(13%)이었다.
무죄로 판단한 이유도 불기소 이유와 유사하였다. 무죄가 선고된 사건의 무죄 이유 건수(51건) 중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로 보기 힘들다’가 15건(29%), ‘블랙아웃으로 보인다’가 7건(14%)으로 비슷하게 43%에 달했으며, ‘가해자의 고의성이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되지 않는다’가 12건(24%),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낮다’가 10건(20%), ‘피해자답지 않아서’가 4건(8%) 등이었다.
따라서 준강간 사건에서의 쟁점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인지 여부, 가해자가 피해자의 이러한 상태를 이용하였는지 여부이며, 실제 법적 진행과정 전반에는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이 함께 작동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가해자의 고의’도 증명하라고?
준강간 사건은 피해자가 기억하거나 대응할 수 없는 상태에서 발생하는 범죄로 사건 전후 및 피해 상황을 기억하는 가해자의 진술로 구조화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해자는 성폭력 발생 사실 자체를 부인하거나 성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피해자가 만취인 줄 몰랐다’, ‘피해자가 성관계에 이미 동의하였다’고 주장하며 고의를 부인하는 경우가 많다.
수사기관이 피해자의 만취 상태를 이용하여 가해자가 성폭력을 했다는 고의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어떠한 말과 행동과 방법으로 동의를 구했는지, 피해자는 어떻게 답을 했는지 면밀히 조사하여야 하지만, 거짓을 말하거나 사실관계를 왜곡 혹은 편집하며 부인하는 가해자의 진술이 그대로 불기소 이유가 되고 있다. 사법기관도 크게 다르지 않아 수사기관의 기록만을 토대로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높은 증명이 되지 않았다며 무죄로 판단하곤 한다.
그러나 준강간에서의 고의는 반드시 확정적 고의일 것을 요하는 것이 아니며 미필적 고의로도 이미 충분하다. 즉, 피해자가 만취되어 있는 상태를 알고 있다면 이미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거나 적어도 의심할 수 있다. 피해자가 판단하고 조절하고 대응하는 능력이 없거나 현저히 떨어지는 상태임에도 성적 행위를 중단하지 않거나 새로운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면 이는 가해자가 준강간의 고의를 가지고 실행하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다만, 가해자가 피해자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였는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건 전후의 구체적인 정황과 피해자와 가해자와의 관계, 사건 당시 피해자와 가해자의 상태, 피해자와 가해자 진술의 신빙성 여부, 가해자가 피해자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적극적으로 확인하였는지 여부, 가해자가 피해자로부터 어떻게 적극적인 합의를 구하였는지 등도 면밀히 조사되어야 한다.
‘성폭력은 성차별과 불평등이 만연한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어 가는 것과는 별개로, 수사 및 재판 과정의 피해자는 여전히 편견이나 통념의 잣대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성폭력의 발생 요인과 대응에 대한 개인의 책임이 강조되고 있다.
‘준강간사건의 정의로운 판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에서 조사 및 분석한 준강간 피해자 중 17%가 수사 및 재판 기관에서 왜곡된 인식이나 편견이 있다고 응답했고, 그 내용으로는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태도(20%), 즉시 신고를 하지 않음(17%), 피해자답지 않음(22%), 피해자의 성이력(7%) 등 정형화된 성폭력 피해자상을 가지고 있음을 이유로 들었다.
특히 술이나 클럽 등에서 즐겁게 놀고 마시고 춤추다가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을 다룰 때는, ‘성관계 당시에도 가볍게, 즐겁게 혹은 쉽게 동의하였을 것’이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 및 수사재판 과정 전반에 자리하고 있다. 클럽에서 즉석만남을 했거나, 함께 술을 마셔서 기분이 좋았거나, 가벼운 스킨십을 했으면 성관계까지 동의할 수 있다는 왜곡된 통념과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견이 처벌을 막고, 가해자들의 범죄를 방조하고 있다.
준강간 판단 기준을 ‘동의 여부’로
성폭력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법익으로 하고 있으며,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동의에 기반해야 한다. 이때의 동의란 내가 상대방과 성관계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선택 가능한 것이어야 하고, 성관계를 하고 난 이후 성관계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까지도 생각하여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술이나 약물 등을 이용하여 성폭력을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는 준강간 사건에는 공통적으로 ‘가해자와 성관계에 동의한 적이 없다‘는 피해자의 호소가 전제되고 있다. 이 전제는 준강간의 판단기준이 ‘동의 여부’로 바뀌어야 하는 이유이자,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로 동의도 거절도 할 수 없던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준강간죄를 '동의 여부'로 판단한다면 동의를 할 수 없었던 피해자의 상태를 살피면 될뿐, 가해자가 피해자의 이러한 상태를 이용했다는 것 또한 증명할 필요가 없다. 다만 ‘동의가 있었다’는 가해자의 주장이 심신상실된 상태에서의 동의를 포함하는지까지 파악하여 완전하고 적극적인 동의가 아니라면 성폭력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동의 여부’로 바꾸기 위해서는 법의 개정이 필요하다. 또한 성관계 시의 ‘동의’라는 개념과 동의 방법에 대한 수사 및 재판 기관의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성폭력이 발생하는 맥락, 상황, 구조, 권력 관계를 살피는 성인지적 관점의 훈련이 선행된다면, 강간죄 개정에 대한 오해와 우려는 없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완전하고 적극적인 동의가 없었다면 성폭력’이라는 인식 변화를 위한 교육과, 문화 및 정책의 개선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술이나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의 근절은 물론, 성평등한 사회에서 개인의 권리 보장을 위한 최우선의 방법일 것이다.
[기록 :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천주교성폭력상담소는 성평등한 사회구조 안에서 모두가 자신의 목소리와 경험을 통해 주체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 차별과 편견, 폭력과 혐오에 저항하며 모두의 존엄을 위해 함께 싸우고 미래를 희망할 수 있길 바랍니다. 여성의 일상적인 삶 속에 함께 고민하고 함께 연대하고, 함께 성장하여 서로가 서로의 마중물이 되는 사회를 위해 활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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