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즈 비 앰비셔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유명한 말이다. 야망은 오직 소년들의, 남성의 몫인 것처럼 그려져 왔다. 야망을 가진 남자, 그리고 그것을 좇다가 무너지는 남자는 미디어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마틴 스콜세지 영화 속의 남자들, 한국 조폭, 형사 영화 속의 남자들이 그러하다. 너무 많은 남자 배우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서 하나만 언급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들은 돈을, 권력을 좇고 여자를 거느리며 자신보다 더 돈이 많고 권력이 있는 남자들에 의해 파멸 당하기도 한다.
소년에게 야망을 심어주고, 남자들을 거칠게 찍어낼 동안 소녀들은 어떻게 그려졌는가. 청순하고, 마르고, 연약하고, 풀메이크업을 받은 채로 프레임 안에 놓였다. 소설 〈소나기〉 속의 아픈 첫사랑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반복됐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소녀’ 이미지에 반하는 10대 여성이 등장했다. 〈박화영〉(이환 감독, 2018) 속의 박화영이 그러했고, 〈최선의 삶〉(이우정 감독, 2021)의 세 주인공이 그러했다. 〈성적표의 김민영〉(이재은, 임지선 감독, 2022)은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불안을 입체적으로 담았다. 〈레이디 버드〉(그레타 거윅 감독, 2018)의 여학생은 메이크업을 하지 않았고, 〈주근깨〉(김지희 감독, 2019)의 주인공 영신은 마르지 않았다.
코믹 판타지가 아니다
주인공 10대 소녀 두니아는 집시 마을에 살고 있다. 소녀의 꿈은 첫사랑이나 공주가 아니다. 바로 부자가 되는 것. 두니아는 야망을 이루기 위해 마약을 판매하는 조직에 들어가기로 한다. 이 조직의 수장인 레베카도 젊은 여성이다. 두니아는 레베카의 마음에 들기 위해 레베카의 부하가 보관하는 마약을 훔쳐서 레베카의 집으로 가져온다.
여기서 또 한 번의 뒤집기가 펼쳐진다. 집의 문을 여는 것은 속옷 바람의 백인 남성이다. 남성이 레베카를 부르고 레베카가 온다. 둘이 잠자리를 하는 사이임이 암시가 된다. 권력자는 흑인 여성이고, 그의 잠자리 상대는 백인 남성이다. 흔히 미디어에서 보던 것과는 정반대다. 레베카는 백인 남자의 엉덩이를 가볍게 찰싹 때리기도 한다. 백인 남성은 레베카의 사랑이 아니다. 권력의 일부일 뿐이다. 수많은 여성이 남성의 권력의 일부로 그려진 역사를 뒤집는 씬이다. 인종 권력, 성별 권력을 전복시키는 이 씬에서 두니아는 조직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
강한 여성은 존재한다
여자 형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걸캅스〉(정다원 감독, 2019)에서 라미란 배우가 생수통을 드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을 본 몇 남성 관객들은 여자가 생수통을 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판타지라며 시비를 걸었다. 강한 여성은 정말 존재하지 않는 걸까? 불가능한 걸까? 남성들이 더 잘할 수 있는 직군이 따로 있는 걸까? 그러니까 남자배우들에게 다양한 역할이 가는 것이 당연한 걸까?
이런 의문이 들 때마다 이제 내 귀에는 사이렌이 들린다. 그리고 실존하는 강하고 거칠고 힘센 여성들의 얼굴이 몰아친다. 넷플릭스 시리즈 〈사이렌 : 불의 섬〉은 각기 다른 6개 직군의 여성들이 모여서 기지를 탈환하고 힘을 겨루고 전략을 짜고 습격을 한다. 각 직군은 경찰, 군인, 경호, 소방, 스턴트, 운동으로 사회와 미디어에서 여성보다 남성이 잘할 것이라는 착각을 심어놓은 분야다. 4명이 여성이 직군 별로 한 팀이 된다. 장작을 패고, 삽질을 하고, 그러다가 더우면 웃통을 벗는 그들에게는 힘과 승부욕이 넘쳐난다.
이들은 연출된 존재가 아니다. 실존하는 인물이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힘을 키워온 여자들이다. 미디어에서 덧씌워온 이미지들을 장작처럼 쪼개고 땅처럼 삽질해서 맑은 물을 길어 올린다. 〈사이렌 : 불의 섬〉을 보고 나면 〈걸캅스〉도 〈디빈: 여신들〉도 그저 ‘미러링’에서 온 농담이나 판타지로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실존하는 그들과 눈을 맞췄기 때문이다.
두니아는 마약을 판매하면서 점점 두목 격인 레베카에게 인정을 받게 된다. 두니아의 가장 친한 친구인 마이무나도 함께한다. 그들은 황금빛 미래를 꿈꾼다. 두니아가 공터에서 마이무나에게 구체적인 야망을 말하는 씬이 있다. 두니아는 푸켓에 가서 페라리를 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페라리를 타는 모션을 취한다. 그리고 마이무나에게 말한다. “가자.” “너나 가.” “넌 안 가? 알겠어. 그럼 혼자 간다.” 마이무나가 잠깐만을 외치고 두니아의 옆으로 온다. 차 문을 열고 닫는 시늉을 한다. 두니아가 입으로 시동 거는 소리를 낸다. 그리고 상상의 페라리가 출발을 한다.
여기서 카메라는 실제 주행하는 차를 찍듯이 촬영한다. 두니아와 마이무나 역시 달리는 페라리에 진짜로 타 있는 것처럼, 부드럽게 이동한다. 카메라는 마치 차의 보닛 위에 부착된 것처럼, 이동하는 둘과의 거리를 유지한 채 공터를 달린다. 촬영 현장에서는 이 마법을 연출하기 위해 아마도 두 배우가 바퀴가 달린 무언가 위에 촬영감독, 카메라와 함께 탑승했을 것이다. 아니면 이동 장치에 카메라를 부착했을 수도 있다. 배경은 공터이지만 카메라의 무빙은 페라리 보닛 위다. 그리고 사운드가 야망을 실현시킨다. 주행 중인 자동차에서 나는 엔진 소리가 나고, 급커브를 돌 때는 브레이크 소리가 들린다. 지나가는 차의 클락션 소리도 들린다. 그리고 그 둘이 외친다. “머니, 머니, 머니!”
현실을 꿋꿋이 보여주던 영화가 이 씬에서 만큼은 판타지적인 연출을 택했다. 소녀의 야망을 보여주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을 한 셈이다. 나는 비싼 차, 많은 돈, 근육질의 남자를 거느리고 싶어 하는 10대 소녀의 얼굴을 미디어에서 처음 보았다. 낯선 이미지면서도 왜 그간 불가침의 영역처럼 다뤄지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었다. 이 낯설지만 반가운 소녀의 야망을 위해 감독은 카메라의 무빙으로, 사운드로 의사를 표현했다. 어디 한 번 갈 데까지 가보라고. 돌진하고 부딪혀보라고.
두니아는 그렇게 돌진하고 부딪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야망에 취해 비윤리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고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 중년 남성이 주인공인 느와르 서사의 전형을 10대 여성이 가져왔다. 권력에 취하고, 강해지고 싶어 하고, 과정에서 흔들리고, 끝내 절규하고 무너진다. 지겹게 봐온 서사의 클리셰도, 성별의 클리셰를 벗어나자 새롭게 다가온다. 이런 얼굴이, 표정이 있었는데 그간 미디어에서 잘도 꽁꽁 감춰왔다.
두니아의 야망과 성공, 절규와 실패는 완벽한 롤모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여성이, 소녀가 꼭 고결하고 윤리적으로만 그려질 필요는 없는 법이다. 작년에 출간한 책 『아무튼, 할머니』(신승은 저, 제철소)에서 “여자를 악하지 않게 그리는 것도 납작하게 그리는 방법 중 하나일 수 있겠구나.”라고 적은 적이 있다. 많은 소수자들이 이런 방식으로 납작하게 그려진다. 청순한 여성, 착한 장애인, 귀여운 어린이가 그러하다. 〈디빈: 여신들〉의 두니아는 납작한 역사를 찢고 나온다. 착하지도 귀엽지도 청순하지도 않은, 마음에 드는 남자를 놀리고 괴롭히는, 마약을 팔고 차를 불태우는 두니아가 여기에 있다.
두니아와 마이무나가 자라온 환경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슬림의 세계다. 히잡 속에서 키워온 뒤틀린 야망은 그 어떤 거대한 천으로도 가릴 수 없었다. 인물의 선택과 성격을 옳고 그름의 기준에서 판단한다면 두니아는 옳지 못한 인물이다. 하지만 수많은 옳지 못한 남성 캐릭터들에는 이런 판단이 따르지 않는다. 이 인물을 제대로 바라보려면 새로운 기준이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 고정관념이냐 변혁이냐의 기준으로 바라본다면 두니아는, 이 영화는 변혁이다.
하정우, 황정민, 마동석, 이병헌의 야망을 너무 많이 봤다. 새로운 야망이, 새로운 나쁨이 필요하다. 거칠고, 포악하고, 돈밖에, 모르고, 방탕한, 그렇게 살다가 상처 입기도 무너지기도 절규하기도 하는 얼굴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불가능도 아니다. 그동안 카메라가 한 쪽의 표정만 붕어빵처럼 찍어내는 동안 다른 쪽의 야망은 어쩌면 더 잔인하게 커졌을 지도 모른다.
[필자 소개] 신승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영화감독. 1집 앨범 [넌 별로 날 안 좋아해](2016), 2집 앨범 [사랑의 경로](2019)를 발매했으며 단편영화 〈마더 인 로〉(Mother-in-law, 2019), 〈프론트맨〉(Frontman, 2020) 등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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