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사건을 상담, 지원하는 현장 단체들은 꾸준하게 성폭력의 판단기준을 ‘폭행과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바꾸는 법 개정과 사회 인식의 변화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성폭력 운동을 하는 단체들의 경험과 목소리를 토대로 현행법 상 드러나는 쟁점과 문제, 개정의 필요성을 담아 총 7회에 걸쳐 릴레이 칼럼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권력형 성폭력, 가해자는 폭행이나 협박을 할 필요가 없다
성폭력의 유형 중 직장 내 성폭력, 즉 일터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이 가장 빈번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통계에 따르면 성폭력의 피해자-가해자 관계 중에서 ‘직장 내 관계’가 30.1%(2020년), 22%(2022년)로 제일 높다.
그런데 일터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폭행이나 협박’을 사용하는 성폭력과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직장이란 곳은 때론 성희롱, 성폭력, 갑질과 착취, 성매매가 일어나며, 구성원의 거부 의사나 문제 제기가 묵살되는 대표적 사회단위가 될 때도 있다. 특히 일터의 고용, 배치, 평가, 승진을 결정하는 권력과 위계가 성차별, 전횡과 배제, 남성중심주의, 성폭력 방조 등의 직장문화와 만날 때 그렇다.
개별 사업장만이 문제가 아니다. 2016년 소셜네트워크 트위터에서 일어난 #OO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은 #교회 #문학계 #클래식계 #웹툰 #군대 등 ‘소속집단’ 안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을 고발했다.
소속집단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의 양상은 하나같았다. 일단 각 집단에는 자원을 배분하거나 회수할 수 있는 권력자가 존재한다. 그리고 권력자들의 우월적 행위에 문제 제기하지 않고, 의문도 품지 않는 주변 구조가 있다. 이 때 자행되는 성폭력은 피해자의 생계, 진로-학업, 인간관계, 사회생활을 가로막는다.
우월적 지위에 의한 성폭력은 미투 운동에서 집중 조명됐다. 이들 권력자들은 누군가를 고용하거나 해고할 수 있고, 평판을 좌우하고, 피해자들을 다시는 이 바닥에 발을 못 붙이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그들이 자행한 강간, 추행, 성희롱에 대해선 법이 있어도 피해자가 신고하기 어렵다. 학교 폭력, 군대 내 폭력, 직장 갑질, 아동학대처럼 피해자는 자신의 소속집단과 일터 안에서 좌절, 고립 상태에 놓인다.
이러한 유형의 성폭력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강간처럼 극심한 폭행이나 협박이 사용될까? 또, 가해자에게 피해자가 극렬하게 저항할 수 있을까?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작동하는 권력적 지위, 그 면전에서 즉시 소리 지르고, 밀치고, 몸싸움을 하고, 뛰쳐나올 수 있는 사람은 현실에 거의 없다.
그러나 현행법상 강간죄는 ‘폭행과 협박을 통해서 피해자를 저항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판단될 때를 기준으로 하는 최협의설(가장 좁게 해석함)을 택하고 있기 때문에, 직장 내 위계 관계에서 일어고 있는 성폭력은 강간죄로 고소하기 어렵다.
미투 운동 시기에 우월적 지위에 의한 성폭력 사건 일부는 강간, 추행죄와는 다른 법조항으로 고발되었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다. 형법과 성폭력특별법 상의 아래 조항을 말한다.
-형법 제303조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①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②법률에 의하여 구금된 사람을 감호하는 자가 그 사람을 간음한 때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 10조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①업무, 고용이나 그 밖의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 추행한 사람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조항은 1953년 형법 제정 당시 ‘부녀의 정조 보호’를 목적으로 하면서, 강간죄나 강제추행죄보다 가벌성(범죄가 성립될 가능성)이 낮은 보충적 유형의 범죄로서 마련되었다.
미투 운동 시기 ‘업무상 위력 간음죄’가 주목받은 것은, 그동안 강간죄와 강제추행죄로는 구제하지 못했던 권력형 성폭력의 구조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폭행·협박이 없는 성폭력의 문제 말이다. ‘위력’, ‘위계에 의한 성폭력’ 개념의 중요성은 강간죄 체계의 한계 때문에 대두된 것이다.
업무상 위력 간음죄가 있으니, 강간죄 개정할 필요 없다?
강간죄 판단 기준을 폭행·협박이 있었는가 여부가 아닌, ‘동의 여부’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 일각에서는 ‘업무상 위력 간음죄’가 있으니까 강간죄를 개정할 필요가 없다는 논거를 핀다. 폭행·협박이 없어도,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처벌하는 조항이 따로 있으니까 보완되고 있지 않냐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업무상 위력 간음/업무상 위력 추행죄가 있다는 점이 강간죄 개정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첫째, 업무상 위력 간음죄는 얼마나 현실을 포섭하는지 살펴보자.
통계청 국가통계포털의 경찰청 범죄통계에 의하면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발생 건수는 2016년 18건, 2017년 24건, 2018년 30건, 2019년 27건, 2020년 32건, 2021년 24건이다. 같은 기간 ‘강간죄’ 발생 건수는 2017년 5,223건, 2018년 5,293건, 2019년 5,310건, 2020년 5,313건, 2021년 5,263건이다.
업무상 위력 간음죄가 존재하는 이유는 업무나 고용, 기타 관계 때문에 보호나 감독을 받는 관계에서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으며, 처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을 살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 고소·고발 사건은 강간죄로 고소·고발된 사건의 0.45%에 불과하다. 사실상 사문화되어 있다.
두 번째, 업무상 위력 간음죄 역시 ‘물리적 폭력’ 위주의 패러다임에서 판단된다. 왜 이렇게 적을까? 여전히 폭행·협박을 중심으로 한 물리적 폭력 위주로 강간죄의 개념을 파악하고 있으며, 물리적 폭력이 극심하지 않다면 피해를 당했을 리 없다는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이는 법조인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업무상 위력 성폭력이 인정되는 사례 극소수
2018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력 사건 1심 직후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 일부 법조인들은 ‘성인 여성에 대한 위력 성폭력은 인정이 어렵다’고 말했다. 내용을 살펴보자.
“왜냐하면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이라고 하는 게 사실 입증되기가 매우 어렵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미성년자이거나 장애인이거나 이런 분들에 대해서 인정이 되어 왔던 건이기 때문에요. 성인 여성이고 또 어느 정도 사회적인 그런 지위나 판단 능력이 있는 분들에 대해서는 사실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성폭행이라는 건 폭력이나 협박을 통해서 강제로 성관계를 하는 게 성폭행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끔은 폭력이나 협박이 없어도 원치 않는데 어쩔 수 없이 성적 자유결정권이 침해되는 사례들이 있었어요. 그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피해자가 미성년자이거나 아니면 장애인이거나 그런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거부하기도 힘들고, 또 이 사람의 위세나 권세에 눌려서 어쩔 수 없이 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람에 의해서, 원치 않아도 성관계를 해야 되는 경우도 처벌해야 되는 게 아닌가 라는 그런 생각에 나온 게 위력에 의한 간음죄예요.”
이런 발언들은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죄’에서 ‘업무, 고용 관계’는 아예 삭제하는 인식을 보여준다. 가해자가 지위를 이용해 성폭력을 저지른 점에 핵심을 두는 게 아니라, 피해자가 장애가 있는지, 연령이 어린지에 따라 범죄 성립 여부를 가르고자 하는 것이다. 심지어 성인여성이고 판단능력이 있다면 법적용이 어렵다고 단정하고 있다. ‘폭행과 협박이 극심하고’, ‘저항을 얼마나 했는지’, ‘저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할 정도’였어야 강간 피해자일 수 있다는 강간죄의 패러다임이 업무상 위력 간음죄에도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업무상 위력 간음죄 고소·고발과 강간죄 고소·고발이 2021년 기준 각각 24건과 5,263건인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나? ‘업무상 위력 간음죄’가 있으니 ‘강간죄’는 개정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은 무색하다. 오히려 강간죄 패러다임 때문에 업무상 위력 간음죄는 취지와 목표도 제대로 실현되지 않고 있다.
강간죄 규정, ‘동의가 부재한’ 성적 침해로 변경해야
업무상 위력 성폭력에서 ‘위력’을 어떻게 해석할지 형법적인 논의도 최근 활발하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 1심 재판부가 ‘위력은 있었지만, 행사하지 않았다’라며 무죄를 선고한 후부터다.
“위력 간음죄의 가해자, 피해자 사이 커뮤니케이션이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 즉 ‘수용/불수용을 자신의 의사에 기하여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유의사를 왜곡하는 힘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김성돈, "형법상 위력개념의 해석과 업무상 위력간음죄의 위력", 『형사정책연구』 2019년 30권 1호)
2021년 UN인권이사회가 채택한 〈강간에 관한 특별보고서〉와 〈모범적 입법을 위한 프레임워크〉는 강간의 성립 여부를 ‘동의 여부’로 하고, 권력적 지위나 권위 남용에서는 동의가 없다고 추정해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권력과 위력, 영향력 또는 피해자와의 종속 관계가 있는 지위 등을 열거하고 있다.
강간죄는 ‘동의가 부재한’ 성적 침해로 그 구성요건이 변경되어야 한다. 폭행·협박은 말할 것도 없는 ‘가중사유’다. 업무, 고용, 그 밖의 관계를 이용한 위력의 행사는 피해자의 동의도, 거절도 왜곡하고, 거부하지 못하게 만드는 힘으로 살펴지고 가중 처벌되어야 한다.
[기록 : 한국성폭력상담소] 1991년 개소하여 89,000여 회 성폭력 피해상담을 통해 한국 사회 성폭력 문제를 분석하고 법제도 및 사회문화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여성인권운동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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